총파업은 공장을 정지시키는 일반적인 파업과 다르다. 총파업은 더 나은 조건을 요구하기 위한 것도, 교섭을 위해 위협하는 전략도 아니다. 오히려 총파업은 현 체제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현 사회 체제 자체를 중단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 체제에서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판단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2012년 5월 1일 도시를 멈추고 거리로 나가자!" 서울광장을 점령한 '서울점령자들'이 제안하고 30여개의 워킹그룹이 달라붙어 메이데이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날 비정규직, 백수, 실업자, 감정노동자, 예술가, 디자이너, 시인, 작가 등 다양한 목소리와 요구를 가진 이들이 거리로 나올 것이다. 'No Work, No School, No Housework, No Shopping'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5월 1일 하루를 도시를 멈추는 날로 만들기 위함이다. 4일 간 '메이데이 총파업' 연재를 통해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한다. (☞ 메이데이 총파업 블로그)
1. 노동자계급과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노동자계급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프레카리아트'라는 계급이. 생산의 유연성을 뒷받침하는 고용의 유연성을 위해 자본가들은 파트타이머와 임시직, 파견노동이나 도급노동 등의 다양한 비정규 노동 형태를 확대했고, 그에 따라 노동자이면서도 '정상적인' 노동자라고 할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거대한 집단이 출현한 것이다. 이들은 비정규노동자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단지 비정규노동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고용을 극소화하고 유연성을 극대화하려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노동 자체에서 축출되거나 배제된 사람들은 물론, 자의반 타의반으로 애써 구직의 길을 찾지 않게 된 백수들, 장애인이나 미혼모처럼 신체적 장애나 제도적 '장애'로 인해 정상적인 노동자로 살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 혹은 등록금 마련을 위해 알바시간 피해가며 학교를 다니는 비정규 대학생 등 이유와 양상을 달리 하는 이질적인 사람들의 집단이 출현한 것이다. 이들을 프레카리아트란 말로 명명하게 된 것은 노동형태가 제공하는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안정성마저 갖지 못했다는 어떤 공통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레카리아트'는 불완전한 노동자라고 해야 할까?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정상적이고 정규적인 삶을 노동하는 '항상적인 노동자'에 반해 일부분만을 노동하는 '일시적인 노동자'고, 삶 전체가 노동에 귀속되는 노동자에 비해 그 일부분만이 노동에 귀속되는 '부분적인 노동자'다. 그렇다면 노동자계급과 프레카리아트 사이에서 우리는 노동에 귀속된 시간의 양적 차이만이, '정도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해야 할까? 따라서 그 양적 차이를 극복하여 부분적인 노동자가 전체적인 노동자가 되고, 일시적인 노동자가 항상적인 노동자가 되는 것이 프레카리아트의 정치학이 나아갈 목표라고 해야 할까?
정말 비정규노동자는 정규노동자와 동일하게 정상적인 노동의 지반을 공유하면서, 가끔씩만 거기서 쫓겨나는 노동자일까?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한 번 비정규노동자가 되면, 정규노동자가 되기가 극도로 어렵다는 사실을. 동일한 지반을 공유하고 있다면, 노동시간의 양적인 크기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이 경우 비정규란 약간 모자라는 정규, 양적 확장을 통해 메울 수 있는 차이를 단지 '비'라는 말로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가 아닐까? 비정규노동자, 혹은 프레카리아트란 노동이 아니라 비노동을 그 항상적인 지반으로 삼고 있으며, 가끔씩만 노동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존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심지어 하는 일이 정규직과 동일하고 노동시간이 정규직과 동일해도 결코 동일한 지위에 있다고 하기 어려운 그런 존재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보다는 오히려 실업자, 백수와 동일한 지반을 공유하고 있으면서, 가끔씩 그로부터 벗어나는 그런 존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그들에게 노동이란 비정규적일 뿐 아니라 비정상적이다. 실업이라는 상태를 '정상적'인 것으로 하기에, 가끔씩만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기에, 노동 자체가 '비정상'이고 '비정규'인 그런 노동이라고 해야 한다. 비정규의 '비'는 정규적 노동과의 양적 차이를 표시하는 부정의 표시가 아니라, 정규적 노동과 다른 지반에 있으며 다른 정상상태를 갖고 있음을 표현하는 질적 차이의 징표라고 해야 한다.
