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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와 잠·일·술 세대는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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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와 잠·일·술 세대는 만날 수 있을까?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노조운동, 시장독재 시대의 대안은?

쌍용자동차는 당사자 뿐 아니라 노동운동진영 전체에 치명적 상처가 됐다. 그저 월급봉투만을 생각하며 살아 온 평범한 정규직 노동자들이 77일 동안 죽을 힘을 다해 싸웠지만, 결과는 329명만을 살려낸 치욕스러운 패배였다. 심지어 최후까지 파업에 참여한 600여 명의 '생존권'도 노조는 지켜내지 못했다.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단지 이명박 정부의 무자비한 '노조 말살 정책'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이후 평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예사롭지 않다. 어제는 동료였지만 오늘은 "함께 살자"는 노동조합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심지어 몽둥이를 들었던, 이른바 '산자'들은 77일간의 파업 이후 민주노총 금속노조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비록 법원은 이들이 새로 선출한 노조 집행부의 효력을 문제 삼는 기존 집행부의 손을 들어줬지만, 73%라는 탈퇴 찬성율은 엄연한 현실이다.

정부와 회사 뿐만 아니라 내부의 '산자'들과도 싸워야만 했던 쌍용자동차의 사례는 오늘날 민주노조운동의 심각한 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소수의 투쟁대오' 대 '다수의 투쟁하지 않는 대오'라는 분열은 다수자 운동으로서 노동운동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는 조건준 금속노조 정책국장의 진단은 그런 맥락에 있다.

20년 넘게 노동운동 현장을 뛰어다닌 조건준 정책국장은 쌍용차 사태를 거치며 "'나만 살자'가 맹위를 떨치는 아픔이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도 평소에 '혼자 살기'만 하다가 정작 내가 다급해서 '함께 살자'고 했던 것은 아닐까 되새기게 된다"고 털어놨다.

쌍용자동차 투쟁이 한창이던 지난 7월, <아빠는 현금인출기가 아니야>(조건준 지음, 매일노동뉴스 펴냄)라는 책을 통해 88만원 세대에 이어 '잠·일·술 세대'라는 개념을 내놓고, 이 같은 '잠·일·술 세대'의 탄생은 "87년 이후 성공한 듯 보였던 노동운동의 실패를 의미한다"고 지적한 조건준 국장의 목소리는 노동운동 내에 어떤 울림을 가져올 수 있을까? (☞관련 기사 : "'잠·일·술 세대'는 늘 '공장 탈출'을 꿈꾼다")

쌍용차 사태가 마무리된 지 2개월이 흐른 지난 9일, 매일노동뉴스 주최로 열린 토론회 '잠일술 세대의 등장과 계급의 해체'에서 참석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노동운동의 길을 찾고 있었다.

"IMF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잠일술 세대'의 등장과 '노동자 계급'의 멸종"

▲ 20년 넘게 노동운동 현장을 뛰어다닌 조건준 금속노조 정책국장은 쌍용차 사태를 거치며 "'나만 살자'가 맹위를 떨치는 아픔이 계되고 있지만, 우리도 평소에 '혼자 살기'만 하다가 정작 내가 다급해서 '함께 살자'고 했던 것은 아닐까 되새기게 된다"고 털어놨다.ⓒ프레시안
"투쟁이 치열해질수록 연대보다는 확연한 '적대적 갈라섬'만이 강조됐던" 쌍용차 사태는 "노동운동이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받은 치명적 상처의 트라우마에서 헤매고 있어" 벌어진 일이라고 조 국장은 진단했다.

최근 15년 만에 이른바 조합원의 실질적 이득만을 강조하는 집행부가 들어선 현대자동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 국장은 "현대차의 최근 선거결과도 과거의 트라우마가 치유되기는 커녕 오히려 축적된 필연적 결과"라고 말했다.

모든 노동자가 '언제든 나도 갑자기 잘릴 수 있다'는 공포를 각인하게 만든 외환위기의 트라우마는 조 국장이 개념화한 '잠일술 세대'를 탄생시켰다. 잔업이든 특근이든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노동자의 강박은 "내가 못하게 된 특근을 5만 원에 옆의 동료에게 파는" 사태까지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노동자 계급'이라 이름 붙인 과거의 개념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노동조합의 골간인 조합원들이 "잔업·특근과 같은 자발적 노동을 경쟁적으로 하는 '현금인출기 인생'"을 살고 있으니, 노동조합 역시 '자판기 노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나눔과 연대라는 노동운동의 근본철학의 패배라기보다는, "'경제 살리기'라는 이데올로기와 '부자 되기 경쟁체제'를 강요하며 정리해고와 상시적 고용불안이라는 '생존에 대한 공포'를 유포하는" 시장독재의 승리였다.

"군사독재는 가고 시장독재가 왔지만 노동운동은 아직 20년 전 그 자리에"

시장독재는 과거 민주노조운동을 탄생시킨 이른바 '군사독재'와 엄연히 다르다. 문제는 "'반공과 안보'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군대라는 물리력을 수단으로 삼은 군사독재 시대"는 지나갔음에도 이에 맞서는 노동운동은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는 데 있다.

