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진리>(김선욱 지음, 책세상 펴냄)는 한나 아렌트의 핵심 사상이자 정치 사상적 기여로 평가받는 "정치" 그리고 "공적영역, 사적영역" 등의 개념을 활용해서 논의를 개진하고 있다. 저자는 정치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식이 있겠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 정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다양한 정치철학적 전통을 현실 정치에 적용하기보다는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 현실을 선입견 없이 바라보고 정치의 핵심을 통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실 정치의 핵심은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다'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치 영역에 접근할 것인지, 그리고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우리의 삶이 피폐해진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를 다루면서 정치가 올바로 시행되도록 해야 할 책임은 정치인뿐만 아니라 시민에게도 있음을 논의한다. 물론 정치가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자의 관점에서 지금의 현실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 <정치와 진리>(김선욱 지음, 책세상 펴냄). ⓒ프레시안 |
그런데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에 의하면 사회적인 것이란 정치적인 것과 대립되는 개념인데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엄격하게 구분되었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중세에 이르러서 '사회적인 것'의 등장으로 깨졌다는 것이다. 즉, 고대 폴리스에서 사적 영역에 속해 있던 경제가 중세부터 공적인 차원에 등장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사적 문제였던 것이 공적 영역에 들어와 공적 관심을 획득한 것을 사회적인 것으로 부른다.
그런데 사회적인 것의 특징에 주목해야할 점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차이, 개성, 다양성, 특수성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가치에 따라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태도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자존심이나 자부심이 손상당하면 밥상을 엎어버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이는 경제가 중요하다 해도 경제적 가치로만 인간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편, 정치적인 것은 공적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것의 가장 중요한 점 중의 하나는 정치 행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공적 영역, 정치적 장이 사회적인 것에 의해 매몰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인 것보다 사회적인 것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여 정치를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장으로 이해한다면 정치는 수단으로 이해된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목적이 있다면 정치를 위한 공적 영역의 유지이다.
현실에서는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명확히 구분되는 경우도 있고 혼재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올바른 척도가 있어 이를 기준으로 답을 끌어내는 부분은 사회적인 것이고, 이와는 달리 개성과 인간의 복수성이 드러나는 부분이 정치적인 것이다. 따라서 양자가 서로 밀접히 연결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양자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분리해서 구별해야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현 대통령도 후보자였을 때 여러 가지 공약을 제시했지만 경제를 가장 중요한 공약으로 제시했고 유권자들도 거기에 호응했었다. 그렇지만 경제는 어쨌든(외부요인과 내부요인이 있겠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제는 여전히 중요한 요인이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로 여겨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 시대의 문제점이 있다. 대통령의 관심은 여전히 경제 살리기에 있지만 중요한 점은 경제적인 관심 위에 정치적인 것을 놓아야 한다. 경제가 모든 것이 아니다. 인간은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 드러내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다
정치 영역에서 언어는 설득을 목표로 사용되며 개성을 드러낸다. 설득은 타자와의 의견 일치와 합의를 목표로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진리 탐구 과정에 사용되는 언어는 어떤 진리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적 논증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논증 과정에서는 주장된 참인 명제를 다른 사람이 수용하도록 '설득'할 필요가 없다. 갈릴레오의 경우에서 보여지듯이, 참되고 필연적인 진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상관없이 참인 것이다.
정치 영역에서 인간의 복수성이 드러나는 것은 언어 사용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언어 사용을 통해 갈등을 조정하려고 노력한다. 이때 작용하는 언어는 단순한 의사 전달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인간들이 합의를 도출해낸 가능성을 말한다. 그래서 인간이 정치적으로 된다는 것은 물리적 힘이나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과 설득을 통해서 모든 것을 다루어 감을 의미한다. 말과 설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타인의 동의를 강압적으로 이끌어내려는 모든 시도는 정치의 붕괴로 이어진다. 이런 점에서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정치의 부재
어떤 사회이든지 갈등은 있을 수밖에 없다. 국가, 종교, 지역, 이념 또는 노사간의 문제 등. 그리고 한 사회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이런 갈등을 조정, 중재해서 통합된 모습을 보여야 하며 정치는 바로 그 역할을 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2009년의 한국의 정치판에서는 정치(또는 정치인)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대통령과 그를 따르는 집권당의 정치 행위를 보면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용산 참사, 비정규직, 쌍용자동차, 4대강 사업, 미디어 산업 발전법 등이 그것이다. 이는 정치의 부재이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의 현실에서는 통치자 또는 정치인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문제다. 이들은 오직 특정한 이익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좋은 정치인이나 통치자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이들을 끌어안고 가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의 대통령도 목도리를 건네주고 어묵을 사 먹는 등 이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즉 여기에 아픔을 근원적으로 처방할 수 있는 제도가 뒷받침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진정성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위한 (사회)제도는 정의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고 국가(또는 정부)는 이것을 법률로서 입안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대통령은 이런 측면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런 점은 바로 정치의 부재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정치의 부재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의 아이히만
아이히만은 가정에서는 존경받는 가장이고 일터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인물이다. 이런 그가 재판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는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람들은 유태인 학살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에게서 흉축한 괴물같은 모습을 생각했지만, 재판정에 선 그의 모습은 좋은 아빠이자 자상한 남편의 모습이었다. 이런 그의 모습에서 악(또는 악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참관하고 '악의 평범함'을 이야기 한다. 악은 특별하게 있다는 것이 기존의 생각이었지만 아이히만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은 악이란 평범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렌트에 따르면 유태인 학살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또는 임무)에 대해서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에 대한 사례를 현실 정치 상황에서 찾는 다면 미디어 산업 발전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집권 거대 여당이 이 법에 대해 진지한 성찰보다는 대통령의 공약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기한을 정해놓고 성실히 수행하려 한다. 대다수 시민들과 언론계 그리고 관련 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당이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는 청와대 여의도 출장소에 근무하는 직원의 모습이며, 아이히만의 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그 법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면, 그리고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수용한다면, 반대하는 측을 설득하고 협상을 통해서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여당이나 야당을 떠나서 아이히만처럼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또한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치적 논의에서 대표성(representativeness)을 띄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대표성은 공평성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이를테면 도심 재개발을 위한 법이나 미디어 산업법이 특정한 이익을 대변할 때 그 법은 특정한 관련자에게만 대표성을 지닐 뿐, 그로 인해 피해를 받는 사람에게는 저항을 받게 된다.
정치 행위의 본령은 대화와 타협이다. 정치인들이 대화하고 타협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특정한 이익을 대변할 뿐이다. 더디더라도 대화와 타협(협상), 논의와 토론을 통해서 특정한 이익보다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공평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좋은 시민 되기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폴리스에 살고 있는 시민이라면 기본적으로 어떤 목적이(또는 행위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따져 묻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Phronesis)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좋은 시민은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폴리스에 필요한 공동의 좋음(common good)을 만드는데 참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시민이라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저자의 지적대로 정치인들은 다음 선거를 의식해서 인기에 영합하는 활동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를 견제하고 비판할 수 있는, 그리고 정치가 올바르게 시행되기 위해서는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지금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서도. 개개의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지만 연대를 통해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대는 시민 개개인(또는 시민단체)이 지니고 있는 주체성과 자율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강한 결속보다는 주체성과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느슨한 연대가 필요하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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