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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촌 조선족들, '옌볜거리'마저 사라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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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촌 조선족들, '옌볜거리'마저 사라지면…

[시장 후보들은 모르는 '서울의 속살'·③] '첨단동'엔 그들의 보금자리가 있을까?

서울시장 선거전이 후끈 달아올랐다. 나경원, 박원순 등 시장 후보들은 서울을 확 뜯어고치겠다며 여러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고 투표를 하는 시민들은 진짜 서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평생 서울에서 살아왔던 사람이라고 해서, 꼭 서울을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은 거대한 모자이크다. 서로 다른 조각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지금과 같은 모양이 됐다. 하지만 강남구 압구정동이라는 조각에서 평생 살아온 이들은 바로 옆의 판자촌 구룡마을을 이해하지 못한다. 반대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시장 선거를 앞둔 지금, <프레시안>이 서울에 현미경을 들이댄 이유다. 서울을 제대로 바꾸려면, 먼저 서울을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프레시안>은 '서울 사람'도 잘 모르는 서울의 속살을 살피는 기획을 준비했다. <편집자>

- 시장 후보들은 모르는 '서울의 속살'
☞<1>아직도 '박카스 아줌마'…'서러운 황혼'이 기댈 곳은 어디에?
☞<2>노숙인들 '짤짤이 순례'를 아십니까?

"서른일곱 개의 방이 있던 그 집, 미로 속에 놓인 방들, 계단을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 이젠 더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이 또 있던 3층 붉은 벽돌집. (중략) 서른일곱 개의 방 중의 하나, 우리들의 외딴 방. 그토록 많은 방을 가진 집들이 앞뒤로 서 있었건만, 창문만 열면 전철역에서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신경숙 <외딴방> 가운데 일부)"

소설가 신경숙 씨는 '쪽방촌'을 이렇게 표현했다. 신경숙 씨는 1970년대에 열다섯 나이로 구로공단 근처 쪽방에서 큰오빠, 작은오빠, 외사촌 누이와 함께 살면서 일명 '공순이'로 일하던 당시를 반자전적 소설로 옮겼다.

신 씨가 지냈던 구로공단, 즉 가리봉동을 1970~1980년 당시엔 돈을 벌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여공이 가득 메웠다. 밤이면 여럿이 모여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밤늦게 옆방에서 라면이라도 끓이면 그 냄새가 쪽방촌에 진동했다.

그 모습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변한 게 있다면 여공이 매웠던 자리를 이젠 조선족이 채우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1970년대 공단 노동자의 거주 공간이자, 주말과 저녁 시간에는 노동자의 여가 공간으로, 노동자의 삶과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를 이루던 가리봉시장과 가리봉 오거리 일대는 현재 중국인 거리를 방불케 한다. 대표적인 곳이 '옌볜거리'다.

▲ 가리봉시장 풍경. ⓒ프레시안(최형락)

한국인지 중국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옌볜거리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3번 출구를 나와 10여 분쯤 걸어가면 약 500m 정도 되는 길 좌우에 한자로 된 간판이 즐비한 '옌볜거리'가 보인다. 이곳 거리에는 조선족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소개소, 여행사, 식당과 상점 등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간판은 한글과 간체자인 한자가 섞여 있었지만 한자가 주를 이뤘다.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은 중국말을 사용한다. 한국말은 이곳에선 되레 낯선 언어다.

길가에는 광대뼈가 튀어나온 40~50대 남성 4~5명이 쪼그린 자세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운동복 아니면 등산복 차림으로, 작업화를 신고 있었다. 저마다 먼지 묻은 검은 스포츠 가방을 들고 있었다. 직업소개소에서 이날 일자리를 얻지 못한 조선족들이었다.

직업소개소 관계자는 "하루에 30여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한다"며 "전부 조선족"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요즘 어려운 일은 한국인들이 하지 않으려 해서 조선족들이 많이 필요하다"며 "하지만 조선족도 비자 연장 자격을 얻으려 제조업 쪽을 선호해 식당 등에는 인력난을 겪고 있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는 방문취업(H-2) 비자로 들어온 사람이 제조업과 농축산업 분야에서 1년 이상 일하면 재외동포 체류자격(F-4) 비자를 준다. F-4 비자를 가진 자는 한국 국민에 맞먹는 법적지위가 보장되는 영주자격 (F-5) 비자를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한 자리 건너마다 위치해 있는 식당에는 생소한 중국 음식이 팔리고 있었다. 중국인이 좋아하는 양고기부터 토끼탕, 꿩탕 등이 메인 음식들이다. 식당에서 만난 조선족 김일민(37) 씨는 "이곳에서는 양러우촤(양꼬치)와 코우빼이(컵술)을 먹을 수 있어 좋다"며 "고향 음식을 먹으면 고향 생각도 나고 기분도 좋아진다"고 말했다.

곳곳에 있는 노래방도 한국 노래 대신 중국 노래가 최신곡 차트를 채우고 있었다. 여행사는 한국에서 중국까지 가는 배삯이 19만9000원이라는 걸 한창 홍보하고 있었다. 이발소에서는 중국에서 열린 기능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것을 아예 간판으로 만들어 중국 동포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 길거리에 설치된 전화기로 고향 가족과 통화를 하고 있는 조선족. ⓒ프레시안(최형락)

거리 한구석에는 조선족들이 고국의 가족, 친지와 전화를 할 수 있도록 테이블 위에 일반 전화기가 설치돼 있었다. 박금석(42) 씨는 "아직 휴대전화를 갖지 못해 중국에 전화를 할 때는 전화방에 간다"며 "전화카드 9000원이면 약 5시간 정도 통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싸다"고 설명했다. 박 씨는 "고단한 한국 생활에서 가족과 대화를 하는 건 위안이 된다"고 덧붙였다.

