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낯선 거리에서 만나는 여행자들의 손에는 대개 비슷비슷한 여행책자가 들려져 있곤 한다. 친절하게도 하루일과로 적합한 동선까지 적혀진 책을 들고 다니다보면 한번 마주쳤던 사람을 여러 번 다시 만나기도 한다. '정식 코스'를 밟았다는 뿌듯함도 잠시, 수박 겉핥기식 여행으로 그쳤다는 찜찜함이 가셔지기 힘들다.
"이 곳을 잘 아는 친구라도 있었더라면!"
독일 수도 베를린의 특별한 장소들을 소개하는 '토박이 친구' 같은 책이 나왔다. <독일발견- 베를린 감성 체험 A to Z> 공동기획을 맡은 김경균 씨는 "월드컵을 앞둔 요즘 다양한 독일관련 특집이 기획되고 있다"며 "우린 베를린의 '문화'를 이야기해보자는 의도로 이 책을 기획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독일 월드컵은 짧지만 베를린 문화는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이 책의 필자로 선정된 이들은 예술가, 디자이너, 사진작가, 건축가, 저널리스트, 음악가 등의 직업을 갖고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60명이 넘는 필자들의 국적도 독일, 프랑스, 영국, 한국, 일본 등 대단히 다양하다. 알파벳 A부터 Z까지 베를린을 상징하는 62개의 키워드 속에서 이들은 이제껏 여행책자에서 소개된 적이 없는 독특한 장소들을 골라 소개하고 있다.
이들 숨겨진 명소 발굴은 게릴라 작전처럼 진행됐다. 일본의 IIDj(정보디자인 어소시에이츠)와 한국 정보공학연구소(ITI)가 공동 기획한 이 작전의 필자 선정조건은 "베를린에 오랫동안 살아 왔으며 현재에도 거주하고 있을 것'이었다. IIDj와 ITI는 베를린과 연관된 키워드 100여개를 온라인에서 제시했으며, 연락이 닿은 62명의 베를린 거주 필자들은 이들 중 마음에 드는 키워드를 골랐다. 그 후 필자가 키워드에 맞는 장소에 관한 글을 쓰고 직접 찍은 사진을 웹사이트에 올리면 한국과 일본에서 편집진은 이를 보며 작업을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책이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출판된 것이다.
베를린 구석구석에서 이렇게 발견된 장소는 총 412 개. 키워드에 따른 62 곳 외에도 각각의 키워드에서 연상되는 '그 밖의 가볼 곳'이 몇 군데씩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키워드와 직접 혹은 은유적으로 해석되어 선정된 이 장소들은 필자들의 독특한 시각을 쫓아가보는 색다른 여행코스를 제공한다.
그럼 대체 어떤 곳들일까? 열거하기 버거울 정도로 풍부한 명소들 중 몇몇 군데를 미리 탐방해보자.
여행자 발길 뒤에 숨은 베를린 문화 맛보기
타지를 찾는 여행객들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먹을거리'다. 독일의 전형적인 음식 '크박(Quark·독일 유제품)'을 들어보았는가? 심리학자 니콜라스 쾨트샤우는 치즈를 만드는 과정에서 원료가 만들어지는 이 크박을 맛볼 수 있는 '가가린 바'를 추천한다. 크박은 생으로 먹기도 하고, 과일이나 꿀 또는 오이를 섞어서 아침 식사나 후식으로 먹기도 한다. '가가린 바'에서는 과일을 넣은 바닐라 크박과 크박이 들어간 치즈 케이크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필자 중 몇 안 되는 학생 중의 한 사람인 카사하라 샤아카는 좀 더 저렴한 여행을 원하는 배낭여행자의 심리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키워드 '칸티네(Kantine·식당)'에서 독일 학생식당 '멘자'를 떠올렸다. 식사보다 친구들을 만나는게 즐거워서 멘자를 찾는다는 사야카는 낯선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멘자의 넓은 테이블과 식사 후 멘자 앞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즐기는 일광욕을 좋아한다. 멘자 카드 하나만 있으면 베를린의 멘자 11곳과 카페테리아 28곳 모두를 이용할 수 있다.
