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을에 사는 네 살배기 여자아이는 지난주에 말라리아에 걸렸다. 할머니는 손녀를 등에 업고 10여 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걸어 진료소에 찾아갔다. 그러나 그날 마침 말라리아 치료제인 키니네가 떨어지고 없었다. 진료소 측은 다음 날에 다시 오라며, 열이 펄펄 끓는 손녀를 업고 온 할머니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이는 다음 날 키니네에 반응을 보여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비극은 아프리카 말라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그러나 이곳은 다른 빈곤한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한다면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다. 말라위 정부는 30만 명의 에이즈 환자 치료를 위해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기부국 정부들은 이 계획이 '너무 거창하다'며 지원대상 인원을 2만5000명 규모로 감축했다. 1인당 연간소득이 180달러이고 약 90만 명이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는 이 나라 국민들에게 국제사회의 이같은 조치는 사형 집행 명령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프리 삭스(Jeffrey D. Sachs)는 전 세계 인구 중 6분의 1이 속한 이같은 절대빈곤을 우리 시대에 종식시킬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는 <빈곤의 종말>(김현구 옮김, 21세기북스 펴냄)에서 그 해결방안을 쉽고도 명쾌하게 풀어놓았다. 세계적인 거시경제학자로 잘 알려진 제프리 삭스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유엔개발계획(UNDP),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자문위원과 유엔 사무총장의 경제 특별자문관을 역임했으며 IMF와 세계은행에 대한 비판자로도 유명하다.
선진국과 운명론자들의 '지루한 변명'
"그들이 필요한 만큼의 원조를 우리가 제공한다면, 그것은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과거의 예에 비추어 볼 때 그 원조는 곧바로 소모되어 버릴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프리카의 교육수준이 너무 낮아 다른 모든 곳에서 작동하는 프로그램도 실패할 확률이 높다. 아프리카는 부패가 만연해 있고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다. 아프리카는 성공을 이루는 데 필요한 자유시장 경제제도와 근대적 가치가 결여되어 있다. 사실 아프리카의 도덕은 너무나 심각하게 붕괴되어 있으므로 에이즈가 통제불능 사태로 치닫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아프리카에 가장 처참한 진실이 존재한다. 우리의 원조로 아프리카 아이들을 구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구폭발이 일어나 훨씬 더 많은 성인들이 기아에 직면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셈이다."
이런 유형의 주장이 세계적으로 공공연하게 반복되고 있지만, 이런 주장은 정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진국들의 지루한 변명일 뿐이라고 제프리 삭스는 비판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원조가 뚜렷한 성과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원조 자체가 아주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대중적인 인식과는 달리 아프리카의 1인당 연간 원조수혜액은 매우 적다. 2002년 전 세계가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 기부한 원조금액은 1인당 30달러였다. 그중 약 5달러는 기부국에서 온 컨설턴트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3달러 이상이 식량원조와 기타 긴급원조용이었으며 4달러는 아프리카의 부채이자 상환을 위해 쓰였고, 5달러는 부채탕감 활동에 쓰였다. 원조가 끼치는 확실한 영향을 목격하려면, 먼저 결과를 낳기에 충분한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제프리 삭스는 "아프리카의 통치구조가 취약한 원인은 바로 빈곤 때문이며 다른 국가들에 비해 늦은 성장이 계속되는 이유는 이들 국가가 지리적, 생태적으로 불리한 환경에 처해 있고 경제적 인프라 또한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에이즈가 특히 아프리카에서 높은 발병률을 보이는 이유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일치된 견해가 없음을 강조한다. 통상적으로 아프리카인들은 성생활 파트너가 많기 때문에 질병을 옮길 위험성이 더욱 크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영국의 의학잡지인 <랜싯>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아프리카 남녀의 평생 파트너 수는 서구의 많은 나라 이성애자들의 경우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아프리카인들이 게으르기 때문에 빈곤하다는 문화적 편견이야말로 궁색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라고 말한다. 그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빈곤했을 때에는 사회구성원들이 게으르고 변변치 못하다는 혹평을 받다가 부유해진 뒤에는 모두 근면함 덕분으로 치부됐던 사실을 상기시킨다. 제프리 삭스는 "실제로 1870년대에 <재팬 가제트>같은 일본 내 외국 언론들은 일본 국민들을 '게으른 족속'이라고 묘사하지 않았던가?"라고 반문한다.
"'패키지 투자'를 위한 원조가 필요하다"
제프리 삭스는 빈곤의 종식이 불가능하다고 외치는 운명론을 버리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확인되는 '필요'에 의해 투자를 계획하고 실행해야 하며, 그렇게 하면 빈곤의 종식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
그는 무엇보다도 충분한 원조를 위해 부유한 국가들이 국민총생산(GNP)의 0.7퍼센트를 개발원조 지출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GNP의 0.15퍼센트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미국의 개발원조 지출 비율을 0.7퍼센트 수준으로 높이는 것이 결코 무리가 아님을 여러 가지 수치와 사례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그는 또한 빈곤 국가들에게 사업자본, 인적자본, 인프라, 자연자본, 지식자본, 공공제도적 자본에 대한 '패키지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개발경제학에서는 흔히 흐름을 뒤바꿀 만한 결정적인 한 가지 투자를 집요하게 찾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빈곤 국가들이 '빈곤의 함정'에서 벗어나 자본축적, 경제성장, 가계소득 증가 등 자기동력에 의한 성장의 길로 들어선다면, 2015년경에는 필요한 투자액이 현저히 적어져 2025년에는 빈곤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제프리 삭스는 "적어도 20년 동안 우리는 과중채무 빈국들은 부채상환이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그 국가들이 채무 상환과 발전목표 달성을 동시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채무위기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강조한다.
"테러리즘에 맞서려면 빈곤을 해결해야 한다"
2000년 9월 유엔 총회 이후 정립된 '밀레니엄 선언'과 '밀레니엄 발전목표(Millenium Development Goal: MDG)'는 제프리 삭스의 이같은 희망에 가까운 것이었다. MDG는 빈곤 국가들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달성하게 한다는 공약으로 2015년까지 극단적 빈곤과 기아를 절반으로 줄이고 말라리아 발병률, 유아 사망률 등을 낮추며 이를 위해 세계적인 협력과 개발을 지속해나갈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제프리 삭스는 "당시 나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회상한 뒤 "그러나 낙관주의는 너무나 빨리 산산조각나고 말았다"고 말한다. 그 결정적 계기는 9. 11 테러였다.
미국은 이후 테러리즘에 대응해 군사적 수단만을 강구했다. 2003년 3월에 시작한 이라크 전쟁은 8개월만에 1300억 달러를 직접적인 군사비용으로 소비했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2주 간 쓴 전쟁비용 약 25억 달러는 미국이 아프리카에서 경제개발 지원을 위해 쓰는 1년치 총액과 맞먹는 수치였다.
제프리 삭스는 무분별한 군사적 수단만으로는 테러리즘을 대응할 수 없다고 말한다. 테러리즘과 싸우려면 테러리즘을 숨기고 있는 극단적 빈곤, 인간조건의 악화에 기인하는 정치·경제적 불안정 등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개발에 대한 지원은 국가안보에 대한 지원과 똑같다는 생각은 미국의 전략적 사고에 표준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이같은 '개념'은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고 있다.
제프리 삭스는 다시 한 번 묻는다. "세계평화를 주장하는 미국과 국제사회는 대체 어디에 투자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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