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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가 광주 대통령인가? 대한민국 대통령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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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가 광주 대통령인가? 대한민국 대통령이지!"

[호남르포] 차분한 애도…"남북관계라도 나아졌으면 좋았을 걸"

19일 오후 광주 김대중 컨벤션센터 앞 광장. 나무 그늘 벤치에 모여 앉아 있는 60대 남성 셋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들은 광산구청이나 송정역을 놔두고 김 전 대통령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 김대중 컨벤션센터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뜨거운 날이었지만 양복도 갖춰 입었다.

이 곳 '김대중홀'에는 김 전 대통령이 사용하던 지팡이, 5시간이 넘는 국회 연설에 대한 기네스 기록 인증서, 사형수 시절 엽서에 깨알같이 쓴 옥중서신, 이희호 여사가 직접 뜨개질해 감옥에 보낸 양말, 대통령 재직시 쓰던 식기 등이 전시돼 있다.

"광주엔 안 오셔도 된다"
▲ 2005년 시민들의 의견에 따라 '김대중 컨벤션센터'라는 이름으로 개관됐다. ⓒ프레시안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김 전 대통령을 5.18 민주묘지에 모셔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고 말을 꺼내보았다. 유족과 정부는 동작동 서울 국립현충원으로 장지를 결정했으나 혹시나 하는 아쉬움이 있을까 싶었다. 박광태 광주시장도 정부에 5.18 민주묘지를 장지로 건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대답은 모두 "안 된다"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지 광주의 대통령이당가", "5.18 묘지도 우리 입장에서는 좋지만 뭣하러 그러는가. 대통령까지 했으니까 국립묘지로 가야제", "국립묘지도 대전은 안 돼, 동작동으로 가야지."

저마다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 와중에 한 마디가 귀에 쏙 들어왔다. "그 양반이 죽어서도 광주로 오면 다른 데서 또 얼마나 욕하고 헐뜯겠는가."

▲ '김대중홀'에 전시된 각종 유품을 둘러보고 있는 광주 시민들. ⓒ프레시안

적어도 광주에서는 1980년 5.18 이후에는 민정당이나 한나라당을 찍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호남이 DJ에게 몰표 준다'는 말이 다른 지역을 자극할까봐 여론조사 전화를 받으면 아예 바로 끊어버리거나 "한나라당(혹은 민자당, 민정당)"이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을 정도로 다른 지역 여론 눈치를 봤다고 한다.

광주 사람들이 '영남 사람' 노무현에게 몰표를 줘 대선후보로 만든 것에도 이런 정서가 깔려 있다. "김대중이 호남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김대중이기 때문에, 노무현이 영남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노무현이기 때문에 찍었다"는 것이다.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저세상에 보낸 광주는 여전히 '고인'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광주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김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고 있었다.

▲ 김대중 컨벤션센터 분향소에서 조문하는 광주 시민들. ⓒ프레시안

상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반응은 일단 아쉬움이다. 양동시장에서 만난 한 상인은 "천수를 누린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오래 사신 편"이라면서도 "좀 더 좋은 세상을 보고 가셨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세상'에 대해 묻자 "다른 건 몰라도 본인이 애쓴 남북관계라도 좀 나아졌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답했다.

시장에서 만난 김평호 씨(56)는 "말년에 노무현 대통령 서거에 충격을 많이 받으신 것 같다"며 "3대 위기 얘기하고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는 유신독재 시절 얘기까지 해야 할 정도로 너무 마음고생이 심하신 채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 1971년 대선 출마 당시 쓴 공약과 서명. ⓒ프레시안

간간이 분노 섞인 말도 들렸다. 광주역에서 만난 한 택시기사는 "한나라당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저주를 퍼붓더니 두 지도자가 모두 세상을 뜨고 말았다"고 눈물을 흘렸고, 옛 전남도청 분향소에서 분향을 마친 한 시민은 "자살하라는 작자와 아프리카 반군 지도자라고 할 말 못할 말 못 가리고 지껄이던 작자들은 지금 다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는 곧 김 전 대통령이 여전히 '힘'을 가진 지도자였다는 역설이기도 하다. 광주전남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결성한 시민추모위원회 임낙평 집행위원장은 "계시는 것만으로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압박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은 크다. 그는 "광주 분위기는 거목이 사라진 상실감과 허탈함"이라고 말했다.
▲ 옛 전남도청에 마련된 분향소. ⓒ프레시안

새 시대

반면 너무나 큰 나무였기에 그늘이 넓었던 것도 사실이다. 시민추모위 결성식에서 위원장을 맡은 지선 스님은 "김대중 대통령은 위대한 지도자이고 그분만한 지도자가 없지만 전체적 봤을 때 동의할 수만은 없는 애증이 섞인 관계였다"고 회고했다.

결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임낙평 집행위원장의 표현을 빌자면 "억울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광주는 지역감정 대립의 가장 큰 희생자였다. 기초의회부터 광역자치단체장, 국회의원까지 모두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다. 호남 지역의 일만은 아니지만 '공천=당선'의 공식이 정치를 왜곡시키고 있다.

지역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큰 그늘 아래에서 그를 이어갈 유력 정치인이 성장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임낙평 집행위원장은 "김 전 대통령의 인권, 민주주의, 통일 등 탁월한 업적 등 계승할 것은 철저하게 계승하되 변화시킬 부분은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지역민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런 변화의 바람도 이미 감지되고 있다. 2008년 여수와 2009년 장흥에서 민주노동당이 기초의원을 배출했다.
▲ 살풀이. ⓒ프레시안

시민추모위원회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사이 옛 도청 앞 분향소에서는 살풀이가 펼쳐졌다. 이를 뒤로 하고 충장로 번화가에 나오니 셔터가 내려진 광주우체국 앞에선 20대 청년들 20여 명이 작은 가판에 김 전 대통령 생전의 연설 영상을 틀어 놓고 손에 촛불을 든 채 김 전 대통령을 추모하고 있었다. 광주에서 '김대중'은 어느 한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라 할아버지에서 손자까지 3대를 아우르는 하나의 코드다.

이들을 지나쳐오며 낮에 김대중 컨벤션센터 앞에서 만난 김종욱 할아버지의 너털웃음이 떠올랐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이 정도면 김대중 대통령은 잘 산 거 아닌가. 참 남긴 것이 많은 사람이다."

▲ '김대중홀'에 걸려 있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사진.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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