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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행복 vs 진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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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행복 vs 진짜 행복

[철학자의 서재]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행복에 대한 통념

누구나 행복하길 원한다. 돈 벌기 위해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시간과 돈과 노력을 투자해 취미와 여가 생활을 즐기는 것도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성취감을 위해 일에 중독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도, 고통을 인내하며 현실에 적응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것도 행복 때문이다. 의미 있는 타인이나 집단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죽을 둥 살 둥 발버둥치는 것도 그렇다. 치열한 경쟁 사회를 떠나 전원 생활을 하거나 귀농하는 것 모두 행복해지기 위한 방편이다. 심지어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권리와 행복을 침해하는 것도 일상이다. 행복은 우리 삶의 의미이자 목표인 듯싶다.

행복하기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행복감을 느끼려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거나 적어도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행복감은 급격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현실 조건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현실이 우리의 욕망과 희망을 허용한다면 행복의 문이 열릴 것이고, 욕망 충족을 방해하거나 희망을 좌절시킨다면 닫히고 말 것이다. 현실 조건과 욕망 혹은 희망 사이의 긴장과 충돌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쉽게 넘어설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방향을 틀어 행복을 추구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당키 힘든 현실적 조건과 맞서야 하며 고통을 인내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을 무너뜨리려다가는 오히려 그것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무모한 시도라면 방법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시선을 돌려 우리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 현명하다. 욕망의 충족을 방해하고 희망을 좌절시키는 현실에 불만스러워하고 불평할수록 불행의 크기는 커진다. 긍정적 태도로 세상과 현재 삶에 만족하는 것, 욕망의 크기를 줄이고 소박하게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는 가르침은 매우 익숙하다. 마음이 충분한 면역력을 갖추고 있다면 어떠한 바이러스나 인플루엔자가 오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신체 면역력을 키우듯 외부 자극이나 조건에 흔들리지 않을 마음 면역력을 키울 일이다. 현실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평과 불만으로 스스로를 불행의 나락으로 몰아가지 말고, 긍정적인 시선과 만족감으로 세상과 삶을 대할 일이다. 수행도 해야 하고 자기 조절 능력도 향상시켜야 하며 늘 부드러운 미소로 세상을 포용할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사람이라는 탈무드의 가르침이 우리 삶의 지침이 되어야 할 성싶다.

행복의 함정

▲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프레시안
행복의 키워드를 알고 있다면 의당 행복해지려고 노력만 하면 될 터이다. 노력해도 안 된다면 자기 탓이나 할 일이다. 실패의 책임을 자연 개인의 의지박약으로 돌릴 수밖에 없으리라. 아니면 키워드 자체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의지를 무력화시키기 쉬운 방법은 행복을 소수만의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도 아니면 새로운 키워드를 물색해야 할 것이다. 잘못된 방법이 좋은 성과를 가져다 줄 리 없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정홍택 옮기, 소담출판사 펴냄)는 우리네 통속적 행복관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소설의 소재인 세계 제국은 전체주의적으로 통제되고 있는 생명 공학적 디스토피아의 세계다. 이 제국의 최고 목표는 안정이다. 안정이라는 목표는 구성원들이 고통이 없고 쾌락과 행복을 느낄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인공 부화의 전면화, 수면 학습, 인공 부화 과정에서 우생학적 방식의 계급 분류, 집단적 프리섹스, 쾌락을 주고 우울병을 치료해주는 소마(Soma, 이 말은 힌두교도가 복용했던 환각 작용이 있는 인도의 식물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소설의 내용상 Scientific Coma를 줄인 신조어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성싶다) 등의 과학적 장치와 방식을 동원한다.

무엇보다도 소마는 이 제국을 특징지을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를 유지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소마를 복용한다. 그것을 복용함으로써 고통을 없애고 쾌락을 얻을 뿐 아니라 세상과 삶에 대해 긍정하고 만족한다. 과학의 발전 덕택에 술이나 마약과는 달리 부작용이 전혀 없다. 소마는 우리네 통속적 행복관에 완전히 부합한다. 소마를 통해 만족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힘든 도덕적 훈련을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헉슬리는 소마를 문제 삼는다. 그가 비판을 집중하는 것도 이 소마다.

