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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은 어떻게 '교과서 공격'을 시작했나

[韓日 교과서 전쟁, 해법은?②] 새역모의 등장과 역사교과서의 쟁점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담은 일본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가 지난달 30일 발표됐다. 이들 교과서에는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주장은 물론 일본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미화하는 서술까지 담겨 있어, 한일 관계에 새로운 갈등의 씨앗을 예고하고 있다. <프레시안>은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와 함께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의 문제점을 짚은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1990년대의 상황

역사교과서 문제와 교과서 왜곡을 주도해온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의 등장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인식을 둘러싼 1990년대 전반의 일본 상황을 간단히 짚어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본군 '위안부' 쟁점화의 충격파와 패전 50주년에 즈음한 정치권의 동향을 이해하는 일이다.

1992년 1월 방한한 미야자와 기이치(宮沢喜一) 수상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위시한 과거사 현안의 진상 규명과 응분의 조처를 언명했다. 이듬해 8월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의 관여를 시인했고,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은 담화를 통해 사과와 반성을 거론했다. 이런 분위기는 고노 담화 직후 성립된 연립정권에서도 이어졌다. 새로 수상의 자리에 오른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는 국회에서 과거 일본이 도발했던 전쟁은 침략전쟁이었다는 인식을 표명했다.

이에 대해 즉각 우파 정치가들이 반발에 나섰다. 자민당의 야스쿠니(靖国) 신사 관련 단체들은 총회를 열어, "도쿄 재판으로 오염된 역사관을 바로 세우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립"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역사·검토위원회'를 설립했다(1993년 8월부터 1995년 2월까지 활동). 여기에는 이후 수상이 되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竜太郎)와 모리 요시로(森喜朗)도 이름을 올렸다. 이와 연동하는 형태로 자민당 국회의원을 주축으로 여러 정치가들의 망언이 외신을 장식했다.

▲ 일본 우익의 '성지' 야스쿠니 신사. ⓒ프레시안(선명수)

패전 50주년이 가까워지면서 역사인식의 이슈는 이른바 '부전결의'를 중심으로 더욱 열기를 더해갔다.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一) 수상이 진두지휘에 나서 분투했지만, 1995년 6월 중의원을 통과한 부전결의는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직접적인 사죄를 비켜간 어정쩡한 문구로 매워져 있었다. 그 불충분한 내용조차 참의원에서는 부결되고 말았으니, 형식상으로도 국회의 부전결의는 반쪽짜리였다. 국내외의 우려는 8월 15일에 즈음한 소위 '무라야마 담화'로 간신히 파국 직전에 무마되었다.

일본 정치권에서 역사인식을 둘러싼 공방전이 전개되는 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사회운동은 한국과 일본의 시민연대를 기반으로 착실히 전진해 나갔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에서도 인권과 전시성범죄의 차원에서 다루어졌고, 유엔인권위원회의 쿠마라스와미 보고, 맥두걸 보고 등은 세계무대에서 일본의 불충분한 과거사 청산을 폭로하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1996년 6월 7개의 중학교 교과서 모두는 일본군 '위안부'를 포함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관해 전향적인 기술을 담기에 이르렀다. 이를 이룩해 낸 것은 위에서 언급한 정치권의 상황과 더불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운동의 진전이었다. 이런 상황의 전개에 대한 민간 부분의 반발 중 하나는 새역모의 태동으로 나타났다.

자유주의사관의 등장

새역모 출범의 산파역은 '자유주의사관'의 대두와 활동에서 찾아져야 하며, 그 주역은 다름 아닌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 교육학)의 '전향'부터 시작하는 것이 정석이겠다. 장본인의 얘기를 빌어 자유주의사관의 탄생과 '자유주의사관연구회' 출범의 전말을 들여다보자.

▲ 새역모 회장 후지오카 노부카츠(도쿄대 교수).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인사로, 지난 2005년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종군 위안부가 아닌 북한 공작원"이라는 망언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후지오카가 "근현대사 교육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역사관을 되돌아보게 된 계기는 1990년 8월 발발한 걸프전과 1991년부터 이듬해까지의 미국 체재 경험 이었다고 한다. 그에게 걸프전은 전쟁을 금지한 "헌법 9조의 '평화주의'의 이상이 국제정치의 현실 속에서 파탄했다는 것을 보여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더구나 미국에 체재하는 동안에 걸프전에 120억 달러를 헌납했는데도 일본에 비난이 가해지는 것을 보고,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자위대가 전쟁터에 나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게다가 동구와 소련에서 연이어 전해지는 냉전의 붕괴는 일본에게 '국익'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자세를 압박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후지오카가 '역사개찬' 운동에 나서게 된 또 하나의 충격이자 계기는 바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였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일본의 국익이 관건이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세계의 군대가 '위안부'나 그런 부류의 제도를 갖고 있는데, 일본인만 음란하고 어리석은 국민"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인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며, "일본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일본의 '국익'의 중요한 일부"라는 것이다.

