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공수'에게 광주 시민은 사냥감이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2>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열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공수 부대의 무차별 폭행, '피의 일요일' 문을 열다

프레시안 : 1980년 5월 18일,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평온한 휴일이었어야 할 그날 광주는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전두환·신군부의 만행에서 비롯된 크나큰 상처는 30년 넘게 지난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열흘에 걸친 광주항쟁은 한국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오월 광주를 빼놓고는 그 이후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오월 광주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이해하고 이어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오월 광주를 틈만 나면 헐뜯으려는 무도한 움직임이 일각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과 달리, 오월 광주의 참뜻을 이어가려는 노력은 사회 전반적으로 예전보다 줄어든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오월 광주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그것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지를 하나씩 되새겨보는 게 필요한 때다. 우선 광주항쟁, 어떻게 시작됐나.

서중석 : 5월 18일 아침 전남대 교문 앞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5월 14~16일 민주 성회 때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그다음 날 아침에 자동적으로 교문에 모여 시위를 하자.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정오에 도청 광장에 모이자'고 약속하지 않았나. 교문 앞에 모인 사람의 대부분은 5·17쿠데타 소식을 접하고 민주 성회에서 약속한 대로 교문으로 온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전남대 교문 양쪽에 공수 부대원들이 늘어서서 출입을 통제하는 걸 목도했다. 비상 계엄 전국 확대 직후인 18일 오전 2시에서 2시 30분 사이에 제7공수여단의 2개 대대가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 전남대 의대에 이미 진주한 상태였다.

오전 10시경 약 200명의 학생들이 교문 앞에서 계엄 해제 등을 외치며 시위를 했다. 그러자 공수 부대원들이 학생들을 쫓아 나와 진압봉 등으로 마구 구타했다. 그것에 맞서 학생들이 돌을 던지자 공수 부대원들은 인근 집이나 상가까지 쫓아가서 폭행을 가했다. 그 과정에서 근처를 지나던 시내버스에서 공수 부대원들의 과잉 진압에 항의하던 학생들도, 신분을 밝힌 전남대 교수도 폭행을 당했다.

그렇게 해서 정문에서 해산을 당하자 학생들은 역시 민주 성회에서 약속한 대로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시내로 나간 학생들은 수백 명 단위로 비상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때 학생들 숫자가 얼마 안됐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은 전두환·신군부가 무지막지한 짓을 계속 자행하지 않았다면 광주에서도 이 정도로 시위가 끝날 수도 있었다고 나는 본다.

당시 광주의 <동아일보> 기자로 광주항쟁을 취재한 김영택은 학생들 시위가 시내에서 경찰의 강력한 진압에 밀려 40~50명 단위로 분산됐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시위가 점차 수그러들고 있었다고 썼다. 적어도 이날 학생들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는 것만은 여러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후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면서 광주항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까지는 아직 본격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7공수 고전 중', 거짓말 늘어놓으며 서울에서 11공수 추가 파견

프레시안 : 항쟁의 불길이 치솟게 만든 계기는 무엇인가.

