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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트르퐁의 피아노 치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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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트르퐁의 피아노 치는 노인

[김작가의 음담악담] 프랑스의 문화 정책, 한국의 문화 정책

이씨레물레노는 파리의 남서쪽에 있는 작은 소도시다. 말이 소도시지 마을 정도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파리의 규모가 영등포구만하다는 걸 알면 그보다 훨씬 작은 이 곳의 규모가 짐작이 될는지 모르겠다. 파리와 바로 붙어있기 때문에 파리 시내로 출근하는 중산층이 주로 거주하고 있으며 유로스포츠, 캬날 플뤼스 등 대형 방송국들의 본사가 있는 작지만 쾌적한 도시다. 이곳과 파리 시내를 잇는 교통은 지하철(메트로)과 버스, 그리고 일종의 수도권고속철도인 RER이다. 이 RER은 로마시대의 수도교를 연상케 하는 아치형 다리로 시내를 관통하는데, 시청광장에서 걸어서 약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특이한 시설이 존재한다. 앙트르퐁(L'entrepont), 다리 밑의 빈 공간에 지어진 400평방미터의 공간이다.

▲ ⓒ김작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평생교육원 같은 개념지만 그 내용이 다르다. 교육이 아닌 예술장려가 이 기관의 주목적이다. 앰프와 악기를 갖추고 있는 리허설 룸, 여기서 연주하는 음악을 녹음할 수 있는 스튜디오, 어쿠스틱 공연 및 합주를 할 수 있는 미니 공연장, 그리고 회의실겸용으로도 쓰이는 보컬 연습실이 들어서 있다. 중요한 건, 이런 공간을 이씨레물레노에 사는 누구나 우리 돈으로 연간 1만 원의 회비만 내면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80% 이상의 국민이 하나 이상의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프랑스의 환경에서 이런 시설이 있을 때 발휘할 수 있는 효과는 익히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이씨레물레노의 지역 아티스트만으로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7년째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양과 질, 모두 훌륭해서 다른 지역의 아티스트를 섭외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다른 지역에서도 이 페스티벌을 보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하니 이씨레물레노의 문화적 역량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앙트르퐁의 운영방식을 보면 진정한 '실용'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야말로 취미 생활의 차원에서 앙트르퐁을 이용하는 사람부터 프로 뮤지션을 꿈꾸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층위의 욕망들을 적극적으로 분배하고 소통한다. 즉, 정기적으로 이용하며 발달하는 이용자의 역량을 이곳의 엔지니어가 체크, 사용 시간대나 이용 횟수를 조절하는 등의 적극적인 피드백을 줌으로써 이용자의 역량을 더 강화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한다. 보통 이런 시설은 이용자를 위한 공간 못지않은 사무 공간이 있기 마련이지만 1층 프론트와 2층 회의실 옆에 있는 두 세 평의 방이 사무공간의 전부다. 그보다 훨씬 큰 공간이 지하에 마련되어 있다.

앙트르퐁의 벽에는 늘 전시회도 열린다. 역시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진가와 화가의 전시다. 그들은 지역 뮤지션의 사진도 찍는데, 그 퀄리티가 상당하다. 프로 뮤지션의 사진을 프로 작가가 찍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창작자에 대한 실질적 지원이 계속 된 결과다. 그런 실질적 지원을 잘 볼 수 있는 공간은 역시 RER을 따라 걷다 보면 나온다. 다리 밑 곳곳을 채우고 있는 반원의 건물들, 아티스트들을 위한 아틀리에다. 다른 건물을 짓기 곤란한 다리 밑에 있기 때문에 건축에 드는 보상비도 들지 않고, 덕분에 아티스트들은 3층으로 마련된 쾌적한 아틀리에에서 작업을 할 수 있다. 위로 고속전철이 씽씽 달리는 데도 아틀리에 내부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심한 방음 설계도 눈에 띈다. 물론 이런 방음 시설은 앙트르퐁에도 동시에 적용되어 있다. 앙트르퐁은 조타실이란 의미다. 이씨노물레노의 문화양성정책은 바로 이 조타실에서 싹을 틔운다.

여기서 한국 문화 정책의 현실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저런 문화 예산이 책정되지만 실질적으로 아티스트에게 도움을 주기 보다는 '눈먼 돈'을 노리는 이들에 의해 줄줄 새나가는 현실을. 대중예술과 순수예술, 전통예술과 현대예술의 선을 그어버리고 어느 한 쪽에 편향된 지원이 당연시 되는 현실을. 그 마저도 학맥과 인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또한 '결과'에 목을 매는, 그래서 공무원식 서류 작성을 잘하는 이들이 지원 선정에 있어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현실을 말이다.

문화 정책이라는 개념이 등장한지 20년이 되지 않는 한국이지만 그 중에서나마 가장 잘 운용됐던 시기는 국민의 정부 시절로 평가받는다. 그 시기 문화 정책의 캐치 프레이즈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로 상징된다. 문화의 발전은 간섭하지 않는 무제한의 자유에서 이뤄진다. 이를 가능케 하는 건 경제력이 되지 않는 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현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공간이다.

지역 문화가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의 토양에서 필요한 건, 서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데 혈안이 된 온갖 기묘한 지역 축제가 아니다. 관료주의에 찌들대로 찌든 문화정책이라는 이름의 돈놀이 사업도 아니다. 지역의 숨은 아티스트들이 재능의 경쟁력을 싹 틔울 수 있는 자유창작의 공간이다. 앙트르퐁 보컬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 연습을 하고 있던 노인처럼, 누구나 경제력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이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한국에도 지역 문화, 지역 예술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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