2. 공장의 계급과 거리의 계급
노동자 계급은 공장의 계급이다. 노동력의 흐름을 공장이라는 공간적 구획선을 따라 분할하여 절단·채취하는 공간기계와 상관적이다. 공장이란 일상적인 노동의 공간이고 항상적인 작업의 공간이다. 최대치의 시간을 가능한한 연속적으로 노동하게 하는 공간이다. 그런 노동의 항상성을 위해 사람들을 가두어 놓고('완화된 감옥') 정상적인 동작을 모델로 훈육하고 정상화(normalization)하는 공간이다. 그러한 공장 안에서 노동자는 맑스의 말 그대로 가변자본이다. 자본에 포섭된 자본의 일부다. '과학적' 분할의 도식 아래 할당되고 생산물의 제작경로를 따라 합리적으로 분배된 고정된 자리에 못 박힌 채, 주어진 작업을 반복하는 귀속의 체계가 거기에 있다.
노동조합처럼 노동자의 일상적인 조직이 동일한 귀속의 체계에 따라 형성되고 작동하며, 노동자의 단결 또한 그런 공간적인 구획에 따라 조직되는 것도, 공장을 넘어설 때조차 공장 단위의 조직을 상급의 유기체로 통합하는 길을 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소비에트'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노동자 평의회가 공장이라는 생산의 장에서 생산자들을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또한 노동자들이 자본의 지배나 착취에 저항을 시작할 때, 공장의 가동을 중단시키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해 나아가고자 할 때, 공장을 점거하고 그것을 장악하고자 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그래서 공장단위의 파업은 물론 공장을 넘어선 확대된 규모의 파업, 심지어 총파업조차 노동자들에겐 공장들의 정지를 확대하는 것으로 표상된다. 노동도, 저항이나 투쟁도, 모두 공장이란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 공간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반면 프레카리아트는 거리의 계급이다. 정규적이고 일상적인 노동의 시간이 전통적인 노동의 공간인 '공장'과 상응한다면, 일상적인 비노동의 시간은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헤매고 다니든, 인터넷을 뒤지든, 아니면 노동을 포기하고 자기의 길을 가든 거리라는 공간과 상응한다. 노동자계급이 공장에서 벗어난 시간에도 사실은 잠재적으로 항상-이미 공장에 속한 계급이라면, 프레카리아트는 일할 곳을 찾아 공장 사이를 떠돌고 있는 존재다. 공장에서 일을 하는 시간에도 사실은 그 공장에 속해 있지 않은 존재며, 공장들의 바깥, 이 공장 저 공장 사이에 있는 존재다. 노동의 공간과 비노동의 공간 사이를 이동하고 배회하는 존재다. 이 점에서 그들은 '공장의 계급'인 노동자보다는 오히려 '거리의 계급'인 실업자와 더욱 근접한 곳에 있다. 일시적인 노동이 주어지지 않는 순간, 일시적인 노동으로 호출하는 호명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순간, 실업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인접성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터이다. 비정규노동자가 해고되어 일정 기간 동안 일자리를 찾는데 실패할 경우 노숙자가 되는 경우마저 지금 일본에선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실업자나 노숙자만이 거리의 계급은 아니다. 적절한 자리 찾기도 힘들고 인생을 걸 어떤 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동에 인생을 걸기 위해 거리를 방황하길 포기하고, 자의반 타의반 노동 없이 사는 길을 모색하는 '백수'들 또한 거리의 계급이다. 대개 청년이기도 한 이들은 공장만큼이나 집에도 머물기 어려운 존재고, 집에 있다고 해도 인터넷이나 다른 통신수단으로 이미 다른 공간으로 빠져나간 존재다. 집에서도 공장에서도 벗어나 불특정의 어딘가로 이동 중인 존재고, 이동의 공간을 항상 방황하는 존재다.
