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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제2, 제3의 전용철이 있었다"

농민대회 부상자들이 털어놓은 '악몽의 순간'들

"제2, 제3의 전용철이 있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59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농업의 근본적 회생과 고 전용철 농민 살해 범국민대책위원회'는 29일 고 전용철 씨가 경찰로부터 과잉진압을 당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난 15일 전국농민대회 당시 경찰의 무차별 구타로 중상을 입은 농민들을 중심으로 '경찰 폭력 증언대회'를 가졌다.

허준영 경찰청장은 지난 28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15일 농민대회 당시 불상사가 있었던 것 같다"며 "그러나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은 아니다"란 취지로 고 전용철 씨 사망에 대해 해명하자 범대위 측이 구체적 증언과 사진 자료로 맞불을 놓은 것이다.

고 전용철 씨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열린 '증언대회'에는 세 명의 농민이 직접 참여하고, 의사의 만류로 현장에 참석 못했지만 영상을 통해 한 명의 여성 농민이 간접 참여했다.

이들은 경찰이 방패를 갖고 집중적으로 머리를 구타했다는 사실과 함께 당일 휴유증으로 정신적 고통까지 겪고 있다고 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이들은 현재도 입원 혹은 통원 치료를 받고 있었다.

다음은 이날 증언대회에 참석했던 농민들의 증언 내용.

<사진1, 2, 3>

◇ 윤선미 씨(28, 전국여성농민회 총무국장)

"15일 농민대회에 처음부터 참석했다. 그 날 오후 6시경 정리집회를 한다는 말을 듣고 여의도 문화마당으로 돌아왔다. 오후 내내 공방 속에 흩어진 우리 단체 여성농민들을 찾았다. 여의도 문화마당 국회 쪽 출구에는 농민들과 경찰들이 대치 중이었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과 대치 중이던 곳은 거리가 꽤 멀었다.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경찰과 나 사이가 멀었다. 나는 다친 농민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들이 공원 안까지 치고 들어왔다. 너무 놀랐다. 사람들이 공원 뒤편으로 우르르 빠져나갔다. 나는 뒤돌아 도망가다가 그만 무대 옆 계단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군홧발이 보였다. 나는 다시 넘어졌다. 무수한 군홧발이 나와 함께 넘어진 여성 농민 2명과 남성 농민 1명을 밟고 지나갔다. 다 지나가면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꾹 참고 버텼다. 지나가고 나면 아무런 무기도 없고, 더군다나 여자인 나를 어쩌겠나란 생각도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한 무리의 경찰들이 방패로 나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 찍었다. 10번, 20번도 더 찍는 것 같았다. 정말 사람이 이렇게 죽는가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비명도 질렀지만, 나중에는 무서워서 소리도 못 내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머리 뒤쪽만 집중적으로 내려쳤다. 마치 나를 죽이러 온 사람 처럼….

방패 세례가 끝났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고개를 들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5분 정도 그대로 있었다. 여기저기서 '죽여버려', '쓸어버려'란 고함소리와 비명, 아우성만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 쪽 편에 경찰 수십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늑대가 나를 노려보고 서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결국 실신했다.

눈을 떠보니 한 여학생이 옆에서 내 머리를 지혈하고 있었다. 피가 많이 났다. 그 여학생도 소스라치며 비명을 지르고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뒤 나이 드신 한 여성 농민이 와서 병원으로 환자를 후송하는 경찰차로 나를 데리고 갔다. 거기서도 경찰은 나와 나와 함께 탄 한 여성농민을 윽박질렀다.

<사진 4, 5, 6>

이들은 '경찰이 더 다쳤다. 조용히 해라.' 쉴새 없이 위협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병원에 가니 의사가 내 상처를 보고 '어떻게 여자를 이렇게 때릴 수 있냐'며 분노했다. 윗도리는 피에 젖어, 버릴 수밖에 없다고 간호사가 말했다. '아가씨인데 머리를 깎아야겠네요'라고도 말했다.(윤선미 씨는 증언대회에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온 몸은 멍이 시퍼렇게 들었고, 세 군데가 찢어졌더라. 그날부터 25일까지 입원했다. 분노가 솟고 치가 떨린다.

나는 귀농의 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 무서워서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 김덕윤(55, 고성·전국여성농민회 부회장) - 영상

"농민집회에 갔다가 공원(여의도 문화마당)에서 다쳤다. 갈비뼈가 두 대 나갔다. 머리 안 맞으려고 팔로 막다가 팔이 부러졌다. 25년 농민운동을 해 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그들(경찰)은 우리를 짐승으로 보는 듯 했다.

분해서 못 살겠다. 하루빨리 병원에서 나가고 싶지만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폐를 찔러 피가 계속 나온다고 의사 선생님이 나가지도 말란다. 분한 마음 달랠 길이 없다. 한 달 사이에 농민 목숨 10개가 왔다갔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의원과 대통령은 농민 생각 하나도 안하고 쌀 개방해버렸다. 도대체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는지 아니면 미국을 위해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이해가 안된다."

<사진 7,8,9>

◇ 이근낭(45, 평택)

"무대 뒤 쪽에 있었다. 경찰과 한창 대치중이던 여의도 문화마당 국회 쪽 출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경찰이 내가 있는 곳까지 들이닥칠지 생각도 못했다. 나는 원래 몸이 안 좋다. 신장이 안 좋아 투석치료를 받고 있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싸울 생각도 없었다. 멀찌감치 서서 대회에 참여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들이 막 몰려왔다. 나 같은 환자나 할애비(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경찰이 달려와 머리를 '딱' 치니 정신이 없어졌다.

막 때리길래 (투석을 하는) 왼팔을 보호하기 위해 오른팔로 막았다. 결국 팔이 부러졌다. (이근낭 씨는 깁스를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피가 잔뜩 흘러내렸다. 너무 흘려서 옷이 피에 절어 있었다. 병원에 실려갔는데, 의사선생님이 10분만 더 늦었다면 생명마저 잃을 뻔했다고 했다. 지금도 허리가 아파 누워서 잠을 못 잔다. 너무 분하고 원통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쌀 개방한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거길(농민대회) 갔는데, 자식같은 경찰들에게 깨지고 터지고…. 경찰청장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경찰 책임이) 아니라고 우기고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지 이해가 안된다. 그날 장면은 하늘이 봤고 땅이 안다."

◇ 김정호(43, 경산)

"포도 농사를 짓는다. 쌀개방 하면 포도값도 떨어지니까 서울에 갔었다. 오후 4시경 국민은행 맞은 편 도로에서 경찰 방패에 찍히고 바로 실신했다.(농민들이 여의도 문화마당에서 집회를 마치고 국회 쪽으로 행진하던 시점이다) 도리가 없었다. 사람이 진압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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