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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정치'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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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정치'의 빛과 그림자

[손호철 칼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내며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 글을 쓴 지 얼마 되지 않는데 이번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우리를 떠났습니다. 진심으로 김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사실 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된 저의 대학생활과 청춘은 70, 80년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김 전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이 점에서 그를 보내는 마음은 저의 청춘을 멀리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느낌입니다.

대학 2학년 때인 1971년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와 운명의 대통령 선거를 치렀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이 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선거감시단을 조직했는데 저 역시 이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목격한 부정선거에 분노하여 선거감시단의 대표로 야당인 신민당사를 방문해 박정희 정권이 부정선거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국회의원 선거를 보이코트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신민당 지도부와 이루어진 우리들의 면담을 신민당사 난입 점거사건으로 몰고 가 저희들을 국회의원 선거법, 정당법 위반 등으로 구속해 기소했습니다. 덕분에 미성년자(대학 2학년이지만 학교를 일찍 들어가 미성년자였다)로 감옥신세를 져야했고 김 전 대통령 때문에 감옥을 간 첫 희생자가 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이후에도 저는 김 전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그리고 동양통신(현 연합뉴스)기자시절 전두환 일당의 김대중 구속과 광주학살에 저항해 제작거부 운동을 벌이다 언론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떠난 미국 유학시절인 80년대에도 그에 대한 저의 지지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87년 6월항쟁에 의해 어렵게 획득한 직선제 앞에서 양김이 분열해 노태우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민주화운동진영이 서로 증오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그에 대한 지지를 거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92년 대선패배 후 정계를 떠났던 그가 95년 정계복귀를 하면서 다시 한 번 분열주의적 행태로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깨고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어(노무현 전 대통령, 김원기 전 국회의장 등은 이에 따라가지 않고 소위 '통추'를 만들어 3김정치에 저항했습니다) 사당정치를 펴가는 것을 보면서 <3김을 넘어서>라는 정치평론집 등을 통해 3김정치를 비판했습니다.

또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 공동의장으로 남북정상회담 등에는 전적인 지지를 보내면서도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한전 해외매각과 같은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정책에 대한 반대투쟁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이 같은 인연 때문에 그를 보내는 저의 마음은 각별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인연을 넘어 그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진보적 정치학자'로서 'DJ 정치의 빛과 그림자'를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이 면에 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글("노무현, 그 이후", 2009년 5월 25일)에서 노 전 대통령을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평가와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평가로 나누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자의 핵심이 '바보 노무현'으로 표현되는 지역주의 등 기득권 질서에 대한 도전정신이라면 후자의 핵심은 탈사당정치, 대통령의 탈권위주의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역시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평가와 '대통령 김대중'에 대한 평가로 나뉘어야 합니다.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평가의 핵심은 반독재 민주화투쟁입니다. 60년대 말 이후, 특히 71년 대통령선거 이후 김 전 대통령은 어느 대중정치인보다 치열하게, 그리고 일관성 있게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 왔습니다. 그가 겪어야 했던 탄압과 고난이 이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를 빼놓고 한국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당연한 사실이기에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하나 첨가한다면, '정치인 김대중'의 또 다른 중요한 기여는 유신세력인 김종필과의 연대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고 이인제의 경선불복종, 선거 직전에 터져 나온 IMF 위기 등에 빚을 진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정권교체를 이루어 불가능할 것 같았던 '호남대통령'을 가능하게 만든 것입니다(이 점에서 초등학교 출신의 룰라 브라질 대통령, 대학을 나오지 않은 노무현 전 대통령, 그리고 아프리카계 출신의 오바마 대통령의 최고의 업적이 사회적 편견을 깬 당선 그 자체이듯이 김 전 대통령의 최대의 업적은 당선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대통령 김대중'의 최대의 공은 남북정상회담과 화해협력적인 남북관계의 수립입니다. 누가 우리들이 휴전선을 넘어 금강산 관광을 가고 개성에 우리 기업 공단이 생길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외환위기 극복도 김전대통령의 큰 업적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 상황에서 집권을 해 경제위기를 빠른 시간에 극복했습니다. 나아가 복지프로그램을 확대해 복지국가로의 초석을 놓은 것도 큰 공입니다.

그러나 'DJ 정치'가 빛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선 '정치인 김대중'은 87년 분열과 95년 분열 등을 통해 민주화운동에 깊은 상처와 반목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노벨평화상과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반민주적인 사당정치와 3김정치로 YS, JP와 함께 한국정당 민주주의를 60-70년대보다 오히려 후퇴시켰습니다. 이 같은 사당정치는 결국 아들들과 측근들의 비리로 이어져 민주화운동의 도덕성을 실추시켰습니다.

'대통령 김대중'의 그림자는 경제위기 극복의 부작용인 신자유주의적 폐해입니다. 경제위기 이전에 3.2%에 불과했던 국내기업의 외국인 소유가 40%대를 넘어섰고 비정규직이 일상화되었으며 사회적 양극화가 군사독재시절보다 더 심화되었습니다. 이 같은 양극화는 박정희 향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양극화는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승한 노무현 정부에서도 계속되어 결국 07년 대선과 08년 총선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묻지마 지지'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아쉬운 것은 김대중 정부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도입한 신자유주의정책이 지난해 월스트리트 발 경제위기를 통해 세계적으로 파탄이 난 이상, 김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당시는 불가피했었지만 돌이켜보니 문제도 많으니 이제 이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발언을 해주지 못 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신자유주의정책에 대해 민주당과 정치권, 나아가 국민들이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갖도록 만들어주지 못한 것입니다.

이 같은 약식 평가를 넘어 '정치인 김대중'과 '대통령 김대중'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정확하고 엄밀한 대차대조표는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이루어져야 할 역사적 과제입니다. 다시 한 번, 김전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이제 고이 잠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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