당연히 '원칙'과 '현실'은 엇박자를 낼 수밖에 없다. 김진억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국장은 "작업장에서는 머리띠를 묶는 노동자가 자기 삶으로 돌아가면 아이들 사교육 시키기에 바쁘고 노조가 올려준 임금으로 주식 투자 등 재테크를 한다"고 말했다.

이상호 금속노조 정책연구원 연구위원도 "상당히 많은 단위노조가 민주노총 등 상급조직을 도구로 사용하려 하고 조합원도 자기의 단기적 이익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노조를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니 정규직이 88만원 세대로 표현되는 비정규직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과 대립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현상이지만, 손정순 고려대학교 경제학 박사가 털어놓은 일화는 충격적이다.

"2007년에 한 대기업의 노조 대의원을 공장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인터뷰 중 마침 그 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해 생산라인이 서 버렸다. 그러자 그 대의원이 자기도 모르게 '에잇, XX. 왜 남의 공장에 와서 지랄들이야'라고 말했다. 산별노조로 전환한 지 1년이 지났음에도 직영 정규직의 그런 태도는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이런 위기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현재 노동운동이 내놓는 대안은 과거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프레시안

"현장으로 돌아가자? 산별노조 강화?…어느 것도 적절한 치료약 아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현재 노동운동이 내놓는 대안은 과거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상호 정책연구위원은 "민주노총 혁신 토론회에서 제일 많이 나온 대안이 '현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였다"며 "그런데 그 현장이 대체 어떤 곳이냐"고 되물었다.

조합원들은 모두 40~50대의 잠일술 세대가 되었고, 그 조합원 정서에 따라 노동조합 간부들이 먼저 같은 울타리 내의 비정규직을 외면하고 때로는 탄압하는, 그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녕 오늘날 민주노조운동의 대안이라 볼 수 있냐는 물음이다.

노동자 내부의 분화를 불러 온 현실을 보듬어 안고자 몇 년 전부터 치료약으로 각광을 받았던 '산별노조 운동'도 마찬가지다. 이날 토론회 참석자들은 미묘한 온도차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산별노조에 대해 회의적 평가를 내놓았다.

조건준 국장은 "산별노조라는 프레임이 과연 외환위기의 트라우마를 직접 치유할 수 있는 대안이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시장독재가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노동자의 위계화를 저지하고 이를 수평화, 통합화하려는 급진적 기획이 산별노조였지만 그 실행을 뒷받침할 무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조 국장은 "심지어 산별노조로의 통합 대신에 산별노조 안에서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갈등은 물론이고 중소사업장을 중심으로 한 지역지부와 대공장의 기업지부의 대립, 심지어 대공장끼리의 핑퐁게임만이 난무했다"고 덧붙였다. 김진억 서울본부 조직국장도 "지금의 산별노조 운동은 가망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잠일술 세대와 88만원 세대가 만나야 노동운동이 산다"

▲ 이들은 한 목소리로 핵심은 결국 틀이 아니라 내용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내용의 알맹이는 결국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잠일술 세대와 이들에 의해 또 한 번 억압당하고 있는 88만 원 세대가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였다.ⓒ프레시안
이들은 한 목소리로 핵심은 결국 틀이 아니라 내용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내용의 알맹이는 결국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잠일술 세대와 이들에 의해 또 한 번 억압당하고 있는 88만 원 세대가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였다.

이상호 정책연구위원은 "금속노조의 75~80%가 현대기아차 그룹 소속이며, 연봉 4000만 원 이상의 조합원이 90%에 육박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조직을 불리는 데만 급급한다면 금속노조가 20~30만이 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단순한 몸집 불리기가 아닌 비정규직 조직화는 민주노조운동 진영의 해묵은 숙제지만, 문제는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데 있다. 그래서 조건준 국장은 "노동조합에 대한 설계가 많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노동조합의 지역화'다. "생산라인과 공장이 아니라 지역 시민·사회와 사회적 연합의 힘을 통해 '삶 전체에 대한 투쟁을 하는 사회운동노조'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조 국장은 "예를 들면 노동조합 안에 '사회부'와 같은 것을 두고 지역사회와 부단한 나눔과 연대의 일상 활동을 촉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아직 이론과 실천이 부족하지만 지역 중심의 대안노조운동이 새로운 시대의 대안"이라고 얘기하는 김진억 국장이나 "조직 노동이 시민운동의 주변부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를 주도해서 만들어내야 한다"는 손정순 박사의 말도 비슷한 맥락이다.

잠일술 세대가 공장이라는 감옥을 벗어나 사회와 지역과 만나고, 그리고 마침내 군사독재보다 더 은밀하게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는 시장독재에 맞선 새로운 노동운동을 탄생시킬 수 있을까?

아직은 출발점에 있는 노동운동 내부의 이 같은 논의의 결론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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