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을 찾는 여행자는 딱 둘 중 하나라고 봐도 좋다. 리버풀 FC의 팬이거나, 비틀즈의 열렬한 팬이거나. 그러다보니 비틀즈 투어라는 게 따로 존재한다. 리버풀 시내의 매튜 스트리트에 있는 캐번 클럽에서 초기 비틀즈가 공연했던 흔적을 찾는 걸 비롯해서, 머지 강가에 있는 비틀즈 박물관도 들르고, 교외로 나가 페니 레인과 스트로베리 필즈 등을 돌아보는 코스가 있다. 폴 매카트니와 존 레넌의 생가를 둘러 보는 코스도 있다.
▲비틀즈, 새로운 클래식. ⓒApple Corps Ltd. |
2009년 7월. 스트로베리 필즈, 리버풀
하지만 투어 상품을 사지는 않았다. 어느 여행이든지, 투어를 하게 되면 그건 '나만의 여행'이 아니게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직접 발품을 팔며 좀 헤매기도 해야 여행답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버스를 탔다. 시내버스 중 딱 한 노선이 스트로베리 필즈로 간다고 했다. 좁디 좁은, 그래서 걸어서 20분이면 가로지를 수 있는 시내에 비해 존 레넌이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는 한참이나 가야했다. 어느 한적한 길에 이르러, 운전 기사가 여기서 내리라고 했다. 나와 어떤 중년의 백인 여성, 단 둘이 그곳에서 내렸다. 여기가 그 유명한 비틀즈의 명소란 말인가 싶을 정도로, 동네는 고요했다. 비틀즈 기념품을 파는 가게는 고사하고, 생수 한 병 살 수 있는 가게조차 없었다. 함께 내린 아주머니 역시 관광객임에 분명했다. 물었다. "스트로베리로 가시나요?" 아주머니는 그렇다며, 하지만 정확히 스트로베리가 어딘지는 모른다고 했다. 나는 복사해온 지도를 펼치며 이리로 가면 된다고, 반갑게 말했다.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낯선 곳에 갓 도착한 여행자의 얼굴에 나타나기 마련인, 약간의 두려움이 가신 건 바로 그 때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역방향으로 20미터쯤을 걸어가 좌회전 했다. 좁은 오르막 길이 나왔다. 그 길을 약 100미터 쯤 올랐다. 오른쪽을 봤다. 화강암 석주와 초록색 대문. 그 안에 나무와 풀이 아무렇게나 우거진 빈 뜰이 놓여 있었다. 왼쪽 석주에 씌여 있었다. 'Strawberry Fields'. 비틀즈의 <Magical Mystery Tour>에 담긴 'Strawberry Fields Forever'의 모델이 된 바로 그 장소다. 비틀즈의 흔적이 묻어 있는 수많은 장소 중 이곳에 가장 먼저 온 이유도 'Strawberry Fields Forever'를 가장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1967년 1월 폴 메카트니가 만든 'Penny Lane'과 함께 싱글로 발매되었다가 그 후 <Magical Mystery Tour>미국 발매반에 다시 실렸다. 존 레넌이 이 노래를 만들었을 당시, 그는 매우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럴만도 했다. 첫 아내 신시아와의 결혼은 파경을 맞았다. 그 유명한 "비틀즈는 예수보다 위대하다"는 발언 때문에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골수 기독교 신자들이 비틀즈의 모든 음반을 쌓아놓고 불태우는 분서갱유까지 벌였다.
