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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흔적을 찾아

[헤이룽장성 여행기②] 의거 100주년, 개교 100년 맞은 조선족 학교

8일. 일행은 러시아와의 또 다른 국경지대인 만저우리(滿洲里)로 향했다. 후룬 호를 잠시 들른 후 도시에 도착하니 다섯 시간가량이 지났다. 초원 한 복판에 도시를 세우고, 다시 도시와 초원 사이에는 철조망을 가로놓아 국경을 만들었다.

국경선 바로 옆에서는 망원경, 마뜨료쉬까 인형, 각종 모피제품 등 러시아에서 갓 들어온 물품을 파는 도매상이 큼지막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판문점의 살벌함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적대국이 아닌 한, 대체로 국경은 이처럼 국가 간 거래가 시작되는 지점일 터이다.

▲만저우리 국경지대. 멀리 보이는 큰 건물을 기준으로 중국과 러시아가 나뉜다. 판문점과는 분위기가 판이하다. ⓒ손문상

만저우리와 하얼빈, 중국은 넓었다

온 김에 상점으로 들어갔다. 들어오는 물품 중 일부는 러시아군에서 사용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중국인들의 상술이라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한국 상인들도 여전히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바가지를 씌우니까. 하지만 현지 상인들의 바가지 폭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한 기자는 아들에게 줄 선물로 망원경을 찾았다. 상인은 1000위안을 불렀다. 긴 겨루기 끝에 가격은 350위안으로 뚝 떨어졌다. 상인이 애가 단 모양이다. 내켜하지 않는 표정으로 나가는 손님을 건물 밖까지 따라와 흥정을 계속했다. 결국 합의된 가격은 130위안. 한국 돈으로 거의 17만 원하던 제품 가격이 30분 만에 2만 원대로 떨어졌다. 원가가 얼마인지 짐작이 되질 않는다.

▲국경도시는 나라를 가르는 곳이자 뒤섞는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간판에는 중국어와 러시아어가 뒤섞여 있었고, 사람 역시 자연스레 섞인다. ⓒ손문상

국경도시의 분위기는 확실히 달랐다. 현지인 못지않게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거리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거리 곳곳에는 러시아 맥주와 옷가지 등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섰다. 간판마다 러시아어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러시아인형박물관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고, 대형 마뜨료쉬까 인형 광장에는 중국·몽골·러시아 인형이 나란히 늘어섰다. 중국의 4대 미인(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의 얼굴을 본뜬 인형이 이색적이다.

거리를 쏘다니다 벤치에서 지친 다리를 쉬고 있었다. 갑자기 누가 한국말로 "저기… 러시아 물건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하고 묻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한국인 유학생 둘이 일행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다. 하얼빈에서 공부하는데 주말을 맞아 이곳으로 쇼핑을 왔다. 헤이룽장성에 사는 한국인(동포 제외) 대부분이 유학생들이다.

만주의 역사, 유목민족의 흔적

만저우리의 이색적인 풍광을 뒤로, 다시 열 네 시간에 걸쳐 기차로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중국 동포(조선족)들이 많이 모여 사는 아성(阿城)구. 요나라를 밀어내고 중국 화북지방을 지배한 아구다(阿骨打)의 금나라(1115~1234) 수도 상경(上京)이 옛 이름이다. 예전에는 도시였지만 지금은 하얼빈 시에 통합됐다.

진상진역사박물관(金上京歷史博物館)으로 향했는데, 금나라 초기 황제들의 흉상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특이한 점은 아구다의 넷째 아들 완안종필(完顔宗弼, 여진식 이름은 우추), 곧 금진왕의 동상이 황제들의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완안종필은 유명한 군사전략가로, 송(宋)군을 연달아 격파하며 장강(양쯔강, 揚子江) 이남까지 침공했다. 나중에 성을 완안(完顔)에서 첨(詹) 씨로 바꿨는데, 대만의 첨 씨들이 그의 후손이다. 선조를 기리기 위해 대만의 자손들이 돈을 모아 이 큰 동상을 세웠다.

북방민족의 중국 공략은 이후에도 지속돼, 누르하치(奴爾哈赤)는 만주 일대에 흩어져 있던 여직(여진, 명나라 사람들은 女直이라고 불렀다)을 통일하고 중국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거느렸던 청나라를 세웠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여진족 약화 기도에 의해 나뉜 해서여진, 건주여진, 야인여진 중 건주여진 사람이었다. 건주여진은 조선과 바로 맞닿은 곳에 자리를 잡은 부족인데, 누르하치의 성공에는 조선도 큰 역할을 했다. 조선이 명나라 황제에게 바칠 조공으로 누르하치에게서 수달가죽을 사갔고, 누르하치는 그 대가로 조선의 농기구를 가져와 이를 화살 등 무기로 만들어 결국 명 대군을 격파하는데 썼기 때문이다.

