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도 다르지 않았다. 눈만 뜨면 터지는 대형 사건을 쫓다보면, 현 정부 인수위 시절 빚어진 촌극까지 되돌아 볼 틈이 도무지 나지 않았다.
오래된 기억이 먼지를 털고 나온 것은 지난 18일 오전,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아침마다 그는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라는 제목의 글을 누리꾼들에게 띄운다. 한국 전통문화를 다룬 이 글을 메일로 받아보는 이들은 약 2000명. 그는 메일링 리스트, 홈페이지 등에 올린 전통문화 관련 글을 간추려 <맛깔스런 우리 문화 속풀이 31가지>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어륀지' 파문, 한국 지식인들의 천박한 정신세계 드러낸 사건
▲ 김영조 씨. ⓒ프레시안 |
"말과 글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잖아요. 그런데 그릇을 갑자기 영어로 바꾸면 어떻게 되죠. 생각을 적게 담을 수밖에요."
"'어린지'면 어떻고, '오뤤지'면 또 어떻습니까. 어차피 영어는 미국 사람들만의 것도 아니고, 영국 사람들만의 것도 아니잖아요. 미국 사람들과 발음이 다르다고 해서, 영국 사람들이 쓰는 영어는 영어가 아닌 걸까요. 그렇지 않죠. 무리해가면서까지 미국 사람이 내는 발음을 그대로 따라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은 미국 발음 흉내에 지나친 힘을 쏟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말과 글을 갈고닦는데 힘을 씁니다. 영어로 깊은 생각을 전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미국 발음 흉내에 애를 쓰더라고요."
"사람이 공부에 쏟을 시간이 무한하다면 영어 몰입 교육도 나쁘지 않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모든 사람이 영어 몰입 교육을 받는다면, 그 시간에 다른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없겠지요."
"영어 몰입 교육. 한마디로 안타깝습니다. 정말 안타까워요."
지난해 '어륀지' 파문은 우리 사회 주류 지식인들이 얼마나 천박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전통문화에는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가 '어륀지' 파문에 대해 말을 쏟아낼 무렵, 그와 나눈 이야기에 흥이 올랐다. 이날 그와 나눈 이야기를 글로 옮겼다.
"토박이말 찾아 써야 문화 다양성 살아난다"
- 외국어, 외래어에 밀려 잘 쓰이지 않는 우리말을 찾아내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다보면, '국수주의자'라는 비판을 듣지 않나요?
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오해에요. 제가 영어나 일어를 아예 쓰지 말자거나, 공부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외국어가 필요한 사람은 외국어를 열심히 배워야하지요. 오히려 지금보다 더 효율적인 외국어 공부 방식을 찾아야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다만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강요하면 우리의 생각과 문화가 망가질 수 있다는 거죠.
잘 쓰이지 않는 우리말을 찾아내서 쓰는 일은 국수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말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니까요. 우리 토박이말만 쓰고 외국어나 외래어는 무조건 쓰지 말자고 하면, 국수주의가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런 입장이 아니에요.
어떤 느낌이나 생각에 딱 들어맞는 낱말은 오직 하나입니다. 이는 우리가 쓰는 낱말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표현하는 느낌이나 생각도 더 다양해진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잘 쓰이지 않는 토박이말을 찾아내서 쓰는 일은 언어의 다양성, 생각과 느낌의 다양성을 높이는 일입니다. 오히려 획일적인 국수주의와는 반대 입장이지요.
저는 우리 전통음악을 사랑하지만 클래식이나 재즈도 즐겨 듣습니다. 아름다운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면, 우리 문화가 더 윤택해진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 김영조 씨. ⓒ프레시안 |
"'환단고기식 전통 사랑'은 위험하죠"
- 하지만 전통문화를 강조하는 이들 중에는 외국 문물이라면 무턱대고 배격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단지 우리 전통이므로 무조건 좋다는 입장 말입니다.
그런 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상고사 연구하는 분들 중에 간혹 그런 분들이 있어요. 저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태도입니다. 예컨대 <환단고기(한단고기)> 같은 책은 '위서' 논란이 늘 따라다니잖아요. 무조건 믿기는 어려운 내용이지요.
제가 <환단고기(한단고기)>를 지지하지 않는다니까 서운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분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전통문화를 알리고 다니는 나조차도 믿기 힘들다면,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느냐. 우선 나부터 설득해 보라."
- 전통문화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됐나요?
▲ 김영조 씨. ⓒ프레시안 |
그러다 전통문화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0년대 말 <한겨레> 창간 발기인으로 참가하면서부터입니다. 그 무렵 전통문화에 관심 있는 이들을 많이 만났지요.
그리고 1990년대 초에는 전통한복 관련 사업을 시작했어요. 뜻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자는 결심이었지요. 한때는 무척 번창했는데, 1990년대 말에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지금은 서울 동대문구에서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생활한복, 한방진료복 등 관련 사업도 하고 있고요. 주로 하는 일은 전통문화에 대해 강연하거나 글을 쓰는 일이지요. 상명대 평생교육원에서 "재미있게 알아보는 한국 문화", "생활 속에 꼭 필요한 실용글쓰기" 등 강의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라는 제목으로 전통문화에 관한 글을 써서 메일로 보내고 있고요.
- 얼레빗이 뭐죠?