서중석 : 1894년 동학혁명을 보면 처음부터 고부에서 크게 일어난 게 아니고 대규모 농민 전쟁으로 번지는 건 고부 봉기 이후 아닌가. (1894년 음력 1월 전봉준이 이끈 농민들은 탐학을 일삼은 고부 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관아를 점령했다. 여기까지는 그 이전에 전국 각지에서 있었던 민란과 큰 차이가 없었다. 고부 봉기를 농민 전쟁으로 키운 건 정부의 잘못된 대처였다. 고부 봉기 후 사태 수습을 위해 중앙에서 보낸 관리는 오히려 농민을 탄압했다. 그것은 켜켜이 쌓인 농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고부 봉기 두 달 후 전봉준을 중심으로 다시 일어선 농민군은 전주성 점령, 폐정 개혁 활동, 가을 재봉기를 거쳐 우금치 전투에 이르는 농민 전쟁을 전개하게 된다. '편집자')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수 부대가 18일 오후 4시경 시내 한복판에 떠버렸다. 학생 시위 규모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고 따라서 경찰력으로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공수 부대가 시내 한복판에 출현한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서울 동국대에 머물고 있던 11공수여단이 오후 4시 전에 이미 광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로 이동해 소요를 진압하라는 명령이 오후 3시경 11공수여단에 떨어지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거듭 얘기하지만 경찰력으로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시위였다. 그런 상황에서 7공수여단이 시내 한복판에 출현했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추가 병력인 11공수여단까지 서울에서 뜬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오후 3시 30분경 정호용 공수특전단 사령관(특전사령관)은 최웅 11공수여단장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광주에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계엄군으로 나가 있는데 소요 진압 작전을 못하고 매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니 가서 임무 수행을 잘하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이때까지는 공수 부대가 전남대 교문 앞에서 한 짓을 빼놓고는 이렇다 할 게 없었다. 그리고 아직 시내 한복판에 출현하기도 전이다. 그런데도 "소요 진압 작전을 못하고 매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이다. 거기에다가 "광주에서 우리 애들이 밀리고 있고 유언비어까지 나돌고 있으니 조심하라", 이런 얘기까지 했다. 이때는 유언비어가 돌 필요가 없는 때였다. 아직 유혈 사태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정호용은 신군부 이너 서클의 핵심 구성원 중 한 명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신군부 이너 서클의 핵심 구성원이자 육군 참모차장, 계엄사 부사령관이라는 요직에 있던 황영시가 18일 이날 '전교사' 사령관한테 조언을 했는데, 뭐라고 했느냐. 현지 군이 시위대를 강력하게 다루도록 조치할 것을 요망했다. '전교사'는 광주 상무대에 있는 전투교육사령부를 가리킨다. 하여튼 황영시 얘기, 이것도 뭘 의미하겠나.

시민을 표적 삼아 인간 사냥 자행한 공수 부대

프레시안 : 공수 부대가 시내에 출현한 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오후 4시경 시내 한복판에 출현한 공수 부대는 상상을 초월한 진압 작전으로 나왔다. 드디어 여기서 광주사태가 시작되는 것이다. 앞으로 내가 광주사태라고 말하면 전두환·신군부가 일으킨 유혈 사태를 가리키고, 광주항쟁이라고 하면 이 운동 전체를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공수 부대원들은 대검을 꽂은 M16 소총을 둘러멘 채 양손에 진압봉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공수 부대원들은 일제히 시민들한테 달려들었다. 이때 일부 병력은 대검을 꽂은 소총을 앞으로 겨누고 시민들에게 돌진했다.

시위하던 학생들은 그전에 이미 대부분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그러자 공수 부대원들은 남아 있는 몇몇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한테까지 달려들어 진압봉과 소총 개머리판을 마구 휘둘렀다. 눈에 띄는 사람은 학생이건 아니건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되거나 의식을 잃으면 공수 부대원들은 바로 끌어다가 눈앞에 있는 군용 차량 위로 짐짝처럼 던지다시피 해서 실었다.

지나가던 택시도 공수 부대원들한테 붙잡혔는데, 거기엔 한눈에 봐도 신혼부부가 분명한 젊은 남녀가 타고 있었다. 그런데 공수 부대원들은 이 젊은 남녀도 끌고 나와서 진압봉으로 두들겨 패고 군홧발로 짓밟았다. 그뿐 아니라 주변 건물이나 학교 교실, 운동장 같은 데에도 난입해 사람들을 마구 폭행한 다음 질질 끌고 갔다.

