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잉 넛 멤버들이 공통으로 팬임을 강조한 가수가 바로 한국 고속도로 뽕짝 메들리를 평정했던, 그리고 메들리 가수로는 최초로 일본의 소니뮤직과 계약해 이듬해인 1996년에는 일본 대중음악 어워드에서 신인상마저 수상한 '이박사'인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고속도로 음반 판매량의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하지만 이박사의 음반들은 줄잡아 수백만 장은 팔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트로트의 정치학> 손민정 지음, 음악세계 펴냄. ⓒ프레시안 |
<트로트의 정치학>(손민정 지음, 음악세계)은 도저히 평론이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트로트를 문화인류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5년 전 미국 텍사스주립대에 제출한 박사논문을 손질해 보다 읽기 쉽게 책으로 냈다. '정치학'이라는 말이 붙었으나 딱딱한 정치사와 연계해서 살펴보지는 않는다. 천대받기만 한 트로트를 온전한 음악장르의 하나로 복권해 어떻게 한국 사회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었는지를 긴 시간의 연구로 짚어냈다. 지난 80여년간 상처입었던 장르의 권위를 복구시켰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정치적이다.
트로트를 왜 다시 돌아봐야 하나? 책을 읽는 이도, 글쓴이도 여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학생들의 열렬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트로트를 논문 주제로까지 끌고 갈 마음은 없었다. …(중략)… 그러던 중 나에게 경종을 울린 한 사람이 등장했다. 독설가로 유명한 그녀는 미국 대중음악학자 엘리자베스 버그만이었다. 미국음악이 한국음악을 바꾸기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냐는 것이 첫 번째 질문이었고, 두 번째 질문은 왜 트로트라는 핵심적인 장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변을 빙빙 맴도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우리 주위에 있던 음악을 분석하면서 저자는 트로트를 단순한 음악 장르가 아닌, '음악 양식'으로 다룬다. 레코딩 기술은 어떻게 트로트의 대중화에 기여했는지, 트로트는 과연 단순히 2박 계열의 단순한 리듬에만 의존하는 저급한 음악인지, 엔카의 영향을 받은 음악이 맞는지를 책은 시간의 순서를 따라 훑어간다.
그리고 왜 아직도 <전국노래자랑>과 같은 장수 프로그램이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지, 얼굴없는 메들리 가수들이 그리도 많은지, 왜 무명 트로트 가수들은 여전히 반짝이 의상을 입고 무료 자선공연을 그리도 열심히 다니는지에 대해서도 읽는이로 하여금 추론의 여지를 제공해준다.
이 책의 구성은 시대순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트로트 80년 역사를 따라오며 이 음악장르가 시대에 따른 정치·사회·문화적 변화를 맞아 어떻게 살아남고 변신했는가를 되짚어볼 수 있다.
책을 읽고 나면 아마도 당신은 이런 의문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트로트는 과연 반계급적, 비정치적 음악이 맞나?'라고. 60년대 흐르는 머지강을 바라보며 고된 일상을 살던 영국의 노동자들은 비틀즈가 부르는 로큰롤(Rock & Roll)에 힘을 얻었다. 미국의 흑인들은 미시시피강 유역에서부터 전국으로 블루스(Blues)를 전파시켰고 이는 이후 리듬 앤 블루스(Rhythm & Blues), 솔(Soul)로 이어져 흑인들의 삶을 어루만졌다. 자메이카의 흑인들은 해방과 사랑의 메시지를 서정적이면서도 구슬픈 레게(Reggae) 음악에 담아 세계로 날려보냈다.
한국에서는? 30년대 일제의 통제하에 송출되던 라디오 방송에서, 50년대 전쟁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았던 부산항 어디메서, 60~70년대 개발독재시기 청계천변의 가발공장 한켠에서, 80년대 광주시내 한복판을 내달리던 택시 운전기사의 휘파람에서 트로트는 흘러나왔다. 서민들의 격동의 인생을 함께 내달렸던 트로트는 지금도 전국 고속도로 곳곳을 달리는 주름진 화물차량 운전자의 귓등을 간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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