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정이 빼곡하게 적힌 수첩, 나도 모르게 촬영된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등골이 오싹했고 온몸이 발가벗겨지는 느낌을 당했다."
"사죄 없는 기무사, 2차 가해 저질렀다"
2일 오전 국가인권위원회 7층 조사과 앞에 모인 13명이 한 목소리로 쏟아낸 말이다. 이들이 인권위에 요구한 것은 국군 기무사령부에 대한 조사다. 이들 가운데 군인은 아무도 없었다. 재일 민족학교 어린이 그림책 보내기 운동을 하는 인터넷 카페 '뜨겁습니다' 회원인 작가, 출판인, 시민들이 다수였다. 이 운동은 서울시가 후원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기무사가 자신들을 사찰해 왔다고 주장했다. 기무사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상을 느낄 정도라고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기무사의 불법 행위로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됐지만, 기무사는 사죄와 재발방지 약속은 하지 않고 사찰이 '합법적 활동'이라고 해명해 2차 가해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날 기무사 소속 신 모 대위의 수첩과 동영상 자료CD 등을 진정서와 함께 인권위에 제출했다.
군 수사기관인 기무사는 민간인 사찰이 엄격하게 제한돼 있다. 기무사의 전신인 국군 보안사령부(보안사)가 민간인을 광범위하게 사찰한 사실이 1990년 2월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드러났고, 법원은 1998년 7월 이를 불법 행위로 확정판결했다.
1990년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 2009년 이정희 의원의 폭로
기무사가 지금도 민간인을 불법사찰하고 있다는 주장은 정치권에서 먼저 나왔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은 지난달 12일 기무사 신 모 대위의 수첩과 동영상 테이프 등을 제시하며 민간인 사찰 의혹을 제기했다. 이 의원에 따르면, 신 대위의 수첩 등은 쌍용차 관련 집회가 열렸던 평택역 광장에서 입수한 것이다.
이어 이 의원과 원혜영 민주당 의원은 지난 1일 국회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기무사가 재일교포 어린이에게 책 보내기 운동을 하고 있는 인터넷 동호회 회원들에 대한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는 군사정권 시절 민간인 불법사찰로 악명이 높았다. 그 실체가 드러난 계기는 1990년 2월 당시 보안사에서 이병으로 근무하던 윤석양 씨의 양심선언이다. 당시 윤 이병은 보안사가 정치계·노동계·종교계·재야 등 각계 주요 인사와 시민 1303명을 상대로 불법 정치사찰을 벌였다고 밝혔다.
보안사 사찰 대상자 목록에 포함돼 있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한승헌 변호사 등 145명은 1991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소송에서 재판부는 "개인의 사생활과 비밀 및 자유에 대한 제한은 국가안전보장 등의 목적 내에서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고 보안사는 군사 기밀과 관련한 사항에 대해서만 사찰해야 하는데도 보안사가 군과 무관한 정치인·교수·종교인·언론인을 부당한 방법으로 사찰한 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 행위"라고 판시했다.
그리고 법원은 1998년 7월 보안사가 헌법상의 사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 점을 인정하여 원고들에게 각각 200만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확정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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