김경철, 이 사람은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20대 청년이었는데 금남로의 한 공사장 근처에서 공수 부대원들한테 붙잡혀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장애인이라고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맞은 끝에 실신해 길바닥에 쓰러졌다. 공수 부대원들은 이 사람을 버리고 가버렸다. 시민들이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 사람은 결국 그다음 날 새벽 3시쯤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중요한 건 공수 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려고 나서서 그렇게 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위를 진압하거나 해산하려 한다면 학생들만 쫓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진압을 넘어선 체포였을 뿐만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시민, 학생들에게 타격을 가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유혈 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 광주 시민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계엄군. ⓒ연합뉴스


전두환 일당이 광주에서 유혈 사태 일으킨 속내

프레시안 : 광주항쟁의 전 과정을 보면 전두환·신군부가 폭력 사태를 일으키고 그걸 계속 키워갔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항쟁 초기에 보인 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후기에도 시민들과 대화해 문제를 풀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는 태도를 취했다. 공수 부대를 축으로 한 계엄군이 그토록 야만적으로 시민들에게 선제공격을 퍼부은 것도 그러한 전두환·신군부의 기본 방침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신군부는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폭력 사태를 키운 것인가.

서중석 : 18일 오후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러면서 광주사태라는 것이 어떻게 그날 오후 4시경에 시작되는가를 살펴보려면 공수 부대원들이 1980년에 들어서 어떤 식으로 훈련받았는가를 간단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1980년 2월부터 특전사는 충정 명령이라는 강력한 '폭동' 진압 훈련에 돌입했다. 전 장병에게 가혹한 지옥 훈련이라는 걸 시키면서 적개심, 분노를 키우는 훈련을 한 것이다. 정신 교육을 병행했는데 '시위 군중 배후에는 빨갱이가 도사리고 있다.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때리고 짓밟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식의 훈련을 전에도 한 적이 있긴 하겠지만 1980년 2월에 들어와서 강력하게 실시한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국 수습 방안이라는 걸 만들고 5·17쿠데타 전에 군을 전국 곳곳에 이동 배치한 것하고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80년 3월 6일부터 노태우가 사령관인 수도경비사령부에서 노태우, 특전사령관 정호용이 참석한 가운데 충정 작전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는 각 여단 공수 부대장과 치안 부대장, 그리고 서울시경국장까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노태우는 군 투입이 요구되는 사태가 발생할 때에는 강경한 응징 조치가 요망된다고 얘기했다. 그러니까 사태가 일어나면 강경 진압에 나서겠다고, 5·17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 이미 신군부에서 정해놓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야기한 것들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왜 광주에서, 어떤 의도로 그렇게 무차별 타격을 가한 건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그건 전두환·신군부가 시국 수습 방안을 구체화하고 5·17쿠데타를 일으키면 국민들의 저항과 시위가 아주 클 것이라고 본 것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권정달 얘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비상 계엄을 전국에 확대한 후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는 서울, 광주 지역 등에는 주로 공수 여단으로 편성된 진압 부대 투입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는 곧 시위 진압 과정에서 '과감히 타격하라. 끝까지 추적해 검거하라. 분할 점령하라'는 공수 여단의 시위 진압 지침이 즉각 실행될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고 권정달은 얘기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군을 배치해놓은 것이라는 말이다.

권정달 얘기를 계속 들어보면 전두환 보안사령관 주도 아래 황영시 육군 참모차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등 이너 서클의 핵심들이 시위 초동 단계부터 강경 진압 등 위력 과시를 해 시위 군중을 위축시킴으로써 시위 확산과 '격렬화'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방침을 이미 정해두고 있었다고 권정달은 말했다. 위력 과시라는 아주 독특한 말을 썼다.

그런데 5·17쿠데타를 일으켰는데도 서울에서는 시위가 안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광주에서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뭔가 전개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가지 않았겠나. 그러자 '그쪽을 철저히 타격하자. 상대방이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궤멸적 타격을 입히자', 이렇게 된 것이고 그러면서 상대방 또는 적을 제압하고 위력을 과시하는 초토화 작전을 광주에서 구체화한 것이다.

