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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벨 바그의 마지막 거장, 에릭 로메르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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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벨 바그의 마지막 거장, 에릭 로메르 타계

[뉴스메이커] 항년 89세, 계절 연작, 도덕이야기 연작 등 남겨

프랑스의 거장 감독 에릭 로메르가 지난 11일 프랑스 파리에서 향년 90세로 타계했다. 정확한 사인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의 지인들은 에릭 로메르가 최근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가 11일 사망했다는 소식 외에는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1920년 프랑스 낭시 출생인 로메르 감독은 가장 최근까지도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해온 누벨 바그의 마지막 거장이다. 서른 편이 넘는 장편영화 외에 다양한 TV 작업물과 단편들을 남긴 로메르 감독은 '6개의 도덕 이야기' 시리즈와 '희극과 격언' 시리즈, '계절 연작' 시리즈 등으로 특히 유명하다. 그의 유작인 2008년작인 <로맨스>. 이 작품은 그해 부산영화제에 초청되어 선을 보였으며, 특별상영 형식으로 국내에 개봉했다. 그의 계절 연작 중 일부 작품(<여름이야기> 등)과 <녹색광선>과 같은 작품 역시 국내에 수입돼 정식으로 개봉했으나, 일반 관객들 사이에서 대중적으로 흥행할 만한 작품들은 아닌지라 극장에서의 짧은 상영으로 끝나곤 했다. 다만 2007년에 서울아트시네마가 에릭 로메르 회고전을 개최하면서 그의 초기 단편들을 비롯한 대표작들을 대거 상영한 바 있다.

▲ 에릭 로메르 감독이 남긴 마지막 영화인 2007년작 <로맨스>.

누벨 바그의 다른 감독들, 예컨대 장-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가 그랬듯 에릭 로메르 역시 비평가로 먼저 주목을 받았다. 그가 클로드 샤브롤 감독과 함께 쓴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에 대한 책은 지금도 학계에서 중요한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 자신이 카톨릭 출신이었던 로메르 감독은 히치콕 감독의 카톨릭적 배경을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영화감독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본래 문학도 출신인 에릭 로메르 감독은 길베르 코르디에라는 필명으로 소설 엘리자베스를 출간하며 소설가로 먼저 데뷔했고, 비평과 영화로 관심을 돌리기 전에는 프랑스 문학과 독일 문학을 가르쳤던 교사였다. 로메르 감독의 본명은 장-마리 모리스 셰레(혹은 모리스 앙리 조셉 셰레로도 알려져있다.). 그가 사용한 '에릭 로메르'라는 이름은 배우이자 위대한 감독이었던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과 <푸 망슈> 시리즈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색스 로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다양한 소설과 희곡들, 철학적 이슈들을 언급하며 인용하는 것 역시 문학에 대한 열정과 철학가적 면모에서 비롯된 특징이다. (그의 동생인 르네 셰레 역시 철학자다.)

▲ 에릭 로메르 감독.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던 에릭 로메르 감독은 동료들이 감독으로 전업한 뒤에도 오랫동안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다가 바벳 슈로더 감독과 함께 영화사를 차리고 1959년이 되어서야 첫 연출작 <사자자리>를 내놓는다. 이 작품은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 자신이 '6개의 도덕 이야기'라 이름 붙인 작품들, 즉 <몽소 빵집의 소녀>, <수잔느의 경력>,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클레르의 무릎> 등을 내놓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에릭 로메르 감독은 다른 누벨 바그 감독들과 달리 시대극을 즐겨 만들었으며, 롱테이크 씬을 선호하고 클로즈업이나 사운드트랙의 음악 사용을 지나치게 인위적이라 하여 기피했다. 사건을 묘사하고 엮어나가기보다 사건과 사건 사이 인간의 마음에 주로 집중하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흐름이 다소 느린 반면 굉장히 수다스럽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점이 일부 관객들에게는 악명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예컨대 아서 펜 감독이 연출한 <나이트 무브>에서 진 해크먼은 이런 대사를 내뱉는다. "로메르 영화를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마치 페인트가 마르는 걸 보는 것 같은 경험이더군."

▲ 계절 연작 중 한 편인 <여름 이야기>

그러나 인간의 심리와 본성에 대한 놀라운 통찰과 섬세한 묘사, 그리고 이로 인해 드러나는 인물들의 한심한, 혹은 애처로운 코믹함에도 불구하고(그의 영화들이 종종 코미디, 심지어 로맨틱 코미디로 분류되는 이유!) 이성적인 철학자로서의 시선과 따스한 시선을 동시에 견지하는 것이야말로 로메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DVD가 일반화되던 당시 국내 영화팬들이 가장 출시를 고대하던 작품 중 하나가 <녹색광선>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많은 관객들이 밀려오는 졸음을, 혹은 주인공에 대한 짜증을 이기지 못해 결국 중도에 포기했지만, 영화의 끝에 잠깐 나오는 그 녹색광선을 마침내 목도한 관객들은 이 영화가 주는 위로와 기적이 얼마나 큰 것인지 두고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로메르 감독을 표현하는 말은 많지만, '인간의 마음을 스크린에 옮기는 감독'이라는 말이야말로 에릭 로메르 감독 스스로도 가장 수긍할 만한 표현이 아닐까.

이제 거장은 가고 그의 영화만이 남았다. 언제나 거장의 죽음은 남아있는 후대의 영화팬들에게 안타까움과 슬픔, 그리고 상실감을 남긴다. 그리고 아직 살아남아 영화를 찍고 있는 다른 노감독들을 새삼 돌아보고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든다. 그러나 결국 감독은 영화로 말하는 법이다. 언젠가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오래된 혹은 근래의 영화들을 다시, 혹은 미처 국내에 상영되지 못했던 영화들을 새로이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가 한국의 보다 많은 팬들에게 말을 걸어오기를, 혹은 그가 걸어오는 말을 보다 많은 젊은 영화팬들이 들을 수 있기를. 모든 거장들이 남긴 영화들은 세상에 남겨진 빛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 선물은 언제나 '현재형'의 시제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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