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대한민국은 양심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볼 수는 없다. 전교조는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방식을 우려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했다가, 수색 대상이 되었다. 민주노동당의 한 간부는 친북활동혐의로 체포되었는데,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집안 책꽂이에 꽂혀있었던 것이 증거물로 압수되었다고 한다. 마르크스를 비판한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표지가 빨개서 압수되었다든지, 막스(Max) 베버의 저서가 칼 맑스(Marx)의 저서로 오인되어 압수되었다는 전설의 시대가 다시 찾아오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다. 김경한 법무장관이나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막스 베버와 카를 마르크스의 차이를 얼마나 알 것 같으냐고 누가 내게 물으면, 뭐라 대답해야할지 사실 자신이 없다.
양심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과거에는 가끔, 지금은 자주, 아주 과거에는 일상적으로, 이뤄지다 보니까,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양심의 자유를 국가권력에게 침해당하는 사람들이 대략 어떤 양심을 가지고 사는지를 비교적 분명하게 이해할 수가 있다. 반면에 종교의 자유는 과거나 현재나 거의 무제한으로 허용되다 보니까 한 가지 나쁜 점이 있다. 무슨 무슨 종교라는 집단, 또는 거기 속한다고 하는 어떤 개인이 어떤 종류의 양심을 가지고 사는지 종교의 명목만 봐서는 거의 알 길이 없다.
나는 명목상으로 장로교단에 속하는 세례교인이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처음부터 줄곧 기독교도들이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불가지론 이상으로는 수용한 적이 없다. 유학 시절에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받은 직후, 학교에서 미국인 동료와 대화하던 중 "믿는 사람(believer)"과 "믿지 않는 사람(non-believer)"을 구분해서 말했다가 바로, "그때 '믿는다'는 게 뭘 믿는 건데?"라는 반문을 받았었다. 대답을 못했고, 그 후로 다시는 그런 식으로 구분하는 어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직도 "뭘 믿는지"에 관해 대답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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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은 보도를 보니 소망교회의 장로라고 한다. 한국 장로교에서 흔한 어법으로 말한다면 "신앙이 좋은 사람"에 속할 확률이 모르긴 몰라도 꽤나 높을 성싶다. 그런데 그는 뭘 믿는 것일까? 아마 "여호와"라고도 불리고 "하나님"이라고도 불리는 모종의 신을 믿는다는 데까지는 대답이 금방 나올 것이다. 그런데 "신을 믿는다"고 할 때, 그 "신"이 뭘까? 나는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인간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신이 뭔지를 대답한다는 것은 인간이 사용하는 범주 안에 신을 체포하는 셈과 같고, 그렇게 인간에게 포박당하는 존재라면 전지전능한 만유의 창조주로서 시간 밖에서 영원히 언제나 어디에나 편재(遍在)하는 신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뭘 믿는 건데?"라는 반문에 대답을 못했고 지금도 못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만약 말로 뭔가를 얘기해 보려면 "신이 뭐냐"고 묻기보다는 "신을 믿는다는 일이 뭘 어떻게 하는 일인지"를 묻는 편이 좀더 낫다고 본다. 물론 질문을 이렇게 바꿔도 까다롭고 논쟁적이기는 마찬가지라서 신학이나 철학계의 논문이라면 몰라도, 대중적인 신문 칼럼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기는 곤란할 듯하다. <프레시안>의 독자들이 아무리 참을성이 많아도 그런 (아주 장황하면서도 초점이 흐리멍덩할 수밖에 없는) 논의까지 참기에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다행히 대략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훌륭한 소재가 있다.
"바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한국인 둘이 2009년에 이승을 하직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인데, 기독교 얘기니까 노무현보다는 김수환이 훨씬 좋은 예일 것이다. 바보 김수환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고 한다. "사랑"이라는 말 역시 "예수"라는 말이 커져버린 만큼이나 너무나 거창한 포장으로 덮여버려서 군데군데 때가 끼고 어쩌면 고름까지도 한구석에 맺힐 지경이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의 이명박 장로가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잘 안 보이는 게 내 영혼이 각박한 탓은 아닌 것 같다.
