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안하다. 정말 잘못했어."
이재진 씨는 아내의 영정을 바라보며 이 말만을 되풀이했다. 그를 지켜보던 조문객의 눈가에도 눈물이 번졌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또 울었을까. 그 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고인의 어머니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사위의 등을 토닥였다.
스스로 목을 매 목숨을 끊은 젊은 아내를 보내는 남편의 슬픔은 고스란히 자책이 되었다. 60일 넘게 이어진 옥쇄 파업으로 얼굴을 못보는 남편, 지난해 10월부터 체불된 월급, 게다가 손해배상 가압류 등 회사의 계속된 압박으로 고인은 극단적 선택을 했다.
▲ 22일 평택시 굿모닝병원 영안실에 차려진 분향소. ⓒ프레시안 |
"내 아내라고 이런 일을 겪지 말란 법 있을까"
전날에 비해 한산했다. 고인과 평소 친분이 있었던 지인들, 그리고 쌍용차 가족대책위원회 회원들만 분향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가슴을 쳤다. 어떤 질문에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10년을 넘게 이재진 씨와 평택 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박정운(가명) 씨도 "그저 한숨만 나온다"며 고개를 저었다. 박 씨는 "올해만 해도 이 친구가 상을 치른 것이 벌써 세 번째"라고 더 안타까워했다. 이 씨는 아내를 잃기 전, 지난 2월 심장마비로 장인을 잃었고 4월에는 폐암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모두 쌍용차의 정리 해고에 맞서 노조 간부인 이 씨가 정신없이 싸우던 때였다. 그리고 아내마저 공장 문을 걸어 잠근 옥쇄파업 60일 만에 이 씨 곁을 떠났다.
분향소에서 만난 쌍용차 노동자들은 아내와 가족을 두고 파업을 하는 어려움에 대해 입을 모아 얘기했다. 박정운 씨 역시 파업 초기 이재진 씨와 함께 파업에 참여했었지만, 제 발로 공장을 걸어 나왔다.
"제가 일명 '산 자'예요. 정리 해고 제외자인 거죠. 그래도 10년을 넘게 함께 일해 온 동료들이 아무 이유 없이 잘려나가는데 어떻게 두 눈 뜨고 바라만 볼 수 있겠어요. 파업에 함께 동참했죠. 하지만 그 시간이 오래가진 못했어요.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내 때문이었어요. 공장 안에 있을 때 아내가 전화를 걸었어요. '꼭 그래야만 해요?'라고 하데요. 다른 사람도 있는데 굳이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걱정이 많았죠. 동료들도 내가 '산' 자니깐 다치기 전에 어서 나가라고 등을 떠밀기도 했고…. 그래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재진 부장도 저처럼 '산자'인데…."
박 씨는 "공장을 나온 뒤에야 아내가 경미한 우울증 증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만일 그때 내가 마음을 굳게 먹고 공장을 나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며 분향소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랜 한숨 끝에 박 씨는 "내 아내라고 이런 일을 겪지 말란 법은 없지 않냐"고 되물었다.
또 다른 '산' 자인 김명수(가명) 씨도 마찬가지로 파업에 참여했다 스스로 그만두고 나왔다. 이유도 같았다. 홀로 남겨진 아내 때문이었다. 김 씨는 "늘 별 말 없이 '아픈 곳은 없어?'라고 안부만 묻던 아내가 어느 날인가 울먹이며 '돌아오면 안 돼?'라고 물었다"며 "이후 마음을 다잡으려고 했지만 그게 잘 안됐다"고 말했다.
김 씨는 "평택이 작은 도시라 주민 상당수가 쌍차 관계자들"이라며 "당연히 누가 복귀했는지 안 했는지, 지금 공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내들끼리 소문이 빠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중에 들으니, 제가 파업하고 있는 동안 아내가 가장 부러운 것은 복귀한 남편과 부인이 다정스럽게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모습이었다고 하더라구요. 남편을 공장 안에 두고 홀로 있는 아내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했겠죠. 아마 이재진 부장의 아내도 그랬을 것입니다."
