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 인근의 속칭 '인쇄골'(서울 중구 인현동 2가) 한 귀퉁이에 위치한 '성진애드컴'은 1년 내내 노사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20일 이 회사 노동조합 조합원들은 급기야 회사 건물 전체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노조 무풍지대 충무로 '인쇄골'에선 보기 드문 '점거농성'**
3만~4만 명의 인쇄노동자들이 이 골목에서 일하고 있지만, 노조 조합원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할 정도로 '노조 무풍지대'인 이 동네에서 보기 드문 '점거농성'이 벌어진 것이다.
성진애드컴은 지난 1998년에 설립됐다. 설립 초부터 인터넷을 활용해 전국을 대상으로 주문을 받아 인쇄물을 만들어 공급하는 사업방식으로 이 골목에서는 꽤나 이름을 날리고 있는 업체다. 노조에 따르면, 하루 매출액만 해도 2500만 원 정도 된다고 한다.
출고, 접수, 경리 등으로 나눠진 각 부서의 인원을 모두 합치면 전체 직원수는 70~80명 수준이다. 임금은 평균 월 120만~130만 원 정도. 근무시간은 부서별로 다르지만 대략 8시간을 조금 넘는 편이다. 노동조건이 대기업에 비해서는 상당히 열악하지만, 다른 중소업체들과 비교하면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볼 수 있다.
***"욕설을 듣고 있자니 얼굴이 붉어지더라"**
하지만 노조가 이날 점거농성에 돌입한 것에서도 보듯 성진애드컴의 노사관계는 원만치 못하다. 지난해 5월 말 노조가 설립된 시점을 전후해 서로 부딪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노조를 만들게 된 동기도, 이번에 노조가 점거에 들어가게 된 계기도 회사가 직원을 '인간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진훈 노조 위원장을 비롯해 다수 노조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이 노조를 설립하게 된 이유는 사측의 비인간적인 노무관리에 있다. 특히 이 회사 사장인 김정호 씨의 아들이기도 한 김모(31) 이사의 태도는 모두에게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김 이사는 평소에 직원들에게 '이 새끼, 저 새끼'하고 욕설을 포함한 막말을 빈번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다른 곳에서 화난 일이 있으면 직원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네가 전라도 출신인 거 알았다면 뽑지도 않았다", "전라도 깽깽이는 앞으로 절대로 뽑지 마라"는 등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한 조합원은 "손님들이 다 보는 곳에서 욕설을 듣고 있으면 얼굴이 붉어졌다"며 "손님들도 김 이사의 행동을 보면서 고개를 젓고는 했다"고 말했다.
김 이사에게 숨죽여 지내던 성진애드컴 직원들이 노조를 만들게 된 결정적 사건은 지난해 4월에 발생했다. 김 이사가 회사 컴퓨터로 '인터넷 게임'을 한 사람을 찾아내겠다며 회사 내의 모든 컴퓨터를 다 뒤지고 나섰고, 결국 한 명이 지목돼 징계를 받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진훈 위원장은 "지목 당한 사람은 내 바로 옆 자리 친구였는데,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너무나 분한 나머지 그 친구와 함께 관두기로 하고 가방을 싸고 회사를 나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 뒤 이 위원장은 마음을 바꿔 다시 회사로 들어가 노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발길을 돌린 이유는 그냥 소리 없이 떠나면 본인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밀리에 시작된 노조설립 준비는 직원들에게 큰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해 5월 노조를 설립하던 당시의 전체 직원 70여 명 가운데 21명이 노조에 가입했다.
***CCTV 카메라에 녹음마이크까지 설치**
노조가 만들어진 뒤 회사에서는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초 경리직원 뒤에 한 대만 설치됐던 CCTV 카메라가 지난해 8월부터 하나 둘 늘어나더니 모두 21개에 이르게 됐다. 이날 점거농성을 시작한 뒤에 발견됐지만, CCTV 카메라 바로 옆에는 녹음마이크까지 설치돼 있었다.
이진훈 노조 위원장은 "그동안에도 회사가 우리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은 있었지만 이렇게 녹음마이크가 설치됐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며 "1년여 동안 회사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조는 CCTV 카메라에 테이프를 붙이거나 페인트를 칠하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회사는 이를 '재물손괴'로 규정하고 사법당국에 형사고발했다. 노조도 굽히지 않고 '인권침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지난 6월경 진정을 제기하고 나섰다. 현재 사측의 형사고발은 기각됐고, 노조의 인권위 진정은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보건휴가 쓰려면 '월경 증명서'를 떼어 오라고 했다"**
노조는 또하나 놀라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회사에서 여성 노동자에게 매월 하루씩 보장되는 보건휴가를 사용하려면 '월경 증명서'를 제출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보건휴가가 보장된 것도 노조가 만들어지고 난 뒤부터였지만, '월경 증명서'를 떼오라는 공문(회사는 공문을 통해 증명서를 요구했다)을 받았을 때는 그야말로 "황당했다"고 조합원들은 말한다.
이진훈 위원장은 "산부인과에 가면 증명서를 발급해준다고 해서 알아봤더니, 한 산부인과 의사는 '의사 생활 30년 만에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며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고 말했다. 보건휴가를 사용하려면 증명서를 떼어오라고 요구하는 사업장은 매우 드문 게 사실이다.
***"1년 남짓 싸웠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현재 이 회사 노조원은 불과 6명이다. 당초 21명이던 노조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퇴사를 했고, 1명은 해고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난달부터 회사 앞에 천막을 쳤다. 그 뒤 이진훈 위원장과 노조원들은 이 천막에서 먹고 자며 사측에 단협 체결을 요구했다.
임단협이 시작된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고 험난해 보인다. 그동안 파업도 하고 상급단체의 힘을 빌어 압박도 해봤지만, 돌아온 것은 "노조는 백해무익"이라는 사장의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이진훈 위원장은 점거농성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른다고 했다. 파업이나 천막농성 등은 합법적 쟁의행위에 속하지만, 점거 자체는 업무방해의 소지가 있어 실정법을 위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사측에서 경찰에 병력 투입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자가 이지훈 위원장과의 인터뷰를 마친 저녁 6시께, 건물 옥상에서 하루종일 이런저런 구호를 외치던 조합원들이 사무실로 돌아와 허겁지겁 초코파이를 나눠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