하얼빈의 동포

아성으로 온 김에 하얼빈시아성구조선족중학교에 들렀다. 구미 금오고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곳으로, 현재 교직원 62명이 한국으로 치자면 중학교-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고 있었다. 중국의 교육제도는 성마다 다른데, 아성은 6+3 의무교육제(소학교 6년+중학교 3년)를 시행하고 있다.

한때는 학생수가 1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360여명에 불과하다. 김송철 교장은 "요즘에는 동네 촌장들이 '한 마을에 아이 다섯 명도 보기 힘들다'고 한다.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가거나 아예 일본으로 건너간다"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김송철 교장은 "아이들이 점차 줄어들어 어려움이 많다"라고 했다. 아이들 수가 줄어드는 만큼 정부 지원금은 줄어든다. ⓒ손문상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아이들 대부분이 부모 없이 지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실업난이 워낙 심각해 부모들이 대도시나 한국으로 돈을 벌러 나가면서 길게는 부모와 10년 이상 떨어져 혼자 지내는 아이들이 87%에 달한다. 가정교육이 제대로 되기 힘든 구조다.

이곳에도 사교육이 극심하다. 한국과 달리 중학교 입시부터 치열하다. 지역 명문학교인 하얼빈3중학교를 보내기 위해 부모들이 아이들을 들들 볶는다고 김 교장은 혀를 찼다. 비단 동포사회 뿐만 아니라 중국인 사회에서도 사교육 열기가 큰 문제라고 한다.

저녁을 먹기 위해 홍신춘(紅新村)이라는 동포 밀집 지역으로 향했다. 도시의 풍경이 완연히 한국의 시골마을이다. 헤이룽장성에서 조선족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한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눈에 익은 한자 '대도무문(大道無門)' 네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진 비석이 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써 준 글귀란다. 비석 아래 편에 '2000.6.2. 김영삼'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수성 전 국무총리도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저녁 식사를 이곳 한국 음식점에서 했는데, 가게 주인 아주머니가 한국과 인연이 있었다.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일대 고깃집에서 십여년을 일해 모은 돈으로 고향마을인 이곳에 가게를 내셨단다. 다른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자식과 십여년을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한국에서 말 못할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래도 지금은 큼지막한 식당을 차렸다니, 왠지 모르게 감사한 마음도 든다. 중국인들도 많이 찾느냐고 물어보니 개고기를 먹으러 자주 온단다.

만행의 발자취

하얼빈에 온 이상 그곳을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731부대. 일행은 10일 오전 원한이 서린 그곳으로 향했다.

▲731부대를 이끈 이시이 시로. 731부대는 그의 이름을 따 '이시이 부대'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암으로 사망했다. ⓒ연합뉴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관동군은 이곳에 대규모 군부대를 만들어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대개가 20, 30대인 중국인과 러시아인, 조선인들 3000여명이 이곳에서 '악마적'이라는 표현으로도 설명이 부족할 잔학한 실험의 희생양이 됐다.

어떤 이는 산채로 내장이 꺼내어져 죽었고, 또 어떤 이들은 각종 세균주사를 맞고 고통 속에 죽어나갔다. 임산부는 매독균 주사를 맞았고, 또 다른 이들은 혹독한 추위와 무더위 속에 사망했다.

사람을 '마루타(통나무)'라 부르며 서른 가지가 넘는 악랄한 실험을 지휘한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은 A급 전범이었음에도 미군에게 실험 결과를 넘기고 처벌을 피했다. 역설적이게도 이곳을 가로지르는 철도는, 요즘 진짜 통나무를 실어 나른다.

비슷한 시기 대륙 서편에서 끔찍한 실험으로 유대인 40만 명을 죽인 '죽음의 천사' 요제프 맹겔레(Josef Mengele) 역시 천수를 누리고 73세에 세상을 떴다. 무거운 침묵과 분노가 부대 전시관에 가라앉아 있었다.

일본군이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이곳을 폭파해버린 탓에 남아있는 증거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세균전을 준비하기 위해 사용하던 독가스실험실, 페스트균 실험을 위한 쥐떼 양식장 등이 아직도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지옥은 인간이 만든다.

