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식 이원집정제? 프랑스 지금 총리 이름 아는 사람 있나? 대통령과 총리의 당적이 다를 때 의미 있는 얘기다."
김형오 국회의장이 "개헌 논의를 본격 제기하겠다"고 공언한 제헌절을 하루 앞둔 16일, 민주당 천정배 의원과 '민생정치모임'이 마련한 '개헌논의의 허와 실' 토론회에서 김종인 박사는 "개헌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권력구조를 고치면 만사형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꼬집으며 이처럼 일갈했다.
한 마디로 현재 개헌의 핵심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 △자유민주주의 신장 △법치국가의 확립을 중심으로 논의돼야지, 권력구조 개편 논의가 쟁점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1987년 개헌 작업에 참여했었고, 지금도 김형오 의장이 만든 국회헌법연구자문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지난 10개월 간 다시 개헌에 관한 연구를 이끌어왔다.
"한 번 더했으면 좋겠다 싶은 대통령 있었나?"
김 박사는 우선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에 대해 "프랑스는 1958년 드골 대통령이 총리에게 행정을 위임했으나 당시만 해도 사회당이 의회 다수당이 되리라 생각을 하지 못했고, 이후 퐁피두 등으로 이어오는 동안 대통령과 총리는 한 정파에서 나왔다"며 "1981년에서야 사회당 미테랑 대통령이 당선되고 반대파가 의회를 차지하며 이원집정부제처럼 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 박사는 "시라크 대통령 때 사회당 조스팽 총리가 나오면서 프랑스가 이원집정부제의 표본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된 지금 프랑스 총리를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며 "프랑스는 어떻게 보면 미국보다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나라일 수 있는데, 좋은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 박사는 '4년 중임제'에 대해서도 "87년 개헌 후 단임한 대통령들 중에 '5년만 하기 아까우니 한 번 더 했으면 좋겠다'고 국민들이 생각한 대통령이 한 명이라도 있었느냐"며 "'한 번 더 시키고 싶다'는 여론이 형성됐을 때나 꺼낼 수 있는 얘기"라고 말했다.
김 박사는 또 "좋은 대통령이 8년을 하면 좋겠지만 좋지 않은 대통령도 8년을 하고 싶어서 초반 4년은 선거운동만 할 것"이라며 "우리 실정에 잘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권력구조보다 헌법의 권한 집중 현상을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87년 개헌에서 가장 잘 한 일'로 헌법재판소 도입이라고 평가한 김 박사는 "헌재가 완전 독립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에는 1945년 헌재가 도입됐는데, 임기 12년의 독일 헌법재판관은 국회의원 2/3의 찬성으로 선출되기 때문에 정파와 관계없이 독자적 판결을 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국민들이 헌법소원도 하고 헌재에서 결정도 내리고 하니까 국민들이 헌법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가 높아졌다"며 "독일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첨병이 헌재라고 얘기하듯이 우리나라도 재판권의 실질적 독립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1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개헌논의의 허와 실' 토론회에서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한림대 국제대학원 최태욱 교수도 '대선사투', '승자독식', '지역할거주의' 등으로 나타나는 현재의 대통령제 권력구조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권력구조 개편의 전제는 '정당의 구조화'라고 강조했다. 권력구조를 논하기 전에 정당정치의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인물정치, 지역정치가 주를 이루고 정책성이나 영속성이 떨어지는 우리 정당 문화의 한계로 볼 때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는 정치엘리트들 간의 '과두체제'가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현재와 같은 정치구도에서는 지역 지지기반만 잘 관리해 필요한 최소한의 의원 수만 확보해도 연립정권에 참여할 수 있어 지역 명망가 중심의 지역할거주의를 오히려 창궐하게 하고, 지역 보스들 간에 정권 나눠먹기 양상이 나타나 노동 등 사회경제적 집단들의 이익이 정책과정에 체계적으로 반영될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4년 중임제와 대선과 총선을 일치시키는 이른바 '노무현식 원포인트 개헌'에 대해서는 "오히려 대통령 권력이 더 막강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권력구조 개편보다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법개정 논의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며 "인물이 아니라 정당의 정책과 이념 중심의 선거정치 발전을 위해 비례대표제 전면 도입으로 정당의 구조화를 유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정당의 구조화가 이뤄져 정당 문화가 발전하면 자연스레 의원내각제나 책임내각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토론자로 참석한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도 "영미식 양당제 모델보다는 북유럽의 온건다당제로 나가야 한다"며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완전비례대표제(정당투표)를 전면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민주화 조항 일점 일획도 못 고친다"
이날 토론회를 주최한 천정배 의원은 △민생보호·경제민주화 강화 △책임정치 강화 △국민의 민주적 권리보장 강화 △직접민주주의 강화 등 '4대 강화 방향'을 제시했다.
천 의원은 "고교 1학년까지의 무상교육을 명시하고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김' 조항을 명시해 사실상 비정규직이 사라지게 해야 하고, 국민의 주거기본권 보장 조항도 별도로 독립시켜야 한다"며 "경제민주화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 제119조를 일점일획도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종인 박사도 헌법 제119조 제2항의 경제민주화 조항 등에 대해 "87년 전경련과 싸워 넣은 조항"이라며 "자본주의의 기본으로 자유방임을 얘기하는데 자본주의의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면 체제가 무너지게 된다"고 조항 삭제 목소리를 경계했다.
천 의원은 또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보장 조항을 강화하고 유럽과 같이 미디어 독과점을 막기 위한 조항도 신설하며, 유신헌법에서 삭제된 국민발안제도를 부활하고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도도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 의원은 다만 '권력구조'에 대해서는 이원집정부제 반대 의견을 나타내며 "4년 중임의 정·부통령 러닝메이트제와 결선 투표제를 도입 및 대선 총선 시기 일치를 제안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감사원의 국회이관, 정부입법 금지, 통산협상 등에 관한 체결비준권의 국회 보유 등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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