그래서 경찰로도 시위를 충분히 막을 수 있는데도 7공수여단을 시내 한복판에 띄운 것이고, 그에 더해 서울에 있던 11공수여단 병력까지 광주로 급히 보낸 것이다. 11공수여단 병력 상당수는 열차에 실어 보냈지만, 일부 병력은 수송기에 태웠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으면 수송기에 태웠겠나. 그건 초동에 상대방을 완전히 제압하는, 철저한 타격을 가해 상대방이 일어날 수 없게 하는, 그래서 기와 힘을 다 꺾어버리는 작전을 펴겠다는 방침을 실현한 것이다.

더군다나 광주에 대해서는 더 심하게 타격을 가해야 한다고 본 것이 자신들이 제거하려고 하는 김대중의 정치적 근거지였기 때문 아니겠나. 그 때문에도 광주를 더 철저하게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한 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무차별로, 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까지 타격을 가한 것이다. 유혈 사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무섭게 타격하는 작전을 아무런 시위도 하지 않은 시민들을 상대로 편 것 아닌가. 이와 관련해 한 가지를 추가로 살펴보면 이자들의 의도가 뭐였는지를 더 잘 알 수 있다.

프레시안 : 어떤 것인가.

서중석 :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은 5월 18일 시위가 발생하자 오전 11시경 너무 추격하지 말고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오전 11시 55분에는 연행 과정에서 학생 피해가 없도록 유의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지시를 내리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리고 낮 12시 55분에는 시위하는 학생들을 철저히 검거하라는, 이전보다 조금 강한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 나서 오후 3시 32분 이 사람은 '오후 4시 20분부터 공수 부대가 투입돼 협동 작전을 하게 됐다. 그러니 각 부대장은 현장을 유지하고 가스차를 탈취당하거나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연한 지시 아닌가.

그랬는데, 5월 27일 항쟁이 진압된 후 안병하는 직무 유기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된다. 합수부로 끌려가 14일간 수사를 받은 뒤 자진 사표를 조건으로 석방됐는데, 그 후유증으로 1988년에 사망했다고 그런다.

공수 부대가 만든 생지옥…차마 눈으로 볼 수 없었다

▲ 진압봉을 치켜들고 시민들을 향해 나아가는 계엄군.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갈무리
프레시안 :
항쟁 이틀째인 5월 19일로 가보자. 19일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이미 전날 언젠가부터 광주에 소식이 돌았겠지만, 5월 19일에는 아침 신문 같은 걸 통해 김대중 등이 사회 혼란 조성 및 소요 관련 배후 조종 혐의로 체포됐다는 게 많이 알려졌다. 18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신문이 안 나왔고, 김대중 등이 체포됐다는 소식은 19일 자 신문에 실렸다. 그렇잖아도 광주에서는 유신 잔당이 정권을 탈취하는 걸 반대하는 민주 성회를 14일, 15일, 16일에 열지 않았나. 그런데 유신 잔당의 정권 탈취가 이제 더 노골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항쟁으로 변하는 날이 이 19일이다. 19일 오전 9시를 지나면서 금남로 일대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경 군중이 3000~400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면서 조금 있다가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시민과 학생들은 도로 철책과 길가에 있는 대형 화분 같은 걸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위를 전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중은 5000명 정도로 불어났다. 그런 가운데 오전 10시 50분경 공수 부대가 트럭을 타고 금남로 네거리에 진출했다. 그러면서 전날보다 훨씬 심한,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유혈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이 부분을 당시 광주에 있던 <동아일보> 기자들이 써서 보낸 기사를 통해 살펴보자. 그때 광주에 있던 기자들이 5월 19일, 20일 상황을 기사로 써서 보냈는데, 그걸 '게라지' 상태로 읽고 그랬다. '게라지'라는 건 게라라는 일본말에 한자 지(誌)가 붙은 말인데, 검열 이전 기사를 실은 걸 말한다. 게라지가 계엄사 검열을 통과하면 신문으로 나오는 것이었는데, 당시 동아일보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흥분한 상태로 그걸 읽었다. 나도 같이 읽었는데 정말 무서운 기사였다. 물론 당시 신문에 한 자도 실릴 수는 없었다.

