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국내 거주 외국인 110만 시대에 이르고 있다. 2050년에 이르면 한국인 10명중 1명이 '선주민 한국인'이 아닌 '이주민 한국인'이 된다는 예측도 있다. 마치 '새마을운동'처럼 농어촌 지역에서 한국어 교육, 문화 교육 프로그램, 언어 치료 교육 등 한국인의 다문화 프로그램은 빠르게 전파되고 그 파급력을 낳고 있다.
하지만 한국 '다문화화'라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양상은 철학적 개념 정립 없이 행정적이고 도구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다문화 철학의 기본 원리가 되는 관용, 다양성, 상생, 의사소통 등에 대한 충분한 윤리적 담론이 없이 단기적인 시각에서 접근하고 그 해법을 찾고 있다.
에이미 추아의 <제국의 미래>(이순희 옮김, 비아북 펴냄)는 미국은 "제국의 길을 포기하고 관용적인 강대국으로 복귀하는 것이 살길"이라고 충고했다. 편향적인 세계 전략은 대외적으로 미국을 고립시킬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미국은 하드파워가 아니라 문화적인 소프트파워를 기반으로 할 때 세계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으며, 문화의 위대함은 타자에 대한 관용에서 나올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용'은 인권보다 경제적 실용주의 측면에서 다문화 문제를 다루는 한국 다문화 정책에 많은 시사점을 주리라 생각된다.
이 책에서 추아는 '제국은 어떻게 지배하는가'에 주목했다. 그는 로마제국이 번영을 이룬 것은 관용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던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당나라와 몽골이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관용 정책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반대로 명나라, 무굴제국 등은 편협한 정책으로 일관하여 큰 제국을 형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미국도 경제적 이권 추구에 집중하고 관용정책을 약화시킬 때, 패권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 <제국의 미래>(에이미 추아 지음, 이순희 옮김, 비아북 펴냄). ⓒ프레시안 |
다문화 사회 개념은 "여러 유형(인종, 민족, 성별, 종교, 성 취향)의 이질적인 문화가 하나의 제도권 안에서 형성되는 사회"로 정의할 수 있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다문화'는 제한된 개념이다. 가령 경상도 남자와 전라도 여자가 결혼하면 '다문화'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다문화 가정이나 다문화 교육에서 정의하는 '다문화'는 이주노동자, 결혼 이민자, 난민, 유학생, 국적 취득한 외국인, 외국인 자녀 2~3세 등에 국한시키고 있다. 현재의 다문화 교육은 그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의 다문화화는 다수와 소수의 구분을 전제로 하는 인식에서 벗어나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한 철학을 정립해야 한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문화적 상황은 사회 통합을 유지하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관용적 태도를 가지고 감수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문화 상황은 일종의 축복이다. 다문화 사회는 우리의 한정되고 제한된 상황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가령 한 양식장에 미꾸라지를 잘 양식하려면, 천적인 메기를 같이 키우면 좋다는 원리와 같다. 우리가 자신을 찾고 재정립할 수 있으면 타자의 존재를 의식하고 그와 교류하여 자신 및 사회의 거듭난 발전을 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 사회는 그런 문화 다양성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타자를 포용해본 경험이 많지 않았다.
다문화 상황이란 타문화를 관용하고 존중하는 것보다는 기본적으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다문화 상황에 대한 이러한 시각에서 한국사회를 바라본다면 다문화·다민족 사회로의 진전과 관련하여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이주노동자나 결혼 이주 여성 등 '그들'에 대한 관용이나 이해라기보다는 '우리'자신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다.
문화 다양성은 다양한 창조적 역량을 풍부하게 한다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문화의 고유성과 인류의 보편성을 '패턴'에 비유한 바 있다. 즉 같은 색실을 사용하더라도 서로 다른 무늬를 가진 옷감처럼 문화는 동일한 요소로 이루어지더라도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진다는 것이다. 다문화는 서로 다른 인종, 민족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채로운 무늬로 나타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여러 가치관을 나타낸다.
2001년 <유네스코의 문화 다양성 선언>은 유네스코가 문화 다양성 및 다문화 이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선언>에서는 전쟁 없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문화 다양성 존중이 전제가 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다른 문화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를 여는 것도 의미한다. 나를 타인에게 열어놓는다면, 다른 문화와 소통, 부대낌을 통해서 내가 변할 수도 있다. 문화 다양성은 서로를 변화시키면서 제각기 새로운 것으로 거듭나는 역동성을 갖고 있다. 한국이 맞이하는 다문화 사회는 편협한 인종과 민족주의적 편견을 벗어나 문화 다양성을 키워나가야 한다.
다문화 사회는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관용 및 존중과 함께, 상생과 협력을 위한 최소한의 보편성 추구를 통해서 사회적 융합을 꾀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 사회 속에 다양한 문화가 상생할 때, 그 사회는 창조적 역동성을 발휘할 수 있다. 또한 문화적 다양성은 그 사회의 문화적 자산을 풍부하게 해줄뿐더러 '다름'을 수용하여 함께 사는 것을 배우게 함으로써 사회를 성숙시킨다.
