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댓글이야 무시하면 되고, 또 무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 맘속에 가시를 한 조각 남긴 댓글도 몇 개 있었다. 표현들은 정교하지가 못했지만, 기독교도라면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해 시비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의견들이 있었다. 이 독자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생각에서 그런 의견을 남겼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기어이 짐작하자면 비판과 강요를 구분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 것은 개혁교회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간판만 내걸면 무슨 짓이 벌어지더라도 침묵으로밖에 대응할 수 없다는 발상은 기독교와 상관이 없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는 말이 한국 교회에서 서양의 경험과는 영판 반대로 이해되고 있는 증좌가 이 근처에 있다.
교회에서 정치얘기를 하면 정교분리에 위배되는가? 아마 기독교도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신도들 또는 무신론자들도 그렇다고 답할 사람이 한국 사회에는 압도적으로 많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치라는 것을 공동체의 사업 전반을 가리키는 뜻, 다시 말해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의 구조라고 이해하기 보다는,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의식 및 무의식의 깊은 곳에 짙게 깔려 있다. 게다가 두 개의 왕국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구분이라든지, 정치권력에게 저항은 하지 말라고 했던 루터의 입장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면 현세의 권력에게는 그저 순응하는 것만이 기독교도의 길인 듯 착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루터도 양심에 어긋나는 명령에 따르지는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저항하지 말라고 한 그의 말은 악에게 악으로 맞서지 말라는 뜻이지, 권력에 순응해서 악행의 하수인이나 방조자가 되라는 뜻은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표면적으로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가 불씨를 당겼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된 공로로써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작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당연히 교황 무류설을 부인하는 함축을 가진다. 교황을 포함해서 인간은 누구나 죄인일 뿐이기 때문에,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만으로 실제로 옳다는 보장을 받을 수는 없다. 개신교에서 종교적 관용이 강조되고, 신앙의 문제를 개인이 신 앞에 직접 대면하는 관계로 바라보는 까닭이 여기 있다. 지금은 로마 교회도 중세 가톨릭으로부터는 개혁된 상태이기 때문에 면죄부를 판매하지도 않고, 교황 무류설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는 이런 배경 위에서 보지 않으면 엉뚱한 오해를 낳기 쉽다. 교회에서 정치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발상이 바로 그런 오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명박 장로를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지지했거나, 적어도 당선된 후에 환영했던 많은 기독교도들을 어떻게 할지부터 걱정해봐야 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조찬기도회를 폐지한 것 때문에 속상해 했던 목사들은 교회에서 정치얘기를 한 것일까 안 한 것일까? 내가 지난 번 칼럼에서 불가지론의 입장에서 (또는 신앙이 부족한 탓에) 제기한 물음을 정권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한 시각은 정교분리에 가까울까 정교통합에 가까울까?
▲ 2207년 12월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 강당에서 '생명과평화를 향한 2007 기독교대선연대'가 이명박후보의 사퇴와 특검을 통한 재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뉴시스 |
개혁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추구되는 정교분리의 원리는 신앙과 권력을 분리하는 취지라고 이해해야 맞다. 국가라는 권력의 나와바리와 교회라는 권력의 나와바리를 구분하는 취지가 아닌 것이다. 신앙이란 곧 양심으로서, 마틴 루터나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그랬듯이, 현세의 권력에 대한 비판을 배제할 수가 없다. 그때 권력은 국가 권력이든 교회 권력이든 자본의 권력이든 상관이 없다. 권력이 부당하게 행사되고, 그 와중에 이웃들이 눈물을 흘리다 못해 맞아 죽기까지 한다면, 신앙인이라면 종파를 막론하고 마땅히 반대의사를 표현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기독교 장로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 그런 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면, 마땅히 기독교도들이 일어나 적어도 장로 직분만큼은 회수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무단통치를 무력으로 응징하는 일은 신의 섭리에 의지할 수밖에 없겠지만, 약자들을 죽여가면서 남은 사람들만 잘 먹고 잘 살자는 배포에 대해서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마다해서 안 되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이 개인의 신앙과 양심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정교분리다. 그러므로 정교분리를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물증을 가지고 행동을 단속하는 데에 집중하기는커녕, 상대의 의도를 의심하는 데서 출발해서 끼워 맞추기 수사를 부쩍 재현하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경찰과 검찰을 비판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정교분리란 특정한 신학이나 교리나 이념을 개인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언론사의 사장들을 억지로 바꾸고,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에 재갈을 물리려는 권력부터 정교분리의 이름으로 성토되어야 마땅하다.
다시 말해, 교회에서는 정치얘기를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이 정교분리다. 물론 교인들 가운데 정치얘기가 싫은 사람은 정치얘기를 할 필요 없다. 단, 다른 사람들이 정치얘기 하는 것을 교회의 이름으로 막으려고 시도한다면, 바로 그런 행위야말로 개인의 이념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셈이 된다. 발언과 비판은 공론의 영역으로서, 결코 강요를 함축하지 않는다. 공론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 자들만이 공론으로부터 압박감을 느끼면서, 공론에게 폭행을 가할 빌미를 찾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정치얘기가 활발하게 논의됨으로써 권력의 버릇이 순화되고 대의정치의 기틀이 마련된다는 사실은 이미 19세기 초에 미국에서 토크빌이 관찰한 바 있다. 물론 토크빌은 바로 그것이 정교분리의 올바른 취지라는 점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교회가 정치에 관해 침묵한다는 것은 정교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정교통합이 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권력이 마땅한 한계를 넘어서 개인의 내면세계까지 침범해 들어오더라도 교회는 침묵을 지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다수가 정교분리를 그렇게 피상적으로만 이해한다면,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정치에 침묵하는 순응주의에 빠지기 쉽다. 그렇게 되면 권력은 자제력을 잃고 아무렇게나 날뛰면서 사회평화를 무너뜨리는 주범으로 전락한다. 양심과 신앙이 따로 놀아도 되는 사회란 그런 종말을 스스로 예비하는 꼴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촉구한다. 기독교도라면 현재의 장로 대통령에 관해 자신의 평가를 공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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