"금남로에 투입된 1000여 특전단 병력은 곤봉을 마구 휘두르며 착검한 소총으로 시위 군중의 어깨, 다리 등을 마구 찔러 금남로 일대는 삽시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군중과 이를 지켜보고 비명을 지르는 시민 등으로 아비규환의 유혈 사태를 빚었다. 군인들은 시위 군중을 건물 안과 골목길까지 추적, 숨은 시민들을 끄집어내 길가에서 무릎을 꿇리고 턱을 걷어차거나 엎어진 사람의 머리와 등을 마구 짓이겨 길가 곳곳에 5열 중대로 머리를 처박은 자세로 꿇어앉히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특히 젊은 청년들의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겨 마구 때린 뒤 거꾸로 들었고", 사람을 거꾸로 세웠다는 말인데, "여학생 차림의 겁에 질린 여자들까지 아랫배를 걷어차고 가슴팍을 치거나 대검으로 상의를 마구 찢기도 해 건물 옥상 등에서 내다보는 시민들은 매를 맞고 피를 튀기는 시위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다음도 아주 길게 나와 있는데 여기서는 일부만 살펴보자.

반격 시작한 시민들, 본격적으로 불붙은 광주항쟁

프레시안 :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끔찍한 장면이다. 그러한 가운데 언제부터 항쟁 양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되나.

서중석 : 오후 들어 사태가 무섭게 변하기 시작했다. 오후 1시 30분이 되자 공수 부대가 점심 식사를 하러 조선대로 철수했다. 그 무렵 수만 명의 민중이 금남로 일대를 가득 채웠다. 거기에는 젊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년의 부녀자들과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들도 있었다. 건설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들은 톱, 쇠파이프, 철근 같은 것들을 가지고 나왔다. 성난 민중, 분노한 민중으로 금남로 일대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경찰이 최루탄, 페퍼포그를 쐈지만 민중은 돌멩이, 화염병을 던지면서 물러나지 않았다. 공수 부대가 오후 2시 40분쯤 다시 투입되면서 200여 명의 시민을 붙잡아 두들겨 패고 찌르는 등 무자비한 살육 작전을 또 펼쳤다. 그러자 일단 진압되는 듯했다.

이처럼 공수 부대가 무자비한 짓을 하면 전날과 19일 오전에는 시위대가 그냥 달아나고 말았지만, 19일 오후 이때는 달랐다. 공수 부대원들이 진압봉과 총검을 휘두르자 민중은 일시 흩어졌다. 그러나 분노한 민중은 곧 대형 화분과 함께 공중전화 부스, 가드레일, 버스 정류장 입간판 같은 걸 뜯어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보도블록을 깨뜨려 던지면서 싸웠다.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 말이다.

그런 가운데 공사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한 30대 남성이 광주공원 근처에서 공수 부대원들의 진압봉에 두들겨 맞고 군홧발에 짓밟힌 끝에 결국 시체로 발견됐다. 김경철에 이어 두 번째 희생자가 나온 것이다.

오후 4시 30분 공수부대 장갑차가 한 대 나타났는데, 보도 난간에 부딪혀 멈췄다. 거기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장갑차 뚜껑을 열고 불붙은 짚더미를 넣으려고 하는 등 장갑차를 위협했다. 그러자 장갑차에서 발포를 했다. 그래서 고등학생이 쓰러졌다. 이게 최초의 발포라고 한다. 군인 쪽에서 첫 번째로 총을 쏜 게 이것이라고 한다.

오후 6시 광주 공용버스터미널 주차장에는 7~8구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공수 부대원들이 살해한 사람들이었다. 이날 경찰국 안수택 총경은 공수 부대 장교한테 구타당했다. 공수 부대원들이 붙잡아 인계한 시민 6~7명을 방면한 것이 눈에 띄어 그렇게 당한 것이다. 이 사람은 7월 19일 직위 해제를 당하게 된다.

