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맡은 시사평론가 정관용 한림대 교수가 이렇게 말해 좌중을 폭소케 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 홍성우 변호사의 변론기록을 토대로 한 <인권변론 한 시대>(경인문화사) 출판기념회에서였다.
출판기념회는 30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 주최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기념회에는 손학규 민주당 대표를 비롯해, 이철 전 코레일 사장, 유인태 전 국회의원, 이부영 전 국회의원 등이 참석했다.
홍성우 변호사는 "20년 넘게 인권 변호사를 하면서 나의 고민은 왜 내가 이 자리에 있는가였다"며 "아무리 변론을 해도 유죄를 받고 사람 한 번 구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홍 변호사는 "그럼에도 내가 인권 변호사를 계속 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며 "내가 맡은 양심범들이 처벌을 약하게 받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소신과 신념을 보호해주고 법정에서 피력하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홍 변호사는 "또한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은 긴급조치로 인해 재판이 보도되거나 기록되는 일이 없었다"며 "이에 나에겐 증언자로서의 역할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 정관용 교수 사회로 홍 변호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인사들. ⓒ프레시안(허환주) |
홍성우 변호사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
이날 출판기념회 2부 행사로 진행된 'Talk Show'에서는 시사평론가 정관용 교수의 사회로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하다 재판을 받아야 했던 인사들을 초빙해 홍성우 변호사와의 인연을 소개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철 전 코레일 사장과 유인태 전 의원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또한 이부영 전 의원은 1975년 긴급조치 위반, 반공법위반 등 혐의로 7년간 복역했다. 문용식 대표는 84년 민추위를 결성한 뒤 '깃발'을 발행했다가 3년 1개월 징역을 살았다.
이들과 홍성우 변호사와의 인연, 그리고 이들이 생각하는 홍 변호사 등 약 1시간 가까이 진행된 토크쇼 주요 내용을 싣는다.
"홍 변호사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모두 소환됐다"
정관용 : 홍성우 변호사의 인생을 망조로 만든 사람들이 모조리 소환됐다. 말씀을 나누겠다. 이부영 전 의원부터 마이크를 잡아라. 홍 변호사가 당신의 변론을 다섯 번이나 맡았다. 어쩌다 그렇게 됐나.
이부영 : 정확히 말하겠다. 다섯 번이 아니다. 총 일곱 번이다. 다섯 번이라고 한 건 동아일보 다닐 때 노조 해직 사건과 동아특위 사건으로 잘린 거를 뺀 것이다. 총 일곱번이다. 너무 돈을 못 벌게 해서 죄송하다.(웃음)
정관용 : 수임료를 낸 적이 있는가.
이부영 : 홍 변호사에게 술을 빼먹었으면 빼먹었지 수임료를 낸 적은 없다.
정관용 : 홍 변호사가 변론을 맡은 나머지 다섯 건의 사건 내용을 기억하나.
이부영 : 잘 기억나지 않는다.(웃음)
정관용 : 사실 홍 변호사가 인권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 것은 민청학련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이철 전 코레일 사장 등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법정에 섰었다. 당시 이 사건을 맡으려는 변호사는 없었다.
하지만 민청학련 사건 연루자의 고등학교 동창 중 한 명이 황인철 변호사 사무실에서 실무수습을 맡고 있었다. 황인철 변호사와 홍 변호사는 대학동기였다. 그 사람의 부탁으로 홍 변호사가 이 사건을 맡게 됐다. 솔직히 군사 법정 시절인데 누가 변호를 맡아 주려고 했겠는가.
이철 : 사실 누군가 나의 변론을 맡아준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민청학련 사건은 모두가 알다시피 너무나 엄청난 사건으로 발표가 됐다. 그때 간첩을 잡으면 30만 원이었다. 하지만 민청학련 관련자를 잡으면 보상금이 300만 원이었다. 우린 당시 국가 전복의 주체들이었다. 그래서 우린 변호사가 선임되리라곤 믿지 않았다. 그래서 변호사가 선임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아마 사건을 못 맡는 비리비리한 변호사라고 생각했다.
정관용 : 유인태 전 의원은 어땠나.
유인태 : 알고보니 홍 변호사가 71년도에 변호사를 개업했었다. 그리고 74년에 민청학련 사건을 맡았다. 민청학련 사건이 2년 늦게 터졌다면 홍 변호사의 살림살이에도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웃음)
정관용 : 유인태 전 의원과 이철 전 사장은 홍 변호사가 인권 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장본인이다. 둘이 지금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
이철 : 뭐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죄가 엄청 크다. 300만 원 현상금을 붙일 게 아니라 300억 원을 갚아야 한다. 폐를 많이 끼쳤다. 정말 감사하고 정말 죄송하다.
정관용 : 변호사에게도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변호사인데 피고인보다 더 흥분해서 판사에게 소리를 지르고 나가는 분이 있는가 하면, 변론서를 써서 차분히 읽어 내려가는 변호사가 있다. 홍 변호사는 어떤 사람이었나.
문용식 : 홍 변호사는 굉장히 논리적이다. 그러면서도 뜨거운 변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많은 사람들이 홍 변호사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
정관용 : 문용식 나우콤 대표는 홍 변호사에게 이중고를 줬다고 들었다. 도무지 모르는 혁명이론과 운동권 용어로 홍 변호사를 어렵게 했다고 했다. 변호사가 피고를 변호해야 하는데 도통 운동권 언어를 못 알아먹어 과외까지 했다고 들었다. 왜 그랬나.
문용식 : 이제 말하지만 홍 변호사는 마지막 변론에서 1시간 넘게 변론을 했다. 그 변론을 듣고 있노라니 우리보다 혁명론을 더 잘 아는 거 같았다. 깜짝 놀랐다. 솔직히 나도 혁명론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내 주장은 좌경용공이었다. 그걸 어떻게 변론했을까 생각하면 참으로 홍 변호사에게 미안하다.
정관용 : 홍길동의 마음을 아나. 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르지 못하고 빨갱이를 변호해야 하는 마음을? (웃음)
김주언 : 보도지침이 86년에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몇 가지 기록을 세운 걸로 기억한다. 당시 굉장히 많은 인권 변호사가 이 사건을 맡았다. 다음으로 당시 법정에서 무죄를 받았다. 거의 유일한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무죄를 판결받기 까지 9년이나 걸렸다. 가장 오래된 재판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경인문화사 |
이부영 : 홍 변호사에게 변호사라는 소리를 해본 적이 없다. 선배, 형님 등으로 불렀다. 70년대 초반부터 수많은 사건을 취급한 홍 변호사다. 당시 내가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나는 별로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접견실에서 제일 마지막에 홍 변호사를 접견하곤 했다.
그러면 그때마다 홍 변호사는 파김치가 돼 있었다. 알고 보니 사건이 너무 많아 접견도 많아서 그랬었다. 주목할 점은 홍 변호사는 사건 내용만 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맛보게 하려고 접견을 한 게 더 컸다. 그러다보니 마지막 사람을 만날 때는 녹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시대에는 가슴 절절한 일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홍 변호사에게 죄송하다.
정관용 : 통상적으로 시국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홍 변호사에게 사과를 해야 할 듯하다. 이 자리에 참석해준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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