비틀즈라는 명성은 아무에게나 속마음을 드러낼 자유를 빼앗아간지 오래였다. 그가 도피할 곳은 어린 시절 밖에 없었다. 리버풀 교외에서 미미 이모 내외와 살면서 엘비스 프레슬리, 척 베리에 열광하던 꼬마 시절. 그 때 존 레넌의 마음을 가장 설레게 했던 장소가 스트로베리 필즈였다. 그의 생가에서 걸어서 5분이 채 안 걸리는 이 공터는 원래 구세군병원이 있던 자리다. 존 레넌이 꼬마였을 때, 매년 여름이 되면 구세군악단은 이 곳에서 공연을 벌이곤 했고 그 때 마다 존 레넌은 미미 이모의 손을 잡고 이 공연을 보러 왔다. 공연이 없을 때도 스트로베리 필즈는 존과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그립지만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에 대한 회상을, 노래는 오롯이 표현한다.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꿈을 꾸는 듯 나른하게 노래하는 존의 목소리에 실린 멜로디의 높낮이 폭은 그리 넓지 않다. 기타와 베이스, 드럼이라는 기본 편성의 흐름도 탁월하지만 폴 매카트니가 연주하는 멜로트론,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 편곡한 첼로와 트럼펫의 조화는 이 노래의 목가적 아름다움을 극상으로 끌어올리는 장치다. '드라마틱'이란 단어의 일반적인 뉘앙스에서는 벗어나있지만 그 어떤 노래보다 드라마틱하고 전체적인 구성은 크게 보아 단조롭지만 그 안에는 들을 때마다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의외의 요소들이 가득하다. 비틀즈의 노래들 중 어느 노래가 그렇지 않겠냐만, 'Strawberry Fields Forever'야말로 그런 면에서는 몇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명곡이다. 신비한 아름다움이랄까, 몽환적 낭만이랄까, 쓸쓸한 기쁨이랄까.
그 외에도 이 노래를 들으며 떠올릴 수 있는 문구들은 너무나도 많다. 때로는 이 노래를 들으며 뭔가 말하고 싶어지지만, 다만 먹먹해질 때조차 있다. 음악 애호가들이 모이는 술집에서 이 노래가 나오면 누구나 이 노래의 가사를 흥얼거리며 따라하게 되고 그 흥얼거림이 모여 합창 비슷한 게 된다. 그 순간 이 노래는 연민과 환희가 기묘하게 교차하는, 기묘한 합창곡이 된다. 나는 그런 경험을 몇 번이나 했다. 'Strawberry Fields Forever'는 그런 노래다. 그런 노래의 토대가 된 장소에 와 있는 것이다. 역시 비틀즈 때문에 리버풀을 찾은, 백인 아주머니와 함께.
아주머니의 이름은 마리안. 미국 오하이오에서 왔다고 했다. 흔히 유럽에서 만나게 되는 미국인들은 뭔가 거만하고 불친절하다고 들었는데, 마리안 아주머니는 뭐랄까, 씩씩하면서도 친절한 인상이었다. 스트로베리 필즈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며, 마리안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눴다.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는 그녀는 평생 비틀즈의 열렬한 팬이었고 비록 비틀즈의 공연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의 솔로 공연은 모두 봤다고 했다. 존 레넌의 공연을 직접 보지 못한 게 일생의 가장 아쉬운 일이라던 그녀가 하필이면 지금 리버풀을 찾은 건 "9월 9일이 오기 전에 비틀즈의 자취를 밟아 보기 위해서"였다.
▲2009년 9월 9일 오전, 광화문 핫트랙스로 내려가는 길에는 '그들'이 있었다. 우리 모두는 (알든 모르든) 비틀마니아다. 팝음악을 듣는 한. ⓒ프레시안 최형락 |
2009년 9월 9일 9시 9분 9초. 광화문, 서울
2009년 9월 9일은 비틀즈 마니아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날이다. 지난 4월 비틀즈 측에 의해 공식적으로 '비틀즈의 모든 음반들이 디지털 리마스링되어 9월 9일을 기해 발매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음반은 크게 레코딩과 믹싱, 마스터링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노래와 연주를 마이크를 통해 녹음하는 과정이 레코딩이다. 믹싱은 따로 녹음된 노래와 연주를 잘 섞어서 밸런스를 맞추고 듣기 좋게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마스터링은 이렇게 만들어진 음원의 위치를 보정하고 최종적으로 소리들을 다듬는 과정이다. 음향 기술이 발전하면서 믹싱과 마스터링 기술 또한 계속 발전했다. 옛날에 녹음된 음악보다 지금 녹음된 음악의 소리가 좋은 건 그 때문이다. 밥 딜런, 롤링 스톤즈 같은 대가들의 음악이나 명반이라 일컬어지는 대부분의 음반들은 발매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보통 새롭게 다시 마스터링을 걸쳐 동시대에 어울리는 소리로 태어나게 된다.
