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문 날치기, 손전등 날치기, 버스 날치기….
내년 기초의원 선거를 앞두고 전국 각 광역시도의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선거구 획정 과정에 기상천외한 날치기가 자행되고 있어 비난 여론이 급등하고 있다.
각 지역 선거구 획정위가 정치신인들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4인, 3인 선거구 등 중대선거구의 취지를 수용한 획정안을 내놓았지만, 각 광역시도 의회가 이를 2인 선거구로 칼질한 뒤 각종 편법과 날치기를 통해 속속 통과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날치기 포문 연 경북도의회, 첩보영화 방불케 한 대구시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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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경북도의회 본회의는 본회의장이 아니라 농정위 회의장에서 열렸다. 우리당과 민노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봉쇄한 탓에 한나라당 의원들이 농정위 회의장에 집결한 것. 이들은 10여분 만에 선거구 획정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당초 선거구 획정위에서 18개로 정했던 4인 선거구는 남김없이 쪼개져 경북지역 선거구는 총 60개로 늘었다.
다음 날인 24일 대구시의회에서는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 연출됐다. 손전등과 성동격서식 가짜 문자메시지가 소도구로 사용됐다. 전체 27명 가운데 22명을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 시의원들은 이날 새벽 5시 30분 시 공무원들이 출입하는 회의장 뒷문을 통해 본회의장으로 입장했다.
불을 켜면 의장실과 휴게실을 지키고 있는 타당 의원들에게 들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한나라당 의원들은 저마다 손전등을 들고 숨을 죽이며 회의장으로 모여들었다. 선거구 획정위가 만든 11개 4인 선거구를 모두 2인 선거구로 분할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불과 5분. 물론 제안 설명, 반대의견 청취는 없었다.
같은 시간 이들은 타당 의원들에게 '오전 6시부터 회의가 시작된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 '교란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경남도의회 '버스안 날치기'**
〈사진2〉
가장 압권이자 진화된 형태의 날치기는 28일 한나라당 경남도의원들이 보여줬다. 총 49명의 경남도의원 가운데 47명을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 의원들은 '버스안 날치기'라는 의정사상 초유의 행태를 연출했다.
이들은 도의회 주차장에 세워놓은 버스 안에서 본회의를 열어 선거구 획정위가 정한 11개의 4인 선거구를 쪼개는 수정안을 상정했고 남기청 부의장은 의회 현관문에서 의사봉을 두드리며 통과를 선언했다.
기상천외한 '버스 날치기' 사태 이후 민노당, 우리당 당직자들은 "본회의장 밖에서 회의를 여는 게 어디 있느냐"며 "이는 원천무효"라고 주장하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경남도의회 측은 "명문으로 된 규정이 없는 것으로 안다"며 "도의회 내에서 회의를 열면 되며 건물 앞 주차장도 의회"라는 유권해석을 내놓았다.
이에 앞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진종삼 경남도의회 의장은 "선거구 획정안과 관련해 한나라당 중앙당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며 "'경남 시·군 선거구 획정위원회'의 획정안은 참고자료였고 조례제정은 도의원의 권한"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 20일 역시 한나라당이 다수인 부산시의회 행정문화교육위원회가 쪼갠 선거구 수정안은 이에 앞선 15일 한나라당 부산시당이 자당 의원에게 팩스로 보낸 '선거구 획정 관련 건의사항'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부산에서만 벌어진 현상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대전, 여야 4당이 사이좋게 '선거구 쪼개기'**
한편 열린우리당-한나라당 등 거대 양당이 입맛에 맞게 선거구를 획정한 서울, 한나라당-우리당-국민중심당-민주당 4당이 힘을 모아 기습 통과 시킨 대전 등은 '선거구 쪼개기'가 각 당의 지역기반과 이해득실에 따라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날치기 방법이 동원되지 않았을 뿐 획정위의 안을 무시하고 입맛에 맞게 선거구를 분할한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단적인 예로 지난 27일 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당, 국민중심당 소속 대전시의회 의원들은 오전 9시 본회의를 열어 4인 선거구를 하나도 남겨놓지 않고 없앴다. 시의회 행자위에서는 선거구획정위 안을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던 우리당 의원들도 본회의장에서는 이런 조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황진산 시의회 의장은 앞서 민노당 간부와 시민단체 회원들을 만나 "4인 선거구 해당지역 시의원들로부터 의원정수를 수정해 달라는 요구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중대선거구가 소신이라 선거구 분할안이 올라오면 부결시킬 것"이라고 철석같이 약속했으나, 선거구를 분할하는 수정 조례안을 동료의원들과 함께 제출해 뒤통수를 쳤다.
이처럼 '동네마다 다른 당론'이라는 비판을 의식한 듯 열린우리당 서영교 부대변인은 한 당이 싹쓸이 하면 문제고 두 당이 나눠먹으면 문제가 없다는 독특한 논리를 펼쳤다. 그는 "영남을 빼고는 어느 한 당이 싹쓸이 하는 곳이 없는데 영남만 그렇다"며 "그것만은 인정해 달라"고 덧붙였다.
김부겸 수석부대표는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서울시의회 등에서 보여준 우리당의 협조 내지 묵인과 관련해 "물론 일부 그런 곳도 있고 나 자신이 그런 행태는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면서도 "근데 지금 손전등이다 버스치기다 하며 한나라당이 보이는 행태는 선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라고 분리했다.
***우리당 "2월 국회서 정상화하겠다" 공언은 했지만…**
열린우리당이 이처럼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2월 임시국회에서 지방의회에 맡긴 선거구 획정 작업을 다시 중앙선관위 권한으로 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한 대목은 주목된다.
정세균 의장은 29일 의총에서 "한나라당의 문화나 행태를 보면 자정능력이 전혀 없다"며 "진상조사단을 결성해 우리가 낱낱이 조사해 자신들이 스스로 교정하게 하든지 그것도 안 되면 2월 국회에서 이 문제를 정식으로 다루자"고 말해 즉석에서 진상조사단 구성 결의를 이끌어 냈다.
민주노동당도 이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다. 하지만 당장 5월 지방선거에 적용될 수 있는 '정상화'가 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김부겸 수석부대표는 "지금 그 문제가 소급 입법이 되는지 아니면 (내년 5월 선거부터) 효력이 발생하는지 중앙선관위에 유권해석을 의뢰한 상황"이라며 "그 해석을 받아봐야 한다"고 확언을 못했다.
한편 한나라당은 이 문제에 대해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연일 국회브리핑 룸을 찾아 다양한 논평을 쏟아놓고 있는 이계진 한나라당 대변인도 이 문제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었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이거 해도 해도 너무 한 것 아니냐? 당내에서는 이야기가 없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것(선거구 쪼개기)은 중앙당에서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짤막한 답만 남기고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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