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6일 22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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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바이칼호수에서, 우리가 놀 터는 여전히...
[탈춤과 나] 24. 김원호의 탈춤⑤끝
에피소드 둘. 교주님이 불러서 중국에 탈춤 공연 간 적이 있었다. 교주님 공연에 늘 같이 다니는, 나보다사위 좋은 기라성같은 후배들이 있었는데, 아마 시간 때가 안 맞아서인지 내가 땜빵인 것 같았다. 호기를 놓칠 수가 없어서, 내가 맡은 목중, 취발이, 영감을 열씸히 연습했다. 연변 어디쯤에서 몇 번 놀았는데, 나야 당연 감개무량 잘 놀았다. 이 때 우리의
김원호 홍익대 탈춤반 '눈솟말 재인패' 76학번
굿쟁이들의 로망 나라풍물굿을 어를 수 있었던 2016년 촛불광장
[탈춤과 나] 24. 김원호의 탈춤④
6. 놀이판 녹두골 애오개가 민중문화운동협의회로 확장 전개되면서, 나는 전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아직도 묘한 일이었다. 지역으로 내려가 지역활동을 강화하자고 해서 나는 당시 필봉굿을 통한 연고지인 전주로 왔는데, 지금도 어떻게 내려왔는지(선배들이 내려보낸 것 같은데), 일 끝나고도 오랫동안 왜 소환되지 않았는지를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결국 나는 30
풍물이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다
[탈춤과 나] 24. 김원호의 탈춤③
5. 애오개 81년에 복학하고 나서, 후배들이 잘 하고 있는 홍탈에는 가끔식 쇠나 치고, 마당극 반주 정도로 놀면서, 맑시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소개로 구로공단 옆에 있는 낙골에서 하는 야학에 교감(책임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지금은 난곡이라는 이름으로 번듯한 도시 면모이지만, 당시에는 가파른 산중턱 꼬방동네였고, 꼭대기에 있는 야학교실에는
탈춤은 당대 감수성 한복판에서, 어떻게 영역을 열어젖혔을까?
[탈춤과 나] 24. 김원호의 탈춤②
3. 필봉굿 임실 필봉굿은 내게는 커다란 인연이었다. 78년에 전북대 탈춤반인 <한마당>이 갓 결성되었고, 그들이 전주대사습놀이에 쓸만한 굿이 나왔다고 연탈(대학탈춤반연합?)로 통해 연락을 주었다. 79년에 홍탈이 창단공연을 농악을 하고나서 그 해 여름에, 전격적으로 필봉으로 전수를 갔다. 전북대 한마당, 홍탈, 서울대 연극반이 필봉굿을 처음
성속일여(聖俗一如) 대동신명(大同神明)...이 울렁거리는 기운은?
[탈춤과 나] 24. 김원호의 탈춤①
1. 현대미술과 탈춤 유신 말기 나는 미술학도였다. 당시 학교의 풍인 현대미술을 하였다. 사물의 본질, 존재의 의미를 이리저리 지독하게 실험하고 탐구하는, 그런 전위적 삶이 좋았고, 몰두했다.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가 좌충우돌 개진시키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낭만부터 진동하였고, 뒤샹과 마그리뜨 등이 기존 관념을 한 방에 전환시키는 미술적 사유에 감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