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상태가 부실한 기업이 퇴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게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시장 원리'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시장'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민망해진다. 누군가가 커튼 뒤에서 조종한 작업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잘못돼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커튼 뒤에 숨은 누군가에게 따질 방법은 없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권력을 누리는 이들은 즐겁겠지만, 현 정부가 내세웠던 '비즈니스 프렌들리' 구호는 빛이 바랬다. 시장원리가 사라지고, 관치금융이 부활했다는 이야기다.
채권단, 구조조정 대상 비공개 방침
▲ 6개 채권은행이 25일 구조조정 대상 기업을 발표했다. ⓒ뉴시스 |
그러나 시장의 관심은 '몇 곳이 D등급을 받았는지'를 넘어선다. 구체적으로 어느 회사가 어떤 등급을 받았는지까지 알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답변이 없다. 그 이유에 대해 채권은행단은 이들 기업의 '대외영업'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이미 명단이 나돌고 있다. 채권은행단의 '비공개' 방침 탓에 이런 명단의 진위는 확인할 수 없다. A등급(우량) 또는 B등급(단기 자금지원)을 받은 기업이 여기 포함돼 있다면, 우량기업이 엉뚱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이런 부작용에 대해 채권은행단은 아무런 해명이 없다.
채권은행단이 구조조정 대상을 확정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에도 같은 일이 있었지만, 그때는 명단이 공개됐었다. 이번에도 당초 방침은 '공개'였으나, 발표 당일 갑자기 '비공개'로 바뀌었다. "대외영업에 대한 고려 때문"이라는 해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부실 PF 공적자금 투입 발표에 맞춘 구조조정 발표
시장 분위기 역시 이번 발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이 심각한 건설사의 상황이 제대로 반영돼 있지 않다는 게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4~5월 서면 및 현장조사를 통해 91개 저축은행의 714개 PF 사업장을 모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71개 사업장에서 PF 대출 11조7000억원과 43개 사업장에서 유동화 PF 대출 8000억원 등 저축은행이 보유한 PF 대출 잔액 규모는 작년 말 기준으로 총 12조5000억 원이다. 그런데 연체율이 10.6%에 달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31.3퍼센트인 3조9000억 원이 '악화 우려' 채권으로 나타났다. 이는 PF 자금을 빌려간 건설사의 부실 역시 심각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날 발표에서 C등급으로 분류된 건설사는 9곳, D등급은 7곳에 불과했다. 같은 날 발표된 부동한 PF 부실 상황이 구조조정 대상 확정 과정에 객관적으로 반영됐다면, 이날 발표에서 C·D 등급을 받은 건설사가 훨씬 많아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판단이다.
기업 구조조정 발표를 굳이 25일에 맞춘 배경 역시 논란거리다. 공적자금관리위원회는 이날 저축은행의 부동산 PF 부실 채권 매입을 위해 공적자금인 구조조정기금 2조5000억 원과 자산관리공사(캠코)의 고유계정 자금 3000억 원 등 총 2조8000억 원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건설사의 투기, 그리고 저축은행의 방만 경영이 낳은 대가를 치르는 데 국민의 세금이 쓰이는 상황에 대한 비난을 덮기 위한 장치로 이날 구조조정 대상을 발표했을 뿐이라는 말이 나온다. 정부의 관심은 여전히 건설사 보호에 맞춰져 있는데, 건설사에 대한 강력한 구조조정이 이뤄질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다.
"채권단 중심 구조조정 자체가 문제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조금 더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채권은행단이 중심이 된 구조조정 자체가 가진 문제다. 김 소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실기업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문제는 부실기업에 대한 처분 과정이 얼마나 납득할 만한 것이냐다. 한국보다 먼저 자본주의가 뿌리내린 나라들에서 사용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업구조조정전문회사(CRC) 등을 이용한 방식이다. 부실기업 처분을 시장에 맡기는 방식인 셈이다. 다른 하나는 법원이 결정하는 방식이다. 미국에서는 베어스턴스, GM 등이 이런 방식으로 파산절차를 밟았다. 이른바 '챕터일레븐(Chapter11)' 기업회생 절차를 따르는 방식이다.
김 소장이 답답해하는 대목은 "한국경제 현실에서는 이런 두 방식이 모두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부실기업 문제에 관한 한, 시장과 법원에 충분한 실력이 쌓이지 않았다는 것.
무늬만 자율협약, 사실상 관치금융…"책임은 누가 지나"
금융기관에서 빌린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 부실기업에 대한 한국식 처분방식은, 그래서 '자율협약'이다. 돈을 빌려준 쪽, 즉 채권단이 돈을 못 갚는 채무자(부실기업)에 대한 처분을 결정한다는 자율적으로 정한다는 게다. '명시적인 절차 없이 그때그때 알아서 해결하는 방식'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더라도, 최소한의 책임은 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김 소장의 주장이다.
관치금융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도덕적 해이 가능성이 이유다. 한국 현실에서 채권단이 '정말 자율적으로' 부실기업 살생부를 작성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처럼 명단 내용과 선정 기준 등이 공개되지 않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정권의 '보이지 않는 손'이 조종하고 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리고 정권은 높은 성장률, 낮은 실업률 수치를 원한다. 마땅히 죽어야 할 기업을 억지로 살려두려 한다는 게다. 그래서 생기는 부작용은? 지금 권력을 누리는 이들에겐 관심 없는 문제다. 다음 권력으로 떠넘기면 그만이다.
김 소장은 "부실기업에 대한 워크아웃 절차 관련 법률 가운데 대부분은 위헌 가능성이 있다. 그만큼 부실한 규정들이다"라며 "이제라도 제대로 된 법적 근거를 갖춘 기업 회생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8%성장 자랑하며, 0%성장 정부보다 더 속이 좁다"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던 김태동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의 지적은 더 신랄했다. 숱한 기업이 무너졌던 외환위기 수습 과정을 지켜봤던 그는 "반(反)시장적인 부양책이라는 면에서는 현 정부가 '일관성'이 있다"고 말했다. "은행이 제 기능만 발휘해서 대출을 조절하면 경영상태가 나쁜 기업들이 자연스럽게 퇴출되기 마련"이라는 게 그의 신념이다. 그리고 은행이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제 구실을 못하면, 그래서 퇴출돼야 할 기업이 계속 자금 지원을 받는다면, 우량 기업까지 망가진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이어 그는 "이명박 정부가 경기 위축 가능성에 너무 겁을 먹는다"며 "정부는 1분기에 8퍼센트나 성장해 OECD 국가 중 최고라고 자랑하는데, 하는 짓을 보면 0퍼센트 성장하는 국가의 정부보다 더 속이 좁다"고 말했다. 수술의 아픔을 너무 두려워해서 병을 키운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김대중 정부 시절, 대우그룹을 시장규율에 따라 강력하게 구조조정 했지만 경제 성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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