유네스코는 다문화 교육보다는 <문화 간 이해 교육(intercultural educ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문화 간 이해 교육은 다양한 교류를 통해 융합되는 문화의 역동성을 중시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사회로 나아가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건대, 교육은 부모 출신 국가와 한국의 문화 간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국인이 바라보는 역사, 문화보다는 그들 출신 국가인들이 바라보는 자국의 역사, 문화를 상호 균형 있게 가르쳐야 한다. 또한 이주노동자의 주류를 이루는 아시아인에 대해서, 한국의 도덕, 역사 교과서에서의 서구 중심주의적인 부정적인 편견과 선입관을 없애는 데 다문화 교육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열린 민족주의와 세계시민 교육
세계화의 가속화에 따라 국경이 무의미해진 상태에서 '국가'나 '민족주의'는 신화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있다. 학창시절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읽으면서, 15~16세기의 전쟁은 왕조의 전쟁이지, 국민 또는 시민의 전쟁이 아니라는 데 놀라움을 겪었는데, 지금은 '민족국가'가 허구의 이데올로기라는 데 충격을 받았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이다"라고 한다. 이전 시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새로운 이념의 필요성에 따라 생겨난 민족국가는 실체가 아니라 허구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라는 말도 조심스럽게 쓸 수밖에 없다. 한울타리, '우리'는 한 구역의 묶음을 내포하면서 타인에 대한 배제를 내포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축구장의 응원 구호이지만, 타인을 배척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라는 말을 떼 내기가 아주 힘들다. 어릴 때 민족교육, 국민윤리 교육 등을 철저히 받아서 일순간에 배제하기가 어렵다. 또한 세계시민 교육을 강조하면서도, 국민의 정체성, 나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는가에 의문점을 갖게 되었다. 한편, 다문화 사회에서는 자민족 중심주의에서 비롯된 민족우월감을 탈피해서 성장 동력으로서 외국인 이주민을 받아들이고, 역동적인 '열린 민족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우리의 자기인식을 국부적 관심에서 세계적 관심으로 승화시키는 첩경이 세계시민 교육이다. 세계시민 교육은 '자신의 정체성과 세계시민성 함양'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신념에 기초한다. 인류 생존에 생물학적 다양성이 필요하다면, 문화의 생존에도 문화적 다양성이 필요하다. 협소한 민족주의가 되지 않으려면, 대화와 상호 교류가 필요하다. 서로의 문화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민족주의는 단일국가론이나 순혈주의를 벗어나, 타자에 대한 환대(hospitality)를 통해 '안과 밖이 열린 민족주의'가 되어야 한다. 즉 세계적인 시각에서 한국사를 조망하면서, 세계를 바라보고 글로벌 이슈를 다루는 국제 이해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제 이해 교육은 다각화된 세계체제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다문화적 감수성을 가진 융통성 있는 세계시민양성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다문화 사회이다
매스컴에서 '다문화 사회' 광고나 프로그램은 우리가 다문화 사회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한국의 다문화화는 서구 유럽과 유사하게 외국인 노동력 유입과 1990년대 이후 결혼이민자 증가에 따라 나타난 결과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다문화주의 정책의 큰 흐름은 관용, 다양성을 기반으로 외국인들을 유입하여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한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 정부는 인권 문제로 접근해야 할 외국인 정책을 경제적 실용주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현 정부는 이민자의 입국 자격을 따져가는 외국인의 '선별적 이주 정책'과 교육을 통해 이주자의 동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런 의식의 밑바닥에는 장차 국내 거소 외국인들이 여러 문제를 양산하기 전에 '선량하고 기술이 있는' 외국인만 이주시켜 서구에서 발생되는 인종·종교 간 갈등을 없애자는 의도가 숨어있다. 또 재외동포법을 개정시켜 해외 동포를 한국인으로 흡수 통합하려는 정책을 펴서, 한국인의 '제국'의 영역을 넓히려 하고 있다.
물론 이런 정책들이 한국 사회의 노동력 부족이나 농어촌 결혼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장차 일어날 외국인 사회 문제에 예방차원의 해결책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근시안적이며, 어떻게 튈지도 모르는 럭비공에 대한 대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을 문화적 용광로에 녹여서 한국인으로 복제하기보다는 비빔밥처럼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해야 한다.
외국 이주민을 예비 범죄자로 취급하거나 '프로쿠스테스' 침대에 억지로 눕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을 우리 사회의 '더불어 사는 사람들'로 인정하고, 그들의 차이를 관용적 태도로서 받아들이는 교육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추아는 미국의 일방적인 제국 추구가 결국은 미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결과를 나오게 했다고 한다. 세계 자체는 다문화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을 차별화하고 문제시하면서 살아가기에는 제반 여건들이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바람직한 다문화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정의'와 '선' 같은 보편윤리 추구와 기초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문제>가 선행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그들을 인간적으로 처우할 수 있는 법적 조치를 마련하고, 노동력이 아닌 인격체를 가진 사람으로 봐야 한다. 외국인을 대상화하지 말고, 곁에 같이 있는 사람들로 인정하고, 함께 한국을 만들어 가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국 사회는 세계와 소통하며 더불어 갈 수 있다.
추아는 미국이 관용을 통해서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성장한 것처럼, 계속해서 그 제국을 유지하려면 정치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동한 대우를 의미하는 '상대적 관용'을 발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문화 사회를 맞이하고 있는 한국은 외국인 특히 아시아인에 대한 이해를 통해 편견과 차별을 극복해야 한다.
다문화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감수성 확대를 위한 인식의 전환과 '열린 민족주의'로의 지향이 필요하다. 이주 및 다문화 사회에는 무역, 문화 교류 외에도 '사람의 이동'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의 다문화 사회의 구축이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때, 관용을 중시하는 윤리적 담론으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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