여기서 거리를 단지 물리적인 도로만을 뜻한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것은 때론 물리적인 이동의 공간이기도 하고 때론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로 연결된 전기적인 이동의 공간이기도 하다. 실제로 비정규노동자를 호출하거나 해고하는 것은 단지 이동전화나 통신상의 아주 간단한 문자들로 대체되었고, 이들이 새로운 직업을 찾아 방황하는 것 또한 길거리가 아니라 인터넷상의 공간이다. 아마도 인터넷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은 이들이 아닐까? 일본은 여기서도 또 하나의 첨단을 보여준다. 피시방을 뜻하는 '넷카페'를 갖지 못한 집을 대신할 주거지로 삼아 살며, 구직을 위해 항상 인터넷에 접속한 채 살며 그것으로 비노동의 시간을 채우는 이른바 '넷카페 난민'은 이들이 방황하는 거리가, 혹은 이들이 사는 주거마저 인터넷 상의 공간으로 대체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떠도는 거리란 무엇보다 항상 어딘가 사이를 떠도는 마음 속의 공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딘가 고정되고 안정된 공간에 붙박혀 사는 정착민이 아니라, 그나마 노동의 공간에서마저 뿌리 뽑혀 멈춰있어도 이동 중인 존재, 노동하고 있어도 그곳에 없는 존재, 언제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방황하고 이동하는 이주민인 것이다.
3. 공장의 점거와 거리의 점거
이주민들이 이동을 멈추는 것은 두 가지 다른 사태를 통해서다. 하나는 그들이 찾는 정착지를, 새로운 공장, 새로운 집을 찾아 안착하는 것이다. 정착민이 되는 것이다. 정규직화에 대한 욕망이나 요구는 이 방향을 찾아가고 있다. 불행한 것은 지금 자본주의가 이런 정착의 공간을 제대로 제공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반면 자본가들이 줄 수 없는 것, 자본주의 국가가 제공할 수 없는 것을 찾기를 중단하고,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을 반복해서 떠나길 그치며 그 자리를, 자신들이 배회하는 그 거리를 자신들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거리의 계급임을 자각하고 그 거리에서 사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먹고살 길 없음을 뜻하기에 항상 있어도 떠나야 하는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법을 창안하는 것이다. 이주민과 구별하여, 유목민이란 움직이지 않는 자라는 역설적 정의를 제안했던 들뢰즈/가타리라면, 이러한 이동의 정지 속에서 정착과 반대로 유목을 볼 것이고, 불모가 된 거리에서 살아가려는 자들 속에서 새로이 탄생하는 유목민을 발견할 것이 틀림없다.
나는 공원에 텐트를 치며 거리를 자신들의 공간으로 만들었던 '점거(occupy)운동'을 바로 이런 것이었다고 이해한다. '노동의 종말'이 예견되던 '20과 80의 사회'에서 80을 향해 가던 노동마저 상실한 계급, 그것을 지나 노동하고 있어도 사실은 이미 축출과 배제의 힘 속에서 반쯤은 이미 거리로 밀려난 노동자들마저 포괄하는 99%의 이름으로 월가를 점령하기 위해 시작한 거리의 점거, 그것은 '유연성'과 효율성의 이름 아래 모든 이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는 1%의 부와 권력에 대해 항거하려는 거리의 계급의 봉기다. 이윤을 향한 유연한 운동을 위해 생산마저 포기하고 끝도 없는 파생상품으로 전세계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간 금융자본의 '벽'을 향해, 부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벽을 통해 99%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려는 자들의 목전에서, '거리의 점거'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는 그 운동을, 강력한 전염력을 갖고 전세계로 확대되어 가는 그 운동의 선두에서 우리는 '거리의 계급'을, 프레카리아트를 발견한다. 이동의 공간을 유목의 공간으로 만들고, 방황하는 이주민의 삶을 창조적인 유목민의 삶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혁명적 창안을.
여기서 거리의 점거와 공장의 점거 사이에 흔히 상정하는, 일종의 위계마저 함축하는 유비적인 관계를 넘어서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유통이나 소비에 비해 생산을 우위에 놓은 것이나, 거리라는 이동의 공간에 대해 공장이라는 생산의 공간에 일차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거리의 점거는 중심의 점거로, 중심인 공장의 점거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아마도 생산자 평의회 같은 공장단위의 조직을 통한 공장의 장악이 그 다음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혁명의 심화과정이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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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거리의 계급은 '불완전한' 공장의 계급이 아니다. 공장의 계급으로 결국은 귀착되어야 할 불충분한 노동자가 아니다. 거리의 계급은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며, 거리의 점거는 바로 그 자신의 공간을 점거하는 것이다. 그들이 공장의 점거로 나아갈 이유는 없으며, 그럴 경로 또한 없다. 거리의 계급이 노동시간의 양적 차이를 가질 뿐인 '불완전한' 공장의 계급이 아니듯, 따라서 공장의 계급으로 귀착되어야할 계급이 아닌 것처럼, 거리의 점거는 공장의 점거를 위한 계단이 아니며 공장의 점거로 귀착되어야 할 예비적 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 상이한 질을 갖는 투쟁이고 상이한 본질로 인해 상이한 양상으로 펼쳐질 수밖에 없는 투쟁이다.
