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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하루 200명 넘는 남자에게 전화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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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하루 200명 넘는 남자에게 전화한 이유는?

[화제의 책] 우리 시대 삶의 기록 <벼랑에 선 사람들>

"그래서, 결국은 돈 내라는 얘기잖아. 무료 기간이고 뭐고 결국은 돈 내란 얘기 아니야? 내 말 틀렸어?"

한 고객이 IPTV '무료 체험'이란 말을 듣고 호기심을 갖다 갑자기 화를 버럭 낸다. 일단 무료 체험을 한 뒤, 좋으면 월 사용료를 내고 쓰라는 얘긴데 완전 공짜를 바랐던 모양이다. 고함이 너무 커서 귀가 찢어질 것 같다.

욕을 한 바가지 먹고 얼이 빠져서 전화를 끊었다. 머리털이 곤두섰다. 동료가 통화 내용을 들었을 것 같아 너무 민망했다. 뒤통수가 뜨거워지더니, 어느새 귀까지 빨개진다.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었다. 감정 조절 못 하는 무능한 사람으로 보일까 안간힘을 써서 억눌렀다. 숨을 몰아쉬고 또 전화를 돌렸다.

하루 200명에게 전화에 지긋지긋한 남자 목소리

텔레마케터로 2주간 일한 이보라 씨는 온종일 전화기 앞에서 씨름해도 실적은 올리지 못했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온갖 험담, 추파에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이 기간에 하루 200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중 절반 정도와 통화가 됐다. 모두 1000명이 넘는 남성과 이야기를 한 셈이다. 평생에 그렇게 많은 남자와 통화를 하긴 처음이었다. 그러니 남자 목소리 자체가 지긋지긋했다. 심지어 남자친구와 통화하는 것까지도.

사실 이 씨 직업은 텔레마케터가 아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2기 출신이다. 지금은 <뉴스토마토> 기자로 일하고 있다. 텔레마케터는 대학원에서 공부할 당시, 이 대학원에서 만든 <단비뉴스> 연재기사를 쓰기 위해 텔레마케터라는 직업을 체험했다.

물론 이 씨 혼자서만 이런 체험을 한 게 아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한 동기와 후배들도 이 씨와 비슷한 체험을 했다. 왜 이들은 욕을 먹어가며 이런 체험을 했을까.

왜 대학원생들이 욕먹어가며 체험현장을 갔을까

ⓒ오월의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이 2010년 6월 창간한 <단비뉴스>는 약 1년 반에 걸쳐 '가난한 한국인의 5대 불안'이라는 연재를 진행했다. <단비뉴스> 제정임 주간 교수를 필두로 2009학번 대학원생들이 2010년 초부터 준비했다.

소외계층의 고통과 절망이 한계에 이르렀지만, 언론에서는 이들 문제를 '수박 겉핥기'만 하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기성 언론이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빈곤 현장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밀착 취재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여러 차례 세미나를 거쳐 우리 사회의 빈곤층이 맞닥뜨리는 '원초적 불안' 다섯 가지를 선정했다.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을 직접 몸으로 겪고 기록한 '근로 빈곤의 현장', 인간답게 살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빈곤층의 삶을 기록한 '빈곤층의 주거현실', 아이를 낳으면 제대로 키울 수 없는 서민과 저소득층의 보육을 다룬 '애 키우기 전쟁', 아픈데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고통받는 서민들의 이야기인 '아프면 망한다', 등록금, 대부업체 대출 등으로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저당 잡힌 인생'이 그것이다.

이 씨를 포함해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학생들이 몸소 현장에 들어가 체험한 것도 이 기획의 일환이었다.

이들의 노력은 사회에서 인정도 받았다. 인터넷에 게재된 기사는 수십만 건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이런 현실이 있었는지 몰랐다'는 격려의 전화도 줄이었다. 2010년 <시사IN> 대학기자상에 출품돼 대상을 받기도 했다. 심사위원들은 '현직 기자들도 질릴 지독한 현장성'을 높이 평가했다. 지난 3월에는 이들의 연재 기사가 <벼랑에 선 사람들>(오월의 봄)이란 책으로 출간됐다.

"이런 책을 참으로 오래 기다렸다"

이정우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는 추천사를 통해 "이 책은 눈물 없이 넘길 수 없는 페이지가 너무 많다"며 "읽어야 할 독자층은 매우 넓다. 특히 학자, 정책 입안자, 시민단체 등 전문가 집단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밝혔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은 "이런 책을 참으로 오래 기다렸다"며 "우리 삶은 팍팍해지고 처절해져 왔지만 그것을 전하고 알려야 할 문학과 저널리즘에서는 언젠가부터 리얼리즘과 치열함과 땀 냄새가 사라져가기 시작했고, 사회 비평이라는 허울 아래 인텔리의 게으른 펜 돌리는 소리만 들리는 글발이 난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대부분 불편해진다.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은지, 왜 우리 사회에는 이들을 방치하는지 등에 대한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살아갈 순 없는 게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이 책은 한 발짝만 뒤로 물러서면 절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들 이야기가 단지 그들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라고 강변한다.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거다. 지금은 그들이 벼랑 끝에 서 있지만 그다음은 우리가 될지도 모른다. 아무런 사회 복지망도 갖춰지지 않은 한국 사회 구조 안에선 누가 벼랑에 서 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그걸 일깨워 주는 이 책이 불편하지만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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