김 씨는 "안 그래도 회사에 일이 터진 이후 단 하루도 마음을 졸이지 않았던 날이 없었을 텐데, 거기다 최근에는 남편 없는 집에 손배 가압류 통지서와 소환장 등이 날아오니 그 마음이 어떻겠냐"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고인은 실제 사고 나흘 전 회사 측 관계자 가족으로부터 ''그런 식으로 하면 남편이 감옥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편에게 울면서 전화를 할 정도로 심약해져 있었다.
▲ 고인의 영안실 로비에는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쌍용자동차 지부 등에서 보낸 화환이 가득했다. 하지만 쌍용자동차에서 보낸 화환은 없었다. ⓒ프레시안 |
"우울증이 사인? 쌍용차 노동자 가족 대부분이 우울증일 것"
몇몇 언론에서는 사 측에서 주장하는 '산후 우울증'이 고인이 자살을 택한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산 자'든, '죽은 자'든 "설사 우울증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원인은 노동자만 책임을 지라는 정리해고를 감행한 쌍용차 사측에 있다"고 입을 모았다.
남편이 아직까지 옥쇄 파업에 동참하고 있는 권재숙(36) 씨는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까지 힘들 줄은 미처 몰랐다"며 "우울증이 없더라도 지금 남편을 공장으로 보낸 가족들은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다"고 고백했다.
권 씨는 "언론에 쌍용차의 '쌍'자만 나와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휴대전화에서 문자 소리만 나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평소 느끼는 압박감을 설명했다. 지난해 10월, 임금이 체불될 때부터 시작된 그 압박감이 벌써 10개월 동안 이어지고 있다. 권 씨는 "이젠 마음 졸이는 것에 적응할 때도 됐는데 그게 잘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우울증의 기준은 모르겠으나 가슴 두근거리고 불안한 것만 놓고 보면, 남편이 쌍용차 노동자인 아내 가운데 우울증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덧붙였다. "기약 없는 싸움을 옆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하루하루 사는 것 자체가 겁나고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해 11월 고인 박 씨는 둘째 아이를 낳았다. 권 씨는 "남편이 노조 간부였으니 산전에도 산후에도 거의 집에 못 갔을 것"이라고 했다.
권 씨도 아내이자, 여자이자, 엄마여서 고인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듯 했다. 그는 "여자가 가장 약할 때는 아이를 낳고 난 뒤"라며 "자신이 믿고 의지할 남편이 없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냐"고 말했다. 역시 남편이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이자연(37) 씨도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고인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고 말했다.
"고인은 가족대책위원회에서 활동을 하지 않은 걸로 알아요. 저는 가대위에서 일하는지라 모진 일도 많이 겪지만 그래도 남편과 함께 하니 힘들어도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어요. 몸은 떨어져 있어도 함께 고민을 나누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남편이 존재하기 때문이었죠."
이 씨에게도 숨진 박 씨처럼 네살 박이 아들이 있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이 씨는 아들을 항상 현장에 데리고 다닌다. 이 씨는 "그러다보니 아이가 여느 아이와는 좀 다르다"고 안타까워했다. 얼마 전에는 노조원들이 경찰에 의해 강제 연행된 모습을 보고 3일간 배앓이를 하는 일도 있었다. 놀이방에서는 아이들과 용역 놀이를 하고 경찰을 보면 항상 이 씨에게 나쁜 경찰인지 좋은 경찰인지를 묻곤 한단다.
분향소에서 만난 전·현직 쌍용차 노동자와 아내들은 한결같이 "이 상태로는 언제 또 똑같은 죽음이 생겨날지 모른다"고 말했다. 비록 고인의 시신은 22일 오전 안성의 한 묘지에 안장됐지만, 우리 사회가 이들의 경고를 귀담아들어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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