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3일 1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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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의 이면
[기고] 우크라이나 상황이 한반도에 일어난다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두 달 남짓 지났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미국-러시아 전쟁으로 이어지고 나토-러시아 전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금세 멈출 것 같지 않고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전쟁의 일환인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선전선동 (propaganda)에 따라 언론의 편향왜곡이 넘친다. 첫째, 전쟁의 명칭에 관해. 혼란스럽다. 대부분 언론이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
2020년, 한반도 둘러싼 5가지 위기
[기고] 한반도 대전환과 위기, 한국의 길
한반도 대전환과 위기 지난 2018년 4월 남북 정상회담 및 6월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대전환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해왔다. 네 가지 커다란 변화가 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첫째, 1945년 해방과 함께 들어선 73년짜리 분단체제가 무너지고 통일의 길이 열리는 듯했다. 둘째, 1948년 북한 정부수립 때부터 지속된 70년짜리 북미 적대관계가 '새로운
"국정원, 김일성 찬양한 나를 처 넣으라"
[기고] 국정원, 스스로 바뀔 수 없을까
나는 1990년대 중반부터 대학에서 북한 및 통일문제를 공부하고 사회에선 소박하게나마 통일운동에 몸담으면서 경찰과 국정원의 분에 넘치는 관심을 받았다. 1996-97년 식량난으로 고통 받는 북녘동포를 돕자고 강연하면 앞줄에 앉아 열심히 받아쓰는 사람이 1-2명 꼭 있었다. 경찰이었다. 1998년 평양 방문 무렵엔 학교 강의실에도 직접 들어오거나 프락치를 보
노벨상 수상 포기할 수 없는 트럼프...소설일 뿐일까?
[기고] 트럼프 협상술과 북미관계 전망, 소설 같은 현실?
2월 27~28일(현지 시각) 베트남에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때 미국에 있었다. 그 무렵 남한 언론은 신문이든 방송이든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그 회담 보도에 총력을 기울였다. 미국 언론은 거의 모두 트럼프 변호사였던 마이클 코언 (Michael Cohen)의 의회 증언에 집중하다 회담이 결렬되자 그 결과를 잠깐 톱뉴스로 다루었다. 북미 회담을 놓고
몰래만나는 북한-일본, 이 스토리의 끝은 해피엔딩?
[한일 수교와 미국의 압력] <4·끝> 일북 수교, 미국 반대 뛰어넘어야 가능하다
4. 한일협정과 북일 수교 한국 외교통상부가 2005년 1월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를 공개하겠다고 예고하자 일본 정부가 반발했다. 한국의 친일 보수신문들도 거들었다. 한일협정에 관한 일본의 협상 기술이나 전략 또는 치부가 드러날까봐 우려했을 것이다. 외교문서가 공개되자 1990년대 초부터 논의되던 북일 수교 추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 갖지 않을 수 없
박정희 정권 "일본과 한국은 패밀리, 미국은 큰 형님"
[한일 수교와 미국의 압력] <3> 한일협정, 한국의 종속성과 비굴함
3. 한일 관계정상화를 위한 미국의 개입과 압력 3) 박정희 정부 시기 (1961~1965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자, 미국은 그가 해방 전에는 친일 활동을 하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지만, 한국전쟁 이후 반공주의자로 변하여 "친공 혹은 반미감정의 증거"가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쿠데타를 승인하며 한일회담을 서
이승만, 한일 협정에 완강히 반대한 이유는
[한일 수교와 미국의 압력] <2> 미국, 이승만에 협정 압력
3. 한일 수교를 위한 미국의 개입과 압력 한국과 일본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구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반공 정책에 따라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한일협정은 미국이 1947년부터 소련과 냉전을 벌이면서 추진한 동아시아 지역통합 전략의 일환이었다. 한일협정이 한국과 일본 사이의 양자협상보다는 미국의 중개와 압력에 의해 시작되고 진행된 삼자협상이 될 수밖에
졸속적인 한일 협정, 밀어붙인 건 미국이었다
[한일 수교와 미국의 압력] <1> 연재를 시작하며
1.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적대 관계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다. 눈에 띄게 큰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의혹이나 불만이 제기되지만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1948년부터 70년 동안 굳어진 적대 관계가 하루아침에 끝나고, 1993년부터 25년 동안 꼬인 '북핵 문제'가 순조롭게 풀릴 수 있겠는가. 북미 관계가 정상
日 사과 요구하는 한국, 베트남엔 제대로 사과했나
[베트남 전쟁] <4>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5. 북한의 필사적 대응과 파병 1965년 3월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시작된 제2차 베트남전쟁은 제2의 한국전쟁이기도 했다. 미국과 남베트남 편에서 가장 대대적으로 싸운 나라는 남한이었고, 그에 맞서 북베트남을 가장 화끈하게 도운 나라는 북한이었기 때문이다. 남북한이 베트남에서 싸운 셈이다. 1965년 3월부터 미국의 베트남 침공이 본격화하자 북한
미국의 충실한 '용병'이었던 박정희
[베트남 전쟁] <3>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4. 미국의 무리한 파병 요구와 남한의 지속적 파병 1964년 9월 남한의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지고, 1964년 10월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제는 미국이 먼저 공식적으로 한국의 파병을 요청했다. 1964년 12월 브라운 (Winthrop Brown) 주한미국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존슨 대통령의 뜻이라며 공병이나 건설부대 또는 수송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