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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의 야심, 그러나 미완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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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의 야심, 그러나 미완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

[뷰포인트] <불꽃처럼 나비처럼> 리뷰

(*이 글은 영화진흥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지 <CINO>에서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장르영화의 대가급으로 불렸던 하워드 혹스는 이렇게 말했다. '잘 만든 영화는 훌륭한 장면이 세 장면 들어 있고 잘못된 장면은 하나도 없는 영화다." 혹스의 말이 꼭 금과옥조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얘기를 빌어 얘기하면 김용균의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자칫 그 반대가 될 뻔 했던 영화다. 곧, 잘못된 장면은 세 장면 들어 있고 휼륭한 장면은 하나도 없는, 그래서 이른바 '못 만든 영화'가 될 뻔 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잘못된 장면만큼 훌륭한 장면도 적지 않은 영화다. 그래서 다소 호오가 엇갈리는 영화가 됐다.

▲ 불꽃처럼 나비처럼

예컨대 좋은 장면은 이런 것이다. 일본 낭인들이 곧 밀어닥치는 급박한 상황에서 중전 민비, 곧 민자영(수애)은 단호한 표정으로 마음의 연인 무명(조승우)를 맞는다. 민비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말한다. "장군은 바보요. 나로 하여 당신을 따라 도망가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궁을 버리고 도망치는 나를 보고 그 어떤 백성이 나라를 지키려 하겠어요." 그러자 무명이 외친다. "이 판국에 나라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그리고 한걸음 가깝게 왕비앞에 다가선 무명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무명은 이렇게 속삭인다. "느껴지는군요. 당신의 두려움이." 아무리 거대담론이 오간다 한들, 그리고 분위기가 비상시국이라 한들, 두 사람의 대화는 밀어에 가깝다. 이 정도면 가슴이 뭉클, 사랑하는 연인들을 뜨겁게 달구는 대화다. 나라고 뭐고, 정치고 뭐고, 애국이고 뭐고, 사실은 한 여자(혹은 남자)를 지키려는 지고지순한 사랑부터가 맞다. 시작은 그것부터다. 구체적인 무엇이 추상적인 무엇을 실현시킨다. 구체성의 변증법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영화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악수를 둔다. 그렇게 중전의 방을 나온 무명이 간 곳은 상궁이 있는 곳이다. 상궁은 중전이 무명 장군을 위해 지은 것이라며 갑옷을 내어 준다. 한시가 급해 죽겠는데 영화는 여기서 왜 한박자 뜸을 들이는 것일까. 이야기 구축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온 김용균은 이번 영화에서 이상하게도 자꾸 헛발질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워낙 거대한 얘기다. 그 회오리 역사의 소용돌이를 압축시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민비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개방세력과 대원군을 축으로 하는 수구보수파. 그리고 거기에 붙었던 친러와 친일의 일파들. 아관파천에 임오군란에, 줄줄이 이어지는 갖가지 정변에 이르기까지를 두시간 안으로 쥐어 짜기가 도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큰 이야기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앞으로 잘 나아가지 못하는 형국을 보여준다. 큰 우주(한국근대사)를 통해 작은 우주(러브 스토리)를 보여 주고자 하는 전형적인 우를 범한 셈이다. 영화는 작은 우주를 통해 큰 우주를 보여주려 할 때 이야기를 착착 이어가기가 쉬워진다. 그럴 때에만이 심각한 사회정치의식조차 부담없이 즐길 수 있게 한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이야기의 구축을 반대로 생각했어야 옳았다. 아니면 생각은 정작 그렇게 했는데 실제로는 진행이 안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 불꽃처럼 나비처럼

그런 징후는 조승우의 캐릭터 만들기에 실패한 것에 따른 것에서도 나타난다. 조승우의 캐릭터는, 아무리 평민 출신이더라도, 무게감있는 무사의 이미지였으면 훨씬 좋았을 법 싶다. 왜 무명은 종종 촐싹댈까. 그것이 아무리 의도된 가벼움이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여인을 끝까지 지키려는 한 남자의 비장한 마음과는 충돌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극이 시작하고 한참이 지나도록 이어지는 초반부의 러브 라인은, 조승우의 그런 캐릭터 때문에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민망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는 중반이 넘어서면서 생동감과 박진감이 넘친다. 한 나라의 왕비를 일개 깡패들이 잔인하게 살해하는 그 야만의 역사가 주는 중압감이 극장안을 장악한다. 역사가 얼마나 야만스러울 수 있음을, 야만이 얼마나 역사적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데 있어 김용균의 연출은 모자람이 없다. 충분한 역사적 분노와 그에 따른 감동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다. 영화가 특정 장면에 '베팅'을 하는 건 기획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영화제목처럼 확 타오르는 느낌은 확실하지만 균질감은 떨어지는 작품이다.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시종일관 타이트하게 관객을 잡지 못한다. 그래서 웬지 미완성의 느낌을 준다. 마치 끝내 실현되지 못했던 개혁의 왕비 민비의 이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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