동포의 학교

마지막으로 일행은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은 하얼빈시도리조선족중심소학교를 찾았다. 하얼빈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조선족 학교인 이곳의 설립 당시 이름은 '하얼빈 동흥학교'였으며 당시는 러시아어로 수업했다. 초기 학생 수는 28명이었다.

5층까지 걸어 올라가니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학인데도 여자 아이들 열네 명이 무용연습에 한창이다. 18일 열릴 헤이룽장성 소수민족 문화예술경연대회 준비를 위해 아이들이 방학에도 연습 중이라고 한다. 동포 가정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지만 두 명은 한족 아이다. 이 아이들은 하얼빈시 대표로 대회에 참가하는데, 후이족(回族, 회족)과 조선족 춤 두 가지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기자 일행 앞에서 후이족의 춤을 아이들이 보여주는데 매우 이국적인 느낌이다.

후이족은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인 후이량위(回良玉)를 배출해 소수민족 중 가장 성공한 민족으로 꼽힌다. 과거 원나라 때는 한족들이 '색목인'이라 불렀는데 무슬림이 많다. 중국에서 이슬람을 뜻하는 '회교'라는 말의 어원도 이 족속에서 따온 것이다. 약 981만 명이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데, 과거 실크로드를 오가던 선조들의 피를 물려받은 듯 상당수 사람들이 상업에 종사한다.

조선족 중 가장 성공한 이는 조남기 장군으로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부주석을 지냈고, 인민해방군 최고위 계급인 상장에 올랐다. 충북 청원군이 고향으로, 열두 살 되던 1938년 독립운동가이던 할아버지 조동식 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지난 2000년 4월에는 국회 초청으로 조국 땅을 62년 만에 밟기도 했다.

▲아이들이 무용 경연대회를 앞두고 후이족의 전통무용을 연습하고 있다. ⓒ손문상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

이 학교 초대 교장은 안중근 의사와 깊은 인연을 맺은 김성백 선생이다. 당시 러시아 국적을 가졌던 김 선생은 재 하얼빈 한국민회 회장이기도 했다. 안 의사는 김 선생의 집에서 나흘을 머문 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안 의사가 이곳에 머문 까닭은 원래의 암살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러시아의 재무상이던 코코흐체프를 만나기 위해 하얼빈으로 향했는데, 이동 도중 지야이지스고(蔡家溝) 역에 잠시 정차할 것이라는 소식이 안 의사의 귀에 들어갔다. 당연히 원래 예정된 거사 장소는 지야이지스고였다. 하지만 특별열차는 첩보와 달리 이곳을 그냥 지나버린다.

안 의사는 급히 하얼빈 동흥학교로 이동, 1909년 10월 22일 도착한다. 정거장 사무원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역을 찾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안 의사는 마침내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 역 1번 플랫폼에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성공한다.

▲하얼빈시내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하얼빈시도리조선족중심소학교. 학생의 대부분이 동포들이지만 한족들의 자녀도 이 학교에 다닌다. ⓒ손문상

학교 측은 2층 회의실을 개조해 안 의사 기념관으로 짓고 있다. 아직 내부 수리가 끝나지 않아서인지 안 의사의 흔적을 더듬기 어려웠다. 안 의사가 머물렀던 김 선생의 집은 도심 재개발로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의거 당시 중국의 20여개가 넘는 매체가 안중근 의사를 찬양했던 열기는, 21세기 동북아에서 차갑게 식은 듯했다. 물론 일본과 경쟁관계이면서도 협력을 해나가야 할 중국 정부가 안 의사를 크게 조명하기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보도블럭 위의 암호와 같은 표시로 겨우 현장의 모습을 짐작케 해놓은 게 다인 중국 정부, 어떠한 요구도 하지 못하는 한국 정부에 대한 아쉬움은 유달리 특이한 의미로 기억되는 '100'이라는 숫자 앞에서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9박 10일 간의 헤이룽장성 기행은 이처럼 안 의사를 추억하며 끝났다. 삼강(헤이룽강, 쑹화강, 우수리강)이 도도히 흐르던 이곳에서 옛날 부여가 탄생했다. 고구려의 기마병이 중국을 떨게 한 한국인의 기억이 남아 있다. 지금도, 또 앞으로도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돈과 교육, 외교를 위해 이곳을 찾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 한국인의 역사를 품고 헤이룽강은 바다로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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