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의 서막은 우연히 열렸다. 커뮤니티 사이트인 페이스북에 RATM의 싱글 'Killing In The Name'을 "크리스마스 넘버원으로 만들자"는 페이지가 개설되면서부터였다. 영국판 '아메리칸 아이돌'인 리얼리티 오디션 프로그램 '엑스 팩터'가 지배하는 크리스마스 시즌 1위곡이 지겹다는 이유에서다. 그럴만도 했다. 2005년부터였다. '엑스 팩터'의 우승자는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쉐인 워드, 레오나 루이스, 레온 잭슨, 그리고 알렉산드라 버크까지, 예외는 없었다. 특정 프로그램이 연중 가장 큰 대목을 독점하다시피하는 일이 이어진 것이다.
▲ ⓒ<NME> |
네티즌들은 분노했다. 박진영이나 양현석, 이수만이 인터넷 상의 캠페인에 부정적인 코멘트를 했을 때, 우리 네티즌들의 반응을 상상해본다면 얼추 대입이 될 것이다. 단, 그들은 사이먼 코웰을 향해 악플을 쏟아내기보다는 이 캠페인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페이스북 페이지엔 실시간으로 수많은 관련글이 쏟아졌고, '엑스 팩터'의 크리스마스 시즌 독점을 고까와하고 있던 이들이 자신의 블로그와 트위터를 통해 캠페인을 홍보했다.
그리고, 장수가 칼을 뽑았다. RATM이었다. 밴드의 기타리스트인 톰 모렐로는 인터넷을 통해 이 캠페인에 공감하는 이들의 행동을 촉구했다. RATM만 참전한 게 아니었다. 너바나(Nirvana)의 드러머였으며 푸 파이터스(Foo Fighters)의 리더인 데이브 그롤부터 폴 매카트니 경까지, 뮤지션들의 지지가 이어졌다. 거물 엔터테인먼트 제작자에 대항하여 시작된 일개 네티즌들의 저항이 기라성같은 명장들을 불러들였다. 네티즌 VS 사이먼 코웰의 전선이 뮤지션 진영 VS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확산된 거다.
전면전이 시작됐다. 해체했다가 지난해 잠깐 활동한 후, 다시 기약없는 휴지기에 있던 RATM은 이번 '전투'를 맞아 다시 모여 BBC라디오에 출연했다. 방송에서 톰 모렐로는 "우리(미국)의 '아메리칸 아이돌'과 비슷한 '엑스 팩터'에 대해 말할 게 있다. 이 쇼의 시청자라면 콘테스트에 참가자들을 놓고 투표를 한다. 하지만 이 쇼 자체에 반대하는 투표를 할 기회는 지금까지 없었다"며 '엑스 팩터' 반대 진영의 집결을 촉구했다. 또한 이 싱글의 판매 수익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들은 'Kiiling In The Name'을 라이브로 연주했다.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전횡을 비난하며 "*까, 난 니 말대로 하지는 않을거야. 이 놈아!"라는 절규로 끝나는, 크리스마스와 절대 어울리지 않는 이 노래를(☞ 바로 가기 : 유튜브에 오른 BBC라디오 공연).
이미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이 캠페인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움직임은 들끓고 있었다. 아이튠스, 아마존, 음반 매장에서 'Kiiling In The Name'을 다운받고, 구입하려는 행렬이 이어졌다. 그래서 12월 셋째 주 차트의 판매 집계가 시작된 주초에는 예상을 뒤엎고 RATM이 우세를 보였다. 하지만 17일 목요일, 온라인으로만 풀려있던 존 엘더리의 'The Climb'이 CD로 발매되면서 판매량이 급상승하기 시작했고 목요일에는 박빙까지 따라붙더니 결국 금요일 역전당하고 말았다. 19일 토요일, 톰 모렐로가 "RATM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 2010년 영국에서 대규모 무료 공연을 열겠다"고 밝혔음에도 여전히 판매량은 조 맥엘더리가 우위에 있었다.
자료 집계가 종료되고 차트가 발표되는 20일이 밝았다. 결과는? RATM의 승리였다. '엑스 팩터' 반대파의 승리이기도 했다. 'Kiiling In The Name'은 전 주 80위에서 79계단을 뛰어오르며 'The Climb'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아이튠즈 차트에서도 1위와 2위의 자리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아마존 차트에서는 오리지널 버전과 클린 버전, 그리고 라이브 버전이 1위와 3위, 4위로 'The Climb'을 포위하는 모양새를 보이기도 했다. 전투는 끝났다. 혁명은 성공했다.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네티즌들이 환호했다. 페이스북의 RATM캠페인 페이지에는 "Cool Britania!" "British Revolution!"같은 코멘트가 잇달아 달렸다. 아무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던, 이 말도 안되는 전투에서 승리한 RATM은 당초 약속대로 대규모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만들어낸 영국인들은 전혀 뜻하지 않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게 됐다. 어떤 이에게는 생애 최고의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90년대'에 머물렀던 Rage Againt The Machine은 2009년 크리스마스 차트를 지배했다. 21일 UK싱글차트 1위 곡에 RATM의 대표곡 'Killing In The Name'이 올랐다. ⓒ프레시안 |
영화같은 사건이다. 하지만 단순 흥밋거리는 아니다. 왜 RATM이었을까. 행동주의 뮤지션으로서 가장 성공했던 팀이기 때문일 것이다. 메시지라는 명분과 음악이라는 무기로 전 세계에 미국, 자본주의, 제국주의, 인종차별 등의 정치적 메시지를 퍼뜨렸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음악이 예능(리얼리티)의 수단으로 전락한 현 상황에 대한 반발이자, 음악이 그 자체로 이슈와 트렌드,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냈던 마지막 시대인 90년대를 환기시키는 상징으로서 RATM이 제시됐고 호응을 얻은 것이다. 무기력과 패배감을 노래했던 그런지 밴드들과는 달리, 혁명을 외쳤던 그들의 메시지는 더욱 견고해진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한 반감의 기호로써 지금 다시 작동한다. 그래서 'Killing In The Name'은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리얼리티를 즐기고 있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다.
