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장애인야학에는 어릴 적부터 가족으로부터 버려져 시설에서 수십 년을 살다가 얼마 전에 탈출하여 지역에서 살면서 초등학교 교육도 받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중증장애인들이 있다. 그들은 시설에서 나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먹고살기 위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하 기초법)의 수급자가 되기 위해 수급권을 신청했지만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수급권자가 되지 못했다. 바로 기초법의 부양의무자 문제다.
얼마 전 장애아 부모가 자신의 아들이 수급자가 되어 쥐꼬리만 한 복지혜택이라도 받게 하기 위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 또한 부양의무제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이렇게 중증장애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국가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소득을 보장하는 기초법은 1999년에 제정되었지만 빈곤을 심화시키는 사회현실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2009년 정부발표를 보더라도 빈곤층임에도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가 되지 못해 사각지대에 방치된 사람들은 410만 명으로 전인구의 약 8.4%나 되며 특히 소득과 재산이 모두 현행 기초생활보장 수급기준에 해당하는데도 부양의무자 규제로 인해 수급자가 되지 못하는 사각지대는 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같은 결과는 바로 기초법의 비현실적인 최저생계비 측정과 의무부양제 등과 같은 조잡한 '복지의 기술'들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정글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참담한 복지 현실이다.
최근 김황식 국무총리가 노인들의 지하철 요금을 가지고 '보편적 복지'를 꼬투리 잡으니 중앙일보는 사설에서 얼씨구나 하며 맞장구 쳤다. 한마디로 부자노인이 지하철요금을 내지 않고 공짜로 이용해도 되는가의 문제이다. 대중교통은 공공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교통약자들은 무료로 이용하고,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세금을 더 받으면 된다. 무료로 지하철을 타는 교통약자 이용문제를 가지고 지하철공사의 적자를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세금으로 지하철공사의 적자를 보존해야한다. 교통약자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로 대중교통 이용을 확대시키는 것이 국가의 책임 있는 자세일 것이다.
얼마전 모 신문 사설에서 유시민 전의원이 복지부장관이었을 때 펼쳤던 우파적 복지정책을 두고 칭찬하고 있다. 한정된 복지예산에 돈을 효율적으로 쓰는 정책이 우파적 복지정책의 핵심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유시민 전장관과 참여정부는 '생산적 복지'라는 이름으로 우파적 복지정책을 구사하였다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유시민 전장관과 장애인활동보조제도 문제, 저소득층의 의료급여문제 등으로 면담을 수차례 한 기억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 앞에서 장애인의 인권과 예산문제로 플랭카드를 펼쳤을 때도 맨 앞에서 저지한, 인연이 있는 분이다.
유시민 복지부장관 시절에 중증장애인들이 최소한의 신변처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활동보조서비스제도의 근간이 만들어졌다. 중증장애인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일 넘게 단식하고, 6시간 넘게 한강대교를 기어가면서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증장애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활동보조서비스의 본인부담, 생활시간보장 제한 등의 복지기술들이 만들어졌다. 그 복지기술들을 MB정부가 잘 이어받아 보다 교묘하게 중증장애인들의 삶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본인은 노력했다고 했을지 모르겠지만 모 신문사의 지적에 억울해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 지적이 일정 부분 맞기 때문이다. 한정된 복지예산으로, 다양한 기술적인 방식으로 복지의 보편적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잔여적 복지의 기조 속에서 제한적으로 조금 확대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시민 전장관은 예산문제를 이야기할 때면 예산의 한계를 말하면서 정부 내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경제부처 관료를 탓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유시민 전장관과 참여정부가 보다 진보적인 정부였고, 보편적 복지의 제도와 틀 안에서 사고하고 예산을 보장했다면, 모 신문사의 조롱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자서전에 '예산을 최종 결정할 때 복지예산 증액을 두고 왜 빨간줄로 긋지 못했을까' 후회했다한다. 때늦은 후회이다. 보수수구정권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못한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실망은 '경제'로 조금이나마 더 먹고살게 해줄 것 같았던 우파정권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이제 여야 모두 복지가 화두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복지의 기술'이 먼저가 아니라 '복지의 원칙'을 이야기하자.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점심값 정도 지원하는 무상급식으로 벌벌 떨면서 보편적 복지를 운운하는 조잡한 한국의 복지수준을 혁명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지의 원칙이 필요하다. 그 원칙은 바로 복지 예산의 혁명적 확대이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걷어 들여서 복지를 확대하는 것이다. 10원의 예산으로 생각하는 복지의 기술과 10만원으로 생각하는 복지의 기술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복지예산이 없는 것이 아니라 조세의 원칙이 부자들을 위한 방패에 불과하고, 예산은 엉뚱한 토건건설족의 호주머니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복지의 원칙, 즉 자본잉여가치를 통해 부를 축척한 부자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세금을 거둬들여 다양한 투쟁 통해 복지예산을 혁명으로 확대하는 원칙을 지켜야 할 것이다. 이 차가운 시대에 그 시작은 기초법 내에서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할 가난한 사람들이 비현실적인 최저생계비 측정과 부양의무제로 제도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서울역 한 귀퉁이에서 추운 겨울 노숙하는 이들의 아픔들부터 하나씩 풀어나가면서, 진정한 보편적 복지혁명으로 나가는 큰 발음으로 가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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