헉슬리는 이것이 진정한 행복인지를 묻는다. 소마에 의존하는 행복은 자유의 희생이다. 스스로 자유롭게 소마를 복용하면서 행복하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수면 학습에 의한 통해 조작된 것일 뿐이다. 존의 입을 빌어 헉슬리는 말한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다' 이 말을 우리는 아이들에게 다섯 살 때부터 가르치기 시작하지. 하지만 레니나, 다른 방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자유를 원하지 않소? 이를테면 레니나 당신 자신의 방법으로 말입니다. 타인의 방법이 아닌 것으로 말이오." 그리고 창밖으로 소마를 마구 던지며 외친다. "마침내 인간이 되었어. 인간이 된 거야!" 자유의지로 행복 찾기! 불행조차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야말로 헉슬리가 그토록 강조하고자 했던 점이다.

자유와 대척점에 서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자유가 행복만큼 소중하다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포기할 수 없다. 역으로 자유를 위해 행복을 포기할 수도 없다. 자유 없는 행복은 공허하지만 행복 없는 자유는 맹목이다. 우리는 자유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어도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에 불행하다.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자유롭게 행복해야 하지만 동시에 행복하게 자유로워야 한다. 긍정적 시선, 현재 삶에 대한 만족과 감사라는 단어로만 행복을 말하는 한, 자유와 행복은 양립할 수 없다.

행복지수의 중요성

헉슬리가 말하는 자유는 기실 그 자체로 사회적이다. 구성원들의 자유는 지배자 혹은 타인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그리고 사회에 저항하는 존의 자유도 그것이 허용하는 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이다. 전자는 지배자에 의해 조작된 자유요 다른 하나는 그에 역행하는 자유이다. 그러나 사회 질서를 바꿀만한 힘이 없는 한, 그것을 침해하는 존의 자유는 지속될 수 없다. 소멸될 수밖에 없다. 역사적 맥락을 들추지 않더라도 사회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도 사회적 현실과 주관적 의식 및 태도의 상관성이다. 사회적 현실을 배제하거나 혹은 그것이 주관적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배제하고 행복을 논할 수 없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그것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필요도 마음과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과학적 조작에 바탕을 둔 전체주의와 구성원 다수의 행복이 양립하는 소설 속 세계가 실현 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다음의 명제는 언제나 정당할 수밖에 없다. 사회와 대립하는 행복은 가짜 행복이다.

사실 이런 식의 접근은 매우 일반적이다. 영국의 NEF(New Economics Foundation)는 국가별 행복지수(HPI)의 기준을 기대 수명, 삶의 만족도, '생태 발자국 지수(인간이 소비하는 에너지, 식량, 주택, 도로 등을 만들기 위해 자원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토지로 환산한 것으로, 생태계를 망치는 인간의 발자국을 의미)'로 제시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경제, 자립, 형평성, 건강, 사회적 연대, 환경, 생활 만족 등 총 7개 분야에서 소득분포, 고용률, 소득불평등, 빈곤율, 기대 수명, 자살률 등 총 26개 지표를 평가해 국가의 행복 정도를 분석한다. 심지어 이명박 정부조차 소득, 고용, 교육, 교육, 주거 등을 토대로 '국민행복지수'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행복지수는 삶의 질에 대한 평가이다. 이를 고려하지 않고 행복을 논하는 것은 허상이다. 삶의 질은 개인의 의식이나 마음이나 태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 발전 수준과 분배 체계, 복지 수준, 정치 시스템의 성격, 사회적 연대, 환경, 역사적 전통, 문화 향유의 수준, 교육 시스템과 그 수준, 국가 지도자의 철학과 역량 등의 사회적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히려 결정적이라 말하는 것이 옳다. 이들 요소들이 개인들의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의 크기는 국가마다 다르겠지만, 삶의 질이 근본적으로 사회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행복이 행복하다는 판단과 느낌에 의지하는 한,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마음이나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마음이나 태도가 사회적 현실 및 각자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우리의 삶이 사회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한, 우리의 의식이나 태도는 사회적 현실과 분리될 수 없다. 사회적 현실의 개선은 개인의 삶의 내용과 방식의 변화를 낳는다. 삶의 내용과 방식의 변화는 의식과 태도의 변화를 가져온다. 결국 삶의 질의 개선은 사회적 현실의 개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회적 현실에 부합하거나 그것을 개선함으로써 얻는 행복은 사회와 양립하는 행복이다. 반면 사회적 현실과 무관하거나 그것에 역행하는 의식과 태도 속에서 찾는 행복은 가짜 행복, 곧 사회와 대립하는 행복이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국가의 발전에 비해 행복도가 낮은 것도 문제지만, 행복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돈을 꼽는 것 또한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는 특이 현상이다' 우리 국민의 가치관 조사를 통해 학계와 언론계의 지식인들은 이렇게 진단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국제적인 기관들이 평가한 국가별 행복지수를 보면, 부탄, 코스타리카, 베트남, 나이지라 등의 후진국 혹은 저개발국이 늘 상위권이다. 결국 속물적 가치관이나 정신적 후진성이 우리의 행복지수를 갉아 먹는다고 결론을 내릴 법도 하다.