이날 시위대는 돌멩이, 화염병을 던졌을 뿐만 아니라 각목, 쇠파이프, 철근 토막, 쇠갈퀴, 심지어 낫과 쇠스랑까지 들고나와서 공수 부대원들과 싸웠다. 공용터미널, 광주역전 쪽, 남광주역전 일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광주항쟁이 본격적으로 이날 오후 시작된 것이다.

오후 7시가 넘으면서 가랑비가 내렸고, 그러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5월 19일 시위는 분노한 민중의 적극적 투쟁이었고 그런 점에서 항쟁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냈다.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를 보면, 이날 시위에 가담한 3000여 명의 시위대 중 500명 정도가 학생, 2500명 정도가 시민이라고 보안사 쪽에서 보고한 게 나와 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압도적으로 시민들 중심의 시위로 전환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광주항쟁이 이제는 시민 항쟁적인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는 걸 5월 19일 오후는 보여줬다.

시민들은 어떻게 죽음의 공포를 딛고 공수 부대와 맞서게 됐나

ⓒ오월의봄
프레시안 :
당시 광주에서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살해될 수 있다는 건 먼 나라 얘기가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오히려 시민들은 단결해 공수 부대와 맞서 싸웠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인가.

서중석 : 왜 시민들이 분노한 민중, 성난 민중으로 변해 공수 부대, 그 무섭고 사나운 공수 부대와 적극적으로 맞붙는 격렬한 투쟁, 시위를 벌이게 되는가. 보안사 쪽 기록에도 그런 것들이 있지만 광주 시민들 쪽에서 나온 기록들은 거의 다 18일 오후부터 벌어진 공수 부대의 만행,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만행에 분노해 그야말로 피가 끓는 시민들이 궐기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건 나중에 수습위원회 쪽에서도 계속해서 강조하는 사항이다. '최규하 정부는 공수 부대의 만행에 대해 광주 시민들한테 사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거듭해서 하지 않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임이 분명하다.

그와 함께 시위대가 외친 구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민들은 "전두환, 유신 잔당 물러가라", "전두환을 XX 죽이자", "계엄령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이렇게 외쳤다. 이처럼 10·26으로 소생하던 민주주의가 전두환·신군부의 5·17쿠데타에 의해 짓밟힌 것에 분노한 것이 기본적인 큰 흐름을 이뤘다.

김대중 연행, 지역 차별 등도 학생 시위를 적극적, 능동적인 민중 항쟁으로 변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대중은 다 알다시피 정치인 가운데 박정희 유신 체제의 최대 피해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경제 정책이나 인사 정책에서 호남을 아주 심하게 차별하지 않았나. 10·26 이후 김대중은 민주화와 광주 지방의 염원을 상징하는 정치인이었다. 유신 잔당이 그런 김대중을 희생 제물로 삼으면서 권력을 탈취하는 것을 보았을 때 광주 시민들은 엄청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지 더 얘기해야 할 것은 부끄러움이라고 할까, 자괴감이다. 이것도 18일에 소극적 자세를 취했던 시민들과 학생들이 19일에 분노한 민중, 성난 민중으로 변화하게 만든 요소라고 볼 수 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전에 제대로 싸우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부끄러움 또는 자괴감, 그러니까 너무나도 잘못된 것에 맞서 온몸으로 싸웠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비참함, 비겁함 같은 걸 느낀 것이 어떠한 계기를 만나면 적극적으로 싸우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1973년 10·2 서울대 문리대 시위, 1979년 부마항쟁, 1987년 6월항쟁을 설명할 때에도 나는 이 점을 많이 강조한다.

광주도 마찬가지였다. 18일에는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공수 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일시 피신했지만, 그 폭력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 피신한 이후부터는 양심의 가책을 아주 심하게 느끼며 괴로워해야 했다. 그러면서 다시 거리에 나갔는데, 그 거리에는 자신만 있는 게 아니고 노도와 같은 민중, 시민들이 같이 투쟁의 대열에 서 있었다. 그걸 알게 되면서 시민들의 그러한 부끄러움, 자괴감은 강력한 힘으로 바뀌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됐다고 볼 수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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