또한 이 사건은 리얼리티 오디션 프로그램의 문제를 환기시켜주는 계기다. '아메리칸 아이돌', '엑스 팩터' 그리고 '슈퍼스타 케이'까지, 몇달에 걸친 경쟁 끝에 최종 우승자가 되는 주인공은 결코 가장 실력있는 이가 아니다. 보다 많은 대중에게 어필해서 가장 많은 표를 얻는 이다. 그들을 이슈로 만드는 건 음악적 개성보다는 드라마틱한 사연이고 수없이 많은 취향들 사이에서 공집합을 형성하는 무난하고 익숙한 감성이다. 선명한 색깔을 가진 후보보다 만인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후보가 선거에서 당선될 확률이 더욱 높은 것과 같다. 리얼리티 오디션 프로그램의 맹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음악의 역사는 개성과 다름에 의해 전복되고 발전해왔다. 음악사에 한 획을 그었던 뮤지션들이 이번 캠페인에 동참한 까닭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문제점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RATM 캠페인, 그리고 그 결과는 음악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완벽히 종속된 현실이 정당한가, 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다.
마지막으로, 이 캠페인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가능성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사건이다. 뮤직 비즈니스,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갈수록 융합하고 있다. 음악과 방송과 공연이 하나로 엮여 스타를 만들어내고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리얼리티 오디션 프로그램은 그런 구조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스템이다. 50년대의 엘비스 프레슬리, 60년대의 비틀즈, 70년대 아바와 레드 제플린, 80년대 마이클 잭슨, 90년대 너바나처럼 음악은 10년마다 혁명을 겪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때때로 산업과 마찰을 일으키며 산업, 즉 자본 위에 군림하려 했다.
그러나 리얼리티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배출된 스타에게는 그런 위험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존의 혁명적 스타들과는 달리, 자의식과 세계관보다는 전적으로 매스 미디어와 자본의 힘에 의해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상향이 아닌 하향의 흐름을 통해, 자본과 올드 미디어의 단결과 밀어주기를 통해 스타가 된 것이다. 그러나 RATM 캠페인은 상향의 움직임이었다. 한 개인의 불만에서 시작된 캠페인에 많은 이들이 동참하면서 판세를 바꿔 버렸다. 자본 대신 의지가 있었고, 순응 대신 주장이 있었다. 캠페인에 참가한 수많은 개인들이 또 하나의 전체가 되어 '엑스 팩터'의 지배를 끝낸 것이다. 온라인이 아니었다면 과연 가능이나 했을까.
▲애플의 '아이튠스' 음원 다운로드 창 역시 RATM이 지배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처럼 크리스마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 불티나게 팔린 건 전례없는 일이다. ⓒ애플 |
이런 사례가 물론 처음은 아니다. 팬 투표로 진행된 1999년 브릿 어워드 신인상을 아이돌 그룹 스텝스를 제치고 인디 포크 밴드 벨 앤 세바스찬(Belle And Sebastian)이 차지했던 일도 있고, 올해 초 한국대중음악상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음악인' 남자 뮤지션 부문에서 장기하가 태양을 제치고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모두 큰 화제가 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존 사례들이 팬 vs 팬, 혹은 커뮤니티 VS 커뮤니티의 싸움이었다면 RATM 캠페인의 승리는 관습과 운동의 대결이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매스 미디어에 의해 신드롬이 된 음반을 사는 당연한 관습과, 당연한 관습과는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다는 메시지를 알리려는 운동간의 전투였던 까닭이다.
당분간 '아메리칸 아이돌'과 '엑스 팩터'의 시대는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 RATM 캠페인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저항하는 세력의 등장을 알리는 계기였다. 첫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내년에도 어김없이 비슷한 전투가 발생할 것이다.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영국뿐 아니라 미국, 혹은 한국까지 전선이 확대될지도 모른다. 올드 미디어와 뉴 미디어, 시스템과 개인. 대세와 다른 목소리 간의 전선이 형성될 동기가 마련됐다는 얘기다. 음악이 세상을 바꾸는 시대는 분명히 지났다. 하지만 2009년의 크리스마스는 바꿨다. 크리스마스와 가장 안 어울리는 노래가, 가장 설레는 크리스마스를 만들었다. 매년 이어질 크리스마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을 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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