다수의 국민이 돈을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하지만 애정 어린 눈으로 본다면 전혀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극단적으로 말해, 오죽하면 돈이 행복을 좌우한다고 했을까! 돈이 있어야 사람대접 받고 돈이 없으면 삶의 질이 형편없어지는 사회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런 사회를 만든 것은 우리다. 그러나 사회 질서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그것이 정당하든 부당하든 간에 순응하는 수밖에 없다. 웬만해선 바뀌지도 않는 그것에 저항하다가 희생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 질서를 운영하고 주도한다. 그렇다면 국민의 천박한 가치관과 정신성은 이들에게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 사회만큼 정신, 마음, 태도 등이 행복을 좌우한다고 믿는 나라도 별로 없다. 그럼에도 가치관 조사에서는 우리 국민은 돈이 행복의 열쇠라고 믿고 있다. 모순 아닌가. 네 개의 해석만이 가능하리라. 역사와 전통을 강조하는 이러한 행복관이 더 이상 통설로 자리매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그 하나요, 일부 지식인들이 특정 현상을 과도하게 부각시켜 침소봉대(針小棒大)하고 있다는 것이 다른 하나다. 아니면 삶에서는 돈을 밝히고 머리로는 마음과 태도를 강조하는 이중적 태도가 우리 국민의 진정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그마저 아니라면 풍족한 돈 없이는 마음을 다스릴 수 없고 세상과 삶에 대해 긍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국민이 행복을 마음과 태도 등에서 찾고 있지 않다면, 더 이상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는 기존의 통설은 유지될 수 없다. 이는 일부 지식인의 가슴과 머리가 일반 국민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이 입증되는 격이다. 논리와 설명 능력이 부족해 마음과 태도를 강조하는 행복관을 반박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 국민은 일부 지식인의 관점을 가슴으로부터 거부하고 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나마 현실적 삶과 자기 자신을 지탱하고 자위하기 위해서 부득불 마음과 태도를 강조하는 행복관을 수용하고 있는 것일 게다. 포기와 달관은 종이 한 장 차이 아니던가. 국민 다수가 처한 사회적 현실 및 그들의 삶을 외면하고 가치관과 정신성만을 문제 삼는 것은 애정 없는 비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우리 국민의 가치관과 정신을 문제 삼는 지식인들은 유럽 선진국들의 행복지수가 높다는 점은 아예 부각시키지도 않고 있다. 그들 국가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며 빈부격차가 상대적으로 적다. 게다가 정치적으로도 비교적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환경에 대한 관심과 정책적 지원도 활발하다. 물론 그들 국가를 끌어들여 우리의 가치관과 정신성을 비판할 수도 있다. 국가 발전도에 걸맞지 않은 천박한 가치관과 정신성이 우리의 행복지수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는 경제적,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측면 등에서 우리와 그들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오히려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는 태도 자체가 세계적 추세에 역행한다. 가치관과 정신적 후진성만을 강조하는 일부 지식인의 태도 역시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긴 마찬가지다. 국민의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한 적실한 방향과 방안의 모색은 사회적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만 존재한다. 가치관과 정신성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오답을 정답이라고 호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의식을 변화시키라는 요청은 현존하는 것을 다른 것으로 해석하라는, 즉 그것을 다른 해석에 의해 승인하라는 요청일 뿐"(<독일이데올로기>)이라는 마르크스의 통찰은 예리하기 그지없다.

마음 그리고 현실과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결국 소수만이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다. 소수가 행복한 사회에서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 적어도 쪼들리지 않는 사람만이 적어도 불행해질 가능성이 낮다. 지적으로 정신적으로 훈련 받은 자만이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다. 다수가 행복해야 진짜 행복한 사회다. 다수의 행복, 그것은 마음과 태도 바깥에 있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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