통계상 한국 거주자의 30% 이상이 불법체류자이며 대부분이 저소득층인 조선족은 가정에 전화를 설치하지 않고 전화방을 이용하는 게 일반화됐다.

1990년대 말부터 가리봉동에 모여든 조선족

옌볜거리는 구로 1,2,3,4동과 맞닿아 있고, 남부순환도로를 경계로 금천구 가산동과 마주하고 있는 가리봉동 가리봉시장 일대 길을 일컫는다. 조선족 문화는 인근 가리봉동으로 1990년대 중·후반부터 조선족 노동자들이 대거 입국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기 가리봉동은 여전히 상경한 노동자들이 서울에서의 삶의 터전을 이루는 곳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장기불황과 노동자의 인건비 상승 등으로 구로공단의 많은 공장들이 파산하거나 경기도의 안산, 시화 등지로 이동하면서 가리봉동에 거주하던 노동자들도 직장을 따라 이주하게 된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워졌던 가리봉동 쪽방촌은 가출한 10대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서 역할을 했었다. 배우 봉태규가 출연한 <눈물>은 가출 10대 청소년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이곳 가리봉동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우여곡절 끝에 10대 청소년 집성촌으로의 변모를 거친 후, 중국 연변출신 조선족 노동자들이 1990년 후반부터 이곳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그 수는 점차 증가해 현재 옌볜거리를 이루게 됐다.

가리봉동 옌볜거리는 2000년만 해도 정통 중국 요리를 파는 음식점이 세 곳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변에 중국 동포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가 많아졌다. 한국 음식점을 운영하던 한국 상인들도 가게를 중국 음식점으로 바꿨다. 알려진 바로는 160여 개의 옌볜거리 상점들 중 중국 동포가 운영하는 상점은 47개 정도다.

그렇다면 조선족은 왜 옌볜거리를 찾을까. 중국 연변에 자신의 자식들을 두고 왔다는 강인규(46) 씨는 "한국에 오는 사람들은 고향에 아파트도 사고, 아이들 교육도 시키는 등 여러 꿈을 꾸며 온다"며 "하지만 막상 이곳에서의 삶은 너무도 힘들다"고 설명했다.

강 씨는 "조선족이라고 한국인들은 늘 다른 시선으로 쳐다 본다"며 "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나보다 나이 어린 젊은 사장은 욕을 입에 달고 다니고, 심할 경우 때리기까지 한다"고 말했다. 강 씨는 "이런 일은 한국에 오는 조선족들은 누구다 다 한 번쯤 겪었을 것"이라며 "그래도 고향에 있는 가족 생각하며 꾹 참고 일한다"고 말했다.

강 씨는 "일주일 내내 고된 일을 하다 보면 고향이 그리울 수밖에 없다"며 "그러니 이곳에 와서 같은 조선족 사람끼리 고향 음식을 안주로 술 한잔 하고, 노래방 가서 중국노래도 부르면서 그리움을 지운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조선족은 "한국 사람들은 조선족을 국경 넘어왔다고 국제 거지라고 한다"며 "우리 민족이 예의가 바른 민족인데 한국에 와서 보니 그게 아닌 듯하다"고 말했다. 이 조선족은 "한국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곳이라는 자부심과 희망을 가지고 왔는데, 한국에 와서는 되레 내 고향은 중국이라는 생각을 더했다"며 "목표한 돈만 벌면 다신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오기 전, 중국에서 교사로 일했다는 박정숙(39) 씨는"아무래도 같이 모여 살면, 한국에서 사는데 필요한 정보도 없고, 같이 고생하는 동향 사람들과 서로 의지를 하며 위안을 받는다"며 "중국에서는 한국에 올 때는 제일 먼저 옌볜거리를 찾는다"고 밝혔다.

▲ 옌볜거리에서는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들이 즐비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얼마 가지 않아 재개발로 사라질 옌볜거리

조선족에게 위안이 됐던 이곳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예정이다. 옌볜거리를 포함한 가리봉동 쪽방촌은 오는 2015년 '디지털 비즈니스시티'로 재정비된다. 가리봉동이란 명칭은 '첨단동'으로 바뀐다.

ⓒ서울시
서울시는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2003년 11월 가리봉동을 비롯해 청량리·미아·홍제·합정 등 5곳을 1차 균형발전촉진지구로 지정했다. 지정안에 따르면 가리봉동 지역에는 최고 53층 높이의 랜드마크 타워가 들어서고, 아파트 5430가구가 공급된다.

아파트 5430가구에는 장기 전세주택 1000가구와 도시형생활주택 300가구가 포함돼 있다. 서울시는 이를 2015년까지 완공한다는 계획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재개발이 진행되면 사실상 조선족이 지낼 곳은 사라지게 된다. 현재까지 한국 전체 거주 조선족 인구의 약 65%인 1만5473명이 가리봉동 옌볜거리 일대 쪽방촌에 거주하고 있다.

가리봉 촉진지구 거주 현황을 보면 6196세대, 1만2143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 중 가옥주가 511세대 1515명, 세입자가 5685세대, 1만638명이 살고 있다. 이곳 세입자 절대 다수가 조선족인 셈이다.

결국 재개발이 진행되면 이들은 거리로 내몰리던가 한국에 오느라 생긴 빚을 고스란히 지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조선족에게 위로가 되었던 "옌볜거리'도 사라지게 된다.

옌볜거리에서 만난 이길성(36) 씨는"그래도 가리봉동에서나마 우리끼리 모여 살면서 한국사회에 녹아들어가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며 "하지만 재개발이 진행되면 또 다시 우린 집값 싼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그나마 마음 놓고 살았던 공간인데 없앤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다"며 한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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