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뿐 아니라 그는 분단 한국의 현실에서 마침내 남북화해의 길을 텄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은 항상 우리 현대사의 한 복판에 있었고, 그 속에서 민주화와 남북화해를 위해 자신의 모든 인생을 다 바쳤던 그는 우리 시대의 진정 위대한 정치인이었다.
고난과 시련
▲ ⓒ연합 |
바로 이 대선에서 그는 박 대통령의 장기집권 시도가 영구집권으로 이어질 것임을 지적했는데, 이는 박정희의 재집권 이후 유신체제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또한 그는 대선 과정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보장론'과 '대중경제론'을 내세웠는데, 그것은 남북 분단과 개발독재의 상황에서 박정희정권의 안보와 경제정책의 패러다임을 넘어설 수 있는, 당시로서는 그 주장이 쉽지 않은 대안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독재와 장기집권에 대한 그의 도전에 뒤따랐던 대가는 매우 가혹했다. 유신체제 등장 이후 그는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었던 과정에서 바다에 수장(水葬)될 고비까지 겪었기 때문이다. 이후 1970년대의 그의 삶은 가택연금과 감옥을 넘나드는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민주화의 전망이 밝아왔던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전두환의 신군부세력은 또 다시 쿠데타를 감행했고, 그들은 그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한 조치로서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을 조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80년대에 들어서도 그의 삶은 투옥과 망명 그리고 연금으로 점철되지 않을 수 없었다.
좌절과 영광
민주화 이전의 1970,80년대에 이 같은 그의 고난과 시련은 박정희와 전두환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민주화운동의 저항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저항의 결과 민주화운동은 마침내 1987년 6월항쟁을 맞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실현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민주화 이행의 이 같은 상황에서 민주진영은 민주정부 수립에 실패했다. 그리고 그 한 원인에는 서로 대선 후보직을 양보하지 않았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이 있었다. 훗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내가 후보직을 사퇴하는 것이 옳았다"고 회고했다.
결국 1987년 13대 대선 결과 민주화의 수혜는 역설적이게도 독재세력의 후계세력인 노태우 정권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김대중의 좌절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전면 동원되었던 지역주의정치 속에서 노태우, 김영삼 그리고 김종필의 3당합당은 호남 고립화를 가져왔고. 그 정치적 결과는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의 패배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좌절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그에게도 영광이 돌아왔다. 1997년 15대 대선에서 그는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호남 고립화의 상황에서도 그가 지역연합을 통해 김종필의 충청지역의 지지를 끌어들일 수 있었고, 여기에 더해 여권의 분열과 IMF 경제위기가 그에게 유리하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민주정부의 등장, 경제위기의 극복, 그리고 남북화해
▲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은 남북화해와 협력의 물꼬를 텄다. ⓒ연합 |
김대중 대통령의 대표적 업적으로서 우리는 이 같은 선거를 통한 민주정부의 등장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업적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IMF 경제위기를 단기간 내에 성공적으로 극복한 것이 그의 또 다른 업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김대중 대통령의 최대 업적을 가린다면 그것은 그가 남북화해의 본격적인 길을 텄다는 점이다. 햇볕정책의 시행,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의 개발,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성명 등이 바로 그 결과들이다. 특히 남북이 분단과 전쟁의 경험을 겪고 이후 적대적 대치를 계속해왔던 상황에서 이 같은 화해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그의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업적을 고려해볼 때, 우리 한국은 김대중 정부의 집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근대적인 역사발전의 정상적인 궤도에 진입한 것이 아닌가 한다. 첫째는 그 동안 권위주의체제와 그 유산 속에서 그 발전이 지체되었던 우리의 민주주의가 1987년의 민주화에 이어 1997년의 민주정권의 등장으로 비로소 본 궤도에 올랐다는 점에서이다. 둘째는 냉전과 분단 상황에서 수십 년 동안 적대적인 대치와 갈등을 겪어왔던 남북이 상호 화해를 통해 평화통일의 전망을 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IMF 경제위기의 도전을 슬기롭게 극복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덧씌워진 부정의 이미지, 그 극복과 화해를 위해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이 이상과 같이 뛰어났다고 할지라도, 그 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덧씌워졌던 부정적 이미지를 생각하면 우리 사회가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심지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금에도 그에 대한 악의적인 소리를 해대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왜 그러는 것인가?
▲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해자였던 경우가 있었는가? 그는 언제나 피해자였고, 그에게 행해졌던 가해를 거부하고 저항했다면 그것은 대부분 대의를 위한 것이었다. ⓒ연합 |
그러나 역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해자였던 경우가 있었는가? 그가 그에 대한 가해자들에게 보복하고 인간적인 모욕을 가한 일이 있었는가? 오히려 그는 언제나 피해자였을 뿐이고, 그가 그에게 행해졌던 가해를 거부하고 이에 저항했다면 그것은 대부분 대의를 위한 것이었다. 나아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배경이었던 호남지역주의 역시 역사의 후퇴를 방어하기 위한 측면이 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떠난 지금의 마당에서 이 같은 덧씌우기식 가해는 이제 자제되고 극복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우리는 진정한 관용과 화해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원했던 것이 있었다면 바로 그런 세상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같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시작될 수 있을까? 그것은 거창한 노력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뒤돌아보는 반성과 성찰의 작은 노력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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