1994년부터 관련된 글을 연재하기 시작하다가 스스로 '근현대사 수업을 개혁'하기 위한 계간 잡지를 창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1995년 1월 결성된 자유주의사관연구회는 바로 그 잡지의 필진을 조직하기 위해 꾸려진 모임이었고, 후지오카는 지금까지 대표를 맡고 있다.

이런 후지오카였기에 1996년 6월 28일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기술을 담은 중학교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자, 문부대신에게 정정 신청을 권고해 달라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술이 교과서에 실리게 된 것은 '일본인에 대한 치욕'이며, '강제연행' 또한 전혀 근거가 없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사관의 골격을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자학사관'의 박멸이다. 후지오카에 따르면 기존의 역사교육은 "일본인이 일본이라는 국가에 혐오감을 갖도록 만드는 교육"으로 치부된다. "자국민을 인류사에 유례없는 잔학무도한 인간 집단으로 꾸며, 자국사를 악마적 소행의 연속으로 그리"며, "자국에 채찍질하고, 저주하고, 욕하고, 규탄"하는 "역사적 관점, 정신적 태도", 그것이 바로 자학사관의 정의이다. 이런 자학사관을 만들고 퍼뜨리는 주범으로 지목한 것은 매스컴과 교육계이며, 대표적으로 <아사히(朝日)신문>과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이 해당된다.

새역모의 탄생

▲ 니시오 간지 전기통신대학 교수.
후지오카와 더불어 새역모 창립과 활동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독문학)였다. 스스로를 '보수계 언론인'이라 칭하던 니시오는 후지오카에 대해 "교육학자이며, 지난 전쟁은 자위전쟁인가 아닌가를 놓고 대담한 논쟁을 수업에 도입하는 실험가로서 신문에 소개되었"다고 평한 바 있다. 1996년 3월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고, 얼마 안 있어 앞서 얘기한 중학교 교과서의 검정 통과 소식이 날아들었다. 후지오카와 니시오는 '역사교과서가 위험하다'는 부제의 저서 <국민의 방심(国民の油断)>을 같이 저술하면서 '역사전쟁'의 동맹 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역사교과서 내지 역사인식을 둘러싼 일본 내의 전선에서 언론전의 주공격수로 변신한 것은 <산케이(産経)신문>이다. 새역모 멤버들이 그랬듯이 <산케이신문>에게도 1996년은 커다란 전환기였다. 그 결과 1996년 1월부터 <산케이신문>의 오피니언 면에는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가 연재되기 시작했다. 후지오카 자신도 <산케이신문>에 연재하게 됨으로써 "자유주의사관 연구회가 사회적으로도 주목을 받았고, 이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도 성대하게 행해지기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후지오카와 니시오는 "현행의 역사교과서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역사인식을 개선하는 길이 요원하다는 판단에서" 다카하시 시로(高橋史朗, 교육학)와 사카모토 다카오(坂本多加雄, 정치사상)와의 협의를 거쳐 보다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가 같은 해 11월 13일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준비 모임을 열었고, 곧 이어 12월 2일 새역모를 창설한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호소인·찬동인의 이름으로 지지자를 모아 1997년 1월 설립총회를 열어 임의단체로 정식 발족을 했다.

새역모의 발기 성명은 이들이 지녔던 문제의식과 전망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일본 근현대사 전체를 범죄의 역사로 단죄하며 기술하고 있"으며 "증거도 불충분한 '종군위안부'의 강제연행설을 일제히 채용한 것도 이런 자기악역사관이 다다른 하나의 귀결"로서 "정처 없이 자국사 상실로 떼밀려 가는 국민지조 붕괴의 상징적 일례"로 성토의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어느 민족도 예외 없이 갖고 있는 자국의 정사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를 각계에 호소"함과 동시에 "다음 세대에 자신을 갖고 전할 수 있는 양식 있는 역사교과서를 작성하여 제공"할 것을 천명했다.