비틀즈의 음원은 오랫동안 다듬어지지 않았다. 1987년 그들의 음반이 CD로 발매되면서 프로듀서 조지 마틴의 지휘 아래 마스터링 과정을 거쳤고, 그 후로 지금까지 대부분의 음원이 줄곧 그대로다. CD가 80년대 초반 보급되기 시작했으니 다른 뮤지션에 비해 CD화 작업도 늦은 셈이었고, 2000년대 들어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통한 음반 복원 작업이 보편화됐지만 비틀즈는 줄곧 1987년 음원으로 옛, 혹은 새로운 청취자들을 만나온 셈이다.
그러나 비틀즈에게 있어 시점이란 건 다만 숫자의 문제일 뿐이다. 1987년 비틀즈의 음반이 CD로 발매되면서 CD는 LP가 차지하던 음반 시장의 비율을 급속도로 갉아먹었고, 결국 가장 보편적인 음원저장매체의 자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미 디지털 리마스터링이 더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지금, 비틀즈의 음반이 디지털 리마스터링되어 재발매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마치 이것이 최첨단의 기술인양 세계 음악 시장과 언론이 들썩인 것도 비틀즈라는 이름의 가치를 말해주는 게 아닐까. 비유하자면 애플이 아무리 신기술을 내놔도 마이크로소프트의 소프트웨어가 세계 시장의 표준이 되는 현상과 비슷하다. 이는 전체 음악 시장에서 가요와 팝의 비중이 9:1이라는 기형적 구조를 보이는 한국에서조차 9월 9일 각 공중파의 TV뉴스에서 비틀즈 재발매가 기사화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9월 9일 9시 9분을 기해 세계 동시발매된 이 앨범을 사기 위해 서울의 대형 음반가게에는 이른 시간 부터 200여명의 팬들이 줄을 서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중년의 올드 팬부터 갓 스물을 넘긴 새로운 팬들까지, 과연 비틀즈앞에는 세대가 없었다. 사전 예약으로만 5만장이 판매될 정도로 새로운 비틀즈를 기다리는 이들이, 국내에도 많았다는 얘기다.
그렇게 공개된 비틀즈의 '새 소리'는 두가지 버전으로 나뉘어 있다. <Please Please Me>부터 <Beatles For Sale>까지 초기 넉 장 모노 앨범을 포함, 전작이 스테레오 믹싱으로 리마스터링된 버전이 하나다. 그리고 역시 <Please Please Me>부터 '화이트 앨범'이라 불리는 <The Beatles>까지의 앨범의 모노 믹싱을 살린 모노 버전이 또 하나다. 박스 세트와 낱장으로 발매된 전자가 1960년대에 녹음된 비틀즈 음원의 현대적 해석이자 21세기에 21세기적 모습으로 부활한 비틀즈를 만나는 일이라면, 박스 세트로만 제작된 모노 버전은 1960년대로 돌아가 비틀즈의 원류를 느껴보는 체험을 하게 한다. 전자가 복원이라면 후자는 발굴인 셈이다. 이 작업을 위해 비틀즈의 대부분 음원이 녹음된, 그 이유만으로 런던의 관광명소가 된 애비 로드 스튜디오의 엔지니어들이 4년을 오롯이 매달렸다.