빗살이 굵고 성긴 큰 빗입니다. 반달처럼 생겼지요. 아침마다 빗으로 머리를 빗잖아요.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는 그런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화투에 밀려 사라진 전통놀이 문화
- 쓴 글들을 읽어보니 우리 생활에 뿌리내린 일본 문화에 대해 몹시 비판적이더군요.
앞서 말했듯 제가 일본 문화를 무조건 내치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무엇이 우리 토박이 문화이고, 무엇이 일본에서 건너온 문화인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 우리 문화에 스며든 일본 문화는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들어온 것들 입니다. 기껏해야 100년도 안 된, 뿌리가 얕은 것들이지요. 뿌리가 깊은 토박이 문화에 비해 어색한 게 당연합니다.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거지요. 이런 문화가 우리에게 더 자연스럽고 편안한 토박이 문화를 밀어낸다면, 답답한 일 아니겠어요.
-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죠?
▲ 김영조 씨. ⓒ프레시안 |
일제가 조선 침략 과정에서 화투를 조직적으로 퍼뜨렸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요. 일본에서 조선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화투 한목씩 안겨주곤 했답니다.
그런데 화투 모양을 보세요. 벚꽃, 국화, 오동, 등나무 줄기와 잎…. 모두 일본 천황 가문, 혹은 막부 등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일제가 조선에 화투를 퍼뜨린 이유가 이해되지요.
더 큰 문제는 화투 같은 저질 문화가 들어와서 더 좋은 우리 전통놀이를 몰아내버렸다는 점입니다. 정작 일본에서는 화투가 별 인기가 없는데 말이지요. 투호, 쌍륙 등과 같은 좋은 놀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놀이 문화가 사라졌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 같아요.
반면, 일제는 전통놀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없애려 들었지요. 조선총독부는 1936년 온 나라의 민속놀이를 조사하여 <조선의 향토오락>이라는 책을 펴냅니다. 이렇게 기록을 남긴 뒤에는 각 지역의 민속놀이를 못하게 했습니다. 안동 차전놀이, 의성 기마싸움, 포항 월월이청청, 경산 자인 팔광대놀이 등이 일제에 의해 중단됐다가 1980년대 이후 가까스로 복원된 것들이지요. 그나마 울진군 놀싸움 등은 아예 맥이 끊어졌습니다.
▲ 김영조 씨. ⓒ프레시안 |
"'아이가 땡깡부린다',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 사실 우리가 쓰는 말 중에도 일본말에서 비롯된 게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이제 너무 익숙해서 우리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그렇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이런 사례 역시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예를 들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땡깡부린다"라는 말을 예로 들어볼까요. 한국외대 연수평가원 이윤옥 교수에 따르면, 이 말 역시 일본말에서 왔습니다. 일본말에 "てんかん"라는 게 있는데, '전간' 즉 간질을 뜻합니다. 이걸 '뗑깡'이라고 읽지요.
이 말을 가져와서 간질 발작하듯 억지, 행패를 부린다는 뜻으로 "땡깡부린다"라고 하게 된 것이지요. "'뗑깡(てんかん)'+부리다" 꼴로 쓰는 거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땡깡부린다"라는 말을 예사롭게 쓰는 어른들 중에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간질은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고 쓰러지며 팔다리가 떨리는 병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땡깡'이 간질을 뜻하는 일본말에서 왔다는 걸 알면,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쓰는 어른들이 확 줄어들지 않을까 싶어요. 대신 "억지부리다", "생떼부리다", "막무가내다", "행패부리다" 등을 써야 하겠지요.
▲ 김영조 씨. ⓒ프레시안 |
"국어원, 사투리에 열린 태도 가져야"
- 국어학자들이 분발해야 할 것 같네요. 국어정책을 다루는 국립국어원도 마찬가지고요.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 사전을 편찬하는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emie francaise)가 누리는 위상이 대단합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정회원이 되는 것은 문인, 학자들에게 엄청난 영광으로 여겨지지요. 반면 한국에서는 국립국어원의 위상이 너무 초라하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말과 글은 그 나라 문화와 학문을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당연히 말과 글을 다루는 기관이 높은 대접을 받아야하지요. 그런데 한국에선 국립국어원장이 기껏 1급 공무원에 불과합니다. 역대 정부가 올바른 말과 글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적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국립국어원장이면 적어도 장관급은 돼야 한다고 봐요.
물론 직급 자체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지요.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과 생각일 텐데, 이것도 문제가 많아요. 국립국어원에서 낸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한자어의 비율이 매우 높지요. 국립국어원 소속 연구원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우리말에는 원래 한자어가 많다는 것이지요. 저 역시 한자어를 사전에서 빼야 한다거나 쓰지 말자는 입장은 아닙니다. 다만 한자어의 비율이 높은 배경에는 국어학자들의 책임도 있다는 거죠. 그들이 사라져가는 우리말을 찾아내기보다는 오히려 밀어내버렸다는 이야깁니다.
사투리를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입니다. 많은 토박이말이 사투리라는 이유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빠졌습니다. 물론 똑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 지역마다 다르다면 사투리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경상도에만 있는 풍습을 가리키는 말이 있다면, 이게 사투리일까요. 그렇지 않죠. 경상도에서만 쓰이는 말이겠지만, 이 경우에는 표준어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국립국어원이 사투리에 대해서 좀 더 열린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고 봐요. 그렇게 하면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토박이말이 차지하는 비율도 지금보다 높아지겠지요.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그것으로 담아내는 생각과 느낌도 더 풍부해질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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