도심 속 한가한 녹지 공간을 찾는다면 그래픽 디자이너 안드레아스 트로기쉬가 소개하는 '비오톱(Biotop·인간과 동식물 등 다양한 생물종의 공동 서식장소)'을 주목해보자. 베를린 경관의 특징 중 하나는 시선을 잡아끄는 넓은 공터가 많다는 점인데 이들 대부분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조성한 곳들이다. 그 뒤 구동독은 시를 관통하는 넓은 지역에 장벽을 세웠고, 현재 도심 곳곳이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자연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현재는 도시 재건계획의 일환으로 건물들이 헐리고 있는데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도시 한가운데의 공터들이다. 방치된 공터들은 도시에 사는 토끼들과 녹지 공간을 찾는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해주고 있다.
놓쳐서는 안되는 '그 곳'
피아니스트인 탄야 쇨펜은 '레벤스미텔(Lebensmittel·식료품)'이란 키워드를 이용해 베를린에서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색다른 곳을 소개한다. 바로 구동독 상품을 팔고 있는 상점 '오스트프로둑테(동독 상품)'다. 출퇴근 하는 사람들과 관광객들로 늘 북적대는 이곳의 소박함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화랑 주인인 프리드리히 루크는 '쿤스트페어라인(Kunstverein·미술협회)' 중의 하나인 '노이어 쿤스트페어라인(NBK)'에서 운영하는 '비디오 포럼'이야말로 베를린의 숨겨진 보물이라고 표현한다. 1972년에 설립된 이곳은 초기 비디오 아트 작가들을 위한 기술적 장비 지원 사업으로 시작해 점차 작품성이 뛰어난 800여 점의 비디오 작품들을 수집하기에 이르렀다. '비디오 포럼'은 컬렉션 외에도 전시회나 상영회, 강연회를 종종 개최하고 있다.
여행 기획자이자 작가인 다그마르 트뤼프슈흐는 키워드 '침머(Zimmer·방)'를 골라 베를린의 수많은 숙박시설 중 단연 돋보이는 '호텔 퀸스틀러하임 루이제'를 소개한다. '숙박 갤러리'라고도 불리는 이 호텔의 50여개 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예술가들의 작품이다. 어떤 방은 온통 흰색으로, 어떤 방은 가난한 시인의 스타일로, 또 다른 방은 미래주의나 낭만주의 혹은 동양풍으로 꾸며져 있다. 최고급 특실부터 가격이 저렴한 지붕 밑 다락방까지 갖춘 이곳은 1825년 시의 궁전으로 건립된 뒤 1994년부터 예술가들이 살면서 아트 연구소와 숙소로 운영되었고, 1999년에 기념 건축물로 지정된 뒤 지금의 호텔로 운영되고 있다.
건축가 프리드헬름 하스는 온실 '그로세스 트로펜하우스, 보타니셔 가르텐 달렘'을 '트로펜(Tropen·열대)'이라는 키워드의 대표주자로 소개하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큰 이 온실 주건물에는 1000여 종이 넘는 식물이 자라고 있으며 여름에는 클래식 콘서트가, 겨울에는 칵테일 나이트가 열린다. 월드컵 기간 중에는 이곳 식물 공원 내에서도 월드컵 이벤트가 열릴 예정이다. 본선에 진출한 32개 국의 대표식물들에 빨간 마크를 붙여놓아 방문객들에게 축구장 65배 넓이의 식물 공원에서 지도를 들고 찾아다니는 즐거움을 제공할 예정이다.
온라인을 통한 정보교류는 계속된다
이처럼 다채롭고 흥미로운 장소들이 소개된 이 책은 여행을 하는 독자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각 장소마다 약도와 함께 가까운 역의 위치를 표기해놓았다. 또한 볼거리, 먹을거리, 살거리, 즐길거리로 구분되어 있어 원하는 장소를 쉽게 고를 수 있도록 한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한편 편집진은 책의 발간과 더불어 필자들과 독자들 사이에 지속적인 소통이 가능한 공개 블로그를 만들었다. 일어, 독어, 한국어로 같은 내용이 확보되어 있어 문화와 언어교류가 동시에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이들은 이 블로그가 앞으로 여행자들이 각자 발굴한 장소들을 올리는 '여행 정보교류 커뮤니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ITI 측은 앞으로도 IIDj와의 공동 기획을 통해 <한국발견- 서울감성체험>, <일본발견- 동경감성체험> 등 한국과 일본은 물론 각국 도시들의 명소를 발굴하는 프로젝트를 같은 방식으로 계속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도시 속에 숨은 명소를 발굴해내는 전세계 문화게릴라들의 활약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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