김수환 추기경은 친일의 혐의도 있고, 독재자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겪었으며, 만년에는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지적도 받았다. 그 정도 유명했던 인물에게 그 정도 논란이야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대체로 신사였고,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겸손한 언행을 보이면서 평화를 위해 많이 참는 사람이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그가 실지로 살 수밖에 없었던 삶보다 더 높고 많은 기대치를 설정해놓고 거기에 못 미쳤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그가 한 사람의 기독교도로서 상대적으로 돋보인다는 데에는 시비를 걸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신을 믿는다는 게 뭘 어떻게 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예시적인 대답으로서 김 추기경의 사례가 괜찮은 소재일 것 같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많이 참는 신사라면 일단 신을 제대로 믿는 사람으로서 후보군에 안전하게 들어 갈 것 같다. 반면에 강퍅하고, 오만하고, 성질 급한 독선적인 사람이라면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를 믿는다고 연관짓기 위해서 상당히 특별한 해명이 필요할 것 같다. 조지 W. 부시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고, 아랍계라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까지 하면서, 말로만 떠들어댄 신은 하마스나 탈레반 같은 이슬람 전사들이 무기 끝에 매달아 놓은 신과 닮았지 기독교의 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세 가톨릭의 십자군이나 종교재판과 영락없이 닮은꼴이지 십자가에 못박혀죽은 예수와는 어떤 각도로 투영해도 겹쳐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미국에서는 마크 샌포드라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지사가 공무로 출장 간다고 거짓말을 해놓고 숨겨놓은 애인과 밀회를 즐겨온 사실이 발각 되었는데, 이 역시 틈만 나면 기독교를 팔아서 진보이념을 공격해 온 사람이라고 한다. 이 일이 발각된 다음에도 계속 신과 성경을 들먹이면서 "가족의 가치"를 입에 담는다고 한다. 나는 남의 연애지사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연애를 한 것까지는 별로 논평할 가치가 없는데, 기독교의 이름으로 문화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사람이 스스로 정반대의 행태를 보여 놓고서, 계속 기독교를 팔아먹는 언행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여하간 기독교가 무엇인지 논쟁거리임은 분명한 것 같다. 이명박 장로 대통령이 믿는 기독교는 어떤 버전인지 대단히 불투명한 것도 분명한 것 같고, 그게 어떤 버전이든지 김수환 추기경의 버전과 크게 다른 것도 의문의 여지가 별로 없을 것 같다. 사랑, 온유, 겸손, 인내 등에서 너무나 딴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계산을 잘 뽑아보면 한국에 기독교도가 천만 명도 넘는다고 통계가 잡히는 모양인데, 그들 가운데 이명박 장로의 행태를 기독교도로서 승인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누가 이런 것은 여론조사를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한국 기독교에서는 개인의 양심이라는 것이 별로 중시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도이기만 하면 장로 대통령을 무조건 지지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속으로 승인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기독교도로서 장로를 비판한다는 게 민망해서 말을 안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더 많은 기독교도들이 자기 생각과 양심을 공개적으로 토로하는 것이 기독교 정신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신이 뭐냐"라는 형태로 묻건, "신을 믿는다는 게 뭘 어떻게 하는 것이냐"는 방식으로 묻건, 기독교의 신도라는 명목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가 드러나려면, 자기 생각과 양심을 공론장에서 도마 위에 올려놓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퍅하고 오만하고 성질 급하고 독선적인 행태는 신을 믿는 사람이 보일만한 행동으로서 썩 제격은 아니다. 이 나라의 검찰과 경찰과 구청과 문화관광체육부와 교육과학기술부와 기타 등등 정부기관들이 지금 나타내는 작태들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으로는 전혀 보이지가 않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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