창립 당시의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 회장에 니시오 간지, 부회장에 다카하시 시로, 사무국장에 다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 신토[神道]학), 이사에는 이토 다카시(伊藤隆, 일본근대사), 사카모토 다카오, 다쿠보 다다모리(田久保忠衛, 국제정치학), 다나카 히데미치(田中英道, 서양미술사), 다네가시마 오사무(種子島経, 기업인), 나카지마 슈조(中島修三, 변호사), 니시베 스스무(西部邁, 평론가), 후지오카 노부카쓰, 하가 도루(芳賀徹, 비교문학), 그리고 이사 대우로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 만화가) 등이다.

이렇게 전열을 정비한 후 새역모는 자학사관으로 물든 교과서를 시정하라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전개했다. 여기에는 일본국 헌법의 개정을 줄곧 외쳐온 일본 최대의 우익단체 '일본회의'(1997년 출범)가 어깨를 나란히 했고, 자민당과 기존의 각종 우파 조직이 가세했다. 이들은 출범 이후 4년 만에 100권이 넘는 도서를 출판하는 동시에, 일본열도 각지에서 연간 700회 정도의 강연회나 심포지엄을 개최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역사교과서 문제의 심층

2000년 4월 새역모는 역사와 공민 두 과목의 교과서를 검정을 신청했고, 이듬해 3월 역사교과서의 경우 137곳이라는 대량 수정을 거친 '누더기' 교과서였음에도 불구하고 문부성의 검정을 통과했다. 일본은 물론 한국과 중국까지 가세한 안팎의 거센 비판과 연대활동에 직면하여 결국 0.039%라는 저조한 채택에 그치고 말았지만, 새역모 관계자가 '복수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듯이 그들의 활동은 수그러들기는커녕 더욱 기세를 더해갔다. 그런 결과만을 놓고 보더라도 채택률의 억제는 결코 역사수정주의자의 발호를 억제하는 재갈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 일본의 극우단체 새역모에서 발간한 지유샤판 역사 왜곡 교과서. 요코하마시에서 채택된 이 교과서는 태평양전쟁을 '대동아전쟁'으로 기술, 이 전쟁이 '자존자위'를 위한 싸움이었다고 표현하는 등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 의도를 미화하고 있다. ⓒ프레시안

왜 이런 사태가 지속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새역모의 태동과 활동을 새로이 진지하게 곱씹어봐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 출발은 그들이 역사교과서의 쟁점화를 통해 무엇을 성취하고자 했던가를 밝히는 일이 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역사교과서 문제의 본질이며, 이는 역사교과서의 함의를 둘러싼 '정치 역학'의 문제와도 맥이 닿아 있다.

새역모는 이미 발족 단계에서부터 정치적으로도 범상치 않은 조짐을 띠고 있었다. 2001년과는 정반대로 역사교과서의 '올바른' 기술이 문제시되었던 1996년, <산케이신문>의 칼럼에서 후지오카는 "역사교과서의 현 상황은 중대한 정치문제이다. 장차 총선거의 일대 쟁점으로서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받아 '위안소는 민간업자가 운영했다'는 발언으로 망언의 대부 격이 된 오쿠노 세이스케(奥野誠亮, 자민당 의원)는 "후지오카 씨는 내가 지금까지 말해 온 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면서 추파를 던지던 상황이었다.

이 역사수정주의자와 보수정치가의 야합은 20세기의 끝자락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990년대 후반의 일본호는 줄곧 오른쪽으로 키를 선회했다. 미국의 '신 가이드라인'에 힘입어 '주변사태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자위대의 '국군화'를 앞당겼으며, 히노마루(日の丸)와 기미가요(君が代)가 각각 일본의 국기와 국가로 법제화되었다. 새역모의 활동과 역사교과서가 노리던 것은 바로 이런 우경화·군국주의화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첨병의 역할이었다.

그들이 과거의 침략전쟁을 애써 변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전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해소라는 현실적인 필요성이 그것이다. 패전의 잿더미에서 벗어나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면서 일본은 줄기차게 경제대국에 상응하는 정치대국·군사대국으로의 길을 암중모색해 왔다. 주변사태법과 국기·국가법의 제정은 그들에게 사실상 전초전이었고, 첫 합동작전은 승리로 끝났다.

보수 정치가들의 중간 목표는 전쟁 도발을 금지한 현행 헌법 9조의 족쇄를 푸는 일이고, 이를 위해 국회 내에 '헌법조사회'가 설치한 터였다.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면 당연히 지난 침략전쟁의 기억들이 되물어질 것이므로, 미리 손을 써둘 필요가 있다. 침략전쟁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불식시키지 않으면 안 되며, 그 작업을 떠맡은 것이 바로 새역모의 '전사'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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