그 결과는 오랜 팬과 새로운 팬의 기호를 모두 만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비틀즈의 첫 앨범 <Please Please Me>의 첫 곡, 'I Saw Her Standing There'의 스테레오 버전을 들었을 때 살짝 소름이 돋았다. 양쪽에서 쏟아져나오는 기타와 베이스, 드럼의 홍수. 패기롭게 불러제끼는 노래와 어우러져 지금껏 듣던 이 노래에 드리워 있던 시간의 베일이 걷어졌다. 그 자리에는 리버풀에서 갓 상경한 약관의 청년들이 호기롭게 서있다. 저 유명한 'Yesterday'의 현악 연주는 어떤가. 기존의 음원이 1열 종대로 연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면 새로 탄생한 이 노래에서의 연주는 횡대로 늘어서 입체감을 얻는다. 'Strawberry Fields Forever'의 첼로는 활 긁히는 소리가, 트럼펫은 연주자의 날 숨이 들릴 정도다. 모든 노래의 달라진, 격상된 소리는 일일히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긴 말이 필요 없다. 이 작업에 대해 "멋지다거나 선연하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다. 리얼함이다. 우리들이 만든 소리 그 자체다. 존이 바로 옆에 있는 것 같다"라고 한 폴 매카트니의 언급이면 충분하다. 그저 감동하고 또 감동할 뿐이다. 분석과 평가라는 업을 잠시 잊은 채, 다만 듣고 또 들을 뿐이다. 그리고 깨닫는다. 비틀즈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수많은 밴드들이 비틀즈보다 우월했던 건, 그저 사운드였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장인들의 노력과 첨단의 기술이 만나 이제 그 사운드마저 '지금의 것'으로 끌어 올려졌다. 음악에 있어 하나의 준거점이 리뉴얼된 것이다. 비틀즈를 따라잡고자 노력했던, 또한 노력하고 있는 수많은 뮤지션들의 탄성이 들리는 듯하다. 과연, 달리 비틀즈가 아닌 것이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그들을 슈베르트나 쇼팽에 비교했다. 그런 클래식 거장들의 길을 비틀즈도 가고 있다. 슈베르트와 쇼팽이 시대에 맞게 해석되고 연주되듯, 시대에 맞는 음원으로 계속 재탄생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떤 뮤지션들도 누릴 수 없는, 압도적인 관심과 애정과 함께.
▲새로운 비틀즈. 한국도 들끓었다. ⓒ프레시안 최형락 |
우리는 모두 비틀마니아
비틀즈의 재탄생과 함께 국내 출시된 서적 하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컴플리트 비틀즈 크로니클>, 해석하자면 '완전판 비틀즈 연대기'랄까. 이름에 걸맞는다. 세계적 비틀즈 연구가인 마크 루이슨이 쓴 이 책은, 말하자면 실록이다. 비틀즈라는 왕조의 공식실록. 1957년 존 레넌이 친구들과 함께 쿼리멘이라는 밴드를 결성한 시점부터 1970년 비틀즈 해체 직후까지 모든 기록의 집대성이다.
한 명이 비틀즈의 모든 공연과 녹음 일정, 그리고 방송 출연을 모두 수집하는 것도 놀랍지만 단순히 딱딱한 숫자와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이를 토대로 이야기를 엮어나가며 써내려가는, 그야말로 연대기를 구성하는 능력은 더욱 치밀하다. 비틀즈 입문자에게는 이야기를, 마니아에게는 확고 부동한 정보를 주는 양수겸장의 서적이다. 국내반에는 각 챕터마다 각계 각층의 비틀즈 애호가들이 쓴 짧은 글이 붙어 있다. 아마 소설가 김훈과 시인 김경주, 시나리오 작가 심산과 경제학자 우석훈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는 책은 정말 드물지 않을까. 그 드문 일을 가능케 하는 것도 다름아닌 비틀즈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비틀즈를 찬찬히 한 장 한 장 다시 듣고 있자니, 다시 리버풀이 떠오른다. 스트로베리 필즈가. 그 뒤를 이어 갔던 존 레넌의 생가와 폴 매카트니의 생가, 그리고 페니 레인이. 존의 집에서 폴의 집으로 가는 동안 운좋게 얻어탄 투어 버스안에서 흘러나오던 'Something' 'In My Life' 같은 비틀즈의 노래들이. 그 노래들을 들을 때 마다 왠지 모르게 촉촉해졌던 눈가가. 페니 레인 앞에서 헤어지며 'We Are Good Team'이라며 엄지 손가락을 들며 짓던 마리안 아줌마의 미소가. 마리안 아줌마도 지금 새로운 비틀즈를 만나고 있을테지. 최소 수억 명의 인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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