먼저 공장의 점거는 공장노동자 자신의 결속력을 근간으로 하며, 공장이라는 경계 안에서 노동자들을 응집하는 구심력을 통해 진행된다. 연대 또한 공장이라는 공간적 단위들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고, 연대를 통한 힘의 확산은, 혁명적 상황이 아닌 한, 문제가 되고 있는 공장에 힘을 더해주는 귀속의 지점을 뚜렷하게 갖는다. 반면 거리의 점거는 거리의 이웃한 다른 이들을, 다양한 계급적 귀속을 갖는 이질적인 대중들을 불러들이는 특이점을 형성한다. 그러나 특이점으로서의 흡인력을 발동시킬 때에도, 그 힘은 점거한 장소로 귀속될 이유를 갖지 않는다. 점거한 장소란 단지 거리로 대중이 흘러넘치고 투쟁이 확산되도록 하기 위한 거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흡인의 구심력은 점거한 장소를 둘러싸고 있는 인접한 거리들을 통해 곧바로 확산의 원심력으로 전환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상이한 본성을 갖는 이 두 가지 투쟁을, 하나를 다른 하나에 귀착시키는 방식으로 연결하거나 위계화해선 안 된다. 그것은 서로 결합하고 연대할 때조차 상이한 본성 각각이 유효하게 가동하도록, 그 상이한 본성이 결합되며 배가·고양되도록 해야 한다.
두 가지 점거투쟁의 성격이 이와 같다면, 양자의 관계나 결합에 대해 오히려 앞서의 통념과 반대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공장의 점거나 장악이 공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라면, 거리의 점거는 공장의 외부에서 공장을 포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기 때문이다. 공장의 점거가 공장에 머무는 한 고립을 면할 수 없다면, 거리의 점거는 반대로 거리를 통한 확장의 경로를 이미 갖고 시작한다. 그렇다면 거리의 점거에서 공장의 점거로 나아가야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반대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김진숙 씨의 한진중공업 크레인 농성투쟁은 아주 적절한 사례를 제공해준다. 그것은 물론 목숨을 걸고 300일의 긴 시간을 지속해 준 김진숙 씨의 농성, 그리고 그와 함께 해준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투쟁이 공장의 일부를 점거한 투쟁에 머물고 말았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공장의 점거와 농성이, 인터넷과 '희망버스'로 상징되는 거리의 점거로 확산되었기에, 그리하여 그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동을 야기하는 힘을 가동시켰기에, 그래서 한진중공업의 공장 외부로, 수많은 '외부세력'의 눈과 귀, 입과 손을 타고 거리로 흘러나갈 수 있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두리반의 승리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단지 두리반이 있던 건물의 점거농성에 그쳤다면 결코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그 건물로 거리의 계급들을 끊임없이 불러들이고, 그들을 통해 건물 자체를 다양한 종류의 활동이 만나고 생성되는 창조적 장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고정된 공간을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바꾸는 유목적 창안을 가동시켰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국지적인 공간의 점거를 거리의 점거로 변환하는 새로운 방법을 보여준다. 여기서 '두리반'이라는 하나의 국지적인 장소는 그 자체로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의 계급들이 다양한 양상으로 오가고 만나는 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두리반은 시간을 적이 아닌 친구로 삼는 투쟁이 될 수 있었고, 바로 그것이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4. 거리의 계급과 '총파업'
거리의 계급이 파업을 한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 파업이란 통상 '작업의 중단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공장의 가동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리의 파업은 거리의 작동을 중단시키는 것일 게다. 거리의 작동을 중단시킨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보면, 거리가 제공하는 이동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것일 게다. 가령 예전에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화물트럭으로 고속도로를 점거하여 도로의 기능을 정지시켰던 경우를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물리적으로 도로를 점거할 능력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역시 의미가 없다. 더구나 거리의 계급이 운수노동자처럼 물리적인 이동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공장 사이에 있는 계급을, 그 사이를 오가는 이주민을 지칭한다면, 이는 전형성의 이름으로 일반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거리의 계급이 '총파업'이란 말을 이런 의미로 제안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공문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파업에서 중요한 것은 작업의 중단이라는 물리적 사건이 아니다. 70년대나 80년대 초의 많은 파업들처럼, 공장의 중단으로까지 나아가지도 못한 경우에조차, 파업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은 그것이 야기한 '중단' 내지 '정지' 때문이었다. 파업의 시도가 공장의 정지를 이끌어내지 못한 경우에도, 파업은 그것을 위해 모여들고 활동한 이들의 '영혼'에 어떤 결정적인 중단과 정지를 야기한다. 부당한 것이 있어도 아무 말 못하고 시키는 대로 일만하는 무력한 태도를 중단시키고, 동료들과의 만남과 연대, 우정을 통해 자신만의 고립된 삶을 중단시킨다. 실패한 경우에조차 진지하게 파업이란 사건에 말려들었던 사람들에게 파업은 이전의 삶을 중단시키고 이전의 감각을 정지시키며 이전의 사고와 행동을 더는 지속할 수 없게 한다. 그 정지와 중단의 지점에서 새로운 종류의 삶의 방식이,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다.
반면 파업을 통해 작업을 중단하고 공장의 가동을 중단하게 한 경우에조차, 이전의 관계, 이전의 삶의 방식을 중단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작업의 중단은 교섭의 담보가 되어주고, 교섭이 순탄하지 않아 실질적인 공장 가동의 중단을 야기한 경우에조차, 또 다른 교섭을 통한 협약의 체결로 이어질 때, 작업의 중단은 곧바로 작업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이 경우 파업이 작업은 중단시킬 수 있었지만 이전의 삶의 방식을 불가능하게 하는 어떤 근본적 중단, 이전의 사고나 감각을 지속할 수 없게 하는 어떤 근본적 정리를 야기하지 못한다.
여기서 어떤 중단, 어떤 정지를 통해 파업을 사고해야 할 것인지는 분명하다. 이전의 삶의 방식을 중단시키고 이전의 감각과 사고를 정지시키는 사건, 바로 그것이 파업이고, 파업이 야기하는 중단이요 정지다. 그렇다면 정규적으로 주어진 작업이 없고 정지시킬 공장을 갖지 않아도 파업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며 또한 필요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도로의 점거를 통한 물리적 이동의 중단이 아니어도, 심지어 물리적인 도로가 없는 곳에서도 이전의 삶의 방식이나 감각, 사고방식을 정지시키는 그런 사건이 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파업이라고 부를 수 있다.
파업을 이처럼 정의할 수 있다면, 총파업, 그것은 '총'이란 말로 표현되는 연대와 결합, 촉발과 전염을 이런 정지와 중단을 거듭제곱의 역량으로 응축하고 배가하는 사태를 통해 고양되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가한 노동조합의 수나 참가자의 수를 합산하는 방식으로 계산되는 어떤 산술적 사건이 아니라, 전염적인 촉발의 효과를 통해 각자가 n승의 역량으로 고양되며 결합되는 멱급수적 사건이다. 접속하고 연대하는 n개의 이웃들이 각각 n승으로 고양된 채 곱해지는 비약적 정지와 중단의 사건이다. 그 고양되는 힘들이 흘러넘치며 이전의 삶, 이전의 감각을 지우는 거대한 중단이고, 그 정지된 자리에서 새로운 종류의 삶의 방식이 발아하고, 새로운 사고와 감각이 시작되는 위대한 출발이다.
파업을 단지 단순한 투쟁형태나 전술형태가 아니라 이런 '일반성' 속으로 추상할 수 있다면, 거리의 계급이 파업을 하고, 거리의 계급이 총파업을 제안하는 것을 누구도 공허하거나 무의미하다고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공장의 벽을 넘어서, 거리를 통해 거기 연결된 모든 곳으로 우리의 삶을 바꾸는 저 위대한 중단과 정지를 확산하려는 시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의 현실적 가능성을 묻기 이전에 우리는 그것에 함축된 거대한 잠재력을 믿어야 한다. 그것의 불가능성을 말하기 이전에, 그것을 지금 이곳으로 불러내려는 시도를 반복해야 한다. 불가능한 사건, 그것은 결코 생각하지 못했던 시간에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반복하여 시도하고 불러낼 때만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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