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 기간 동안 일정 통화가 거래에 얼마나 많이 쓰였는가를 나타내는 횟수인 통화유통속도가 통계 집계 이래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과잉유동성 우려가 나올 정도로 돈이 많이 풀리고 있지만 실물경제는 여전히 마비된 상태인 '돈맥경화'가 더 심화되는 셈이다.
7일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지난 1분기 통화유통속도는 0.687에 머물렀다. 경제위기가 최악의 상태를 지났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4분기까지 0.7 이상을 유지하던 통화유통속도는 오히려 더 떨어졌다.
통화유통속도는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광의통화(M2)로 나눠 계산한다. 기업의 매출채권회전율과 비슷한 개념으로 통화유통속도가 1이면 한 단위의 통화로 거래가 한 번 일어났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석유생산업체 A사가 현금 1만 원으로 B사로부터 자동차를 구입했고 B사는 이 현금으로 일정 기간 동안 아무런 거래를 하지 않았다면 현금 1만 원으로 만들어진 생산액은 1만 원이며, 통화유통속도는 1이다(자동차 1만원/거래대금 1만원).
한국의 경우 지난 1970년대까지만 해도 통화유통속도가 3.0을 넘어섰으나 이후 경제규모가 점차 대형화하고 외상거래가 늘어나면서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경제위기가 심화된 지난해 3분기 처음으로 0.75선이 무너졌고 올해 들어 이 추세는 더 악화되고 있다.
통화의 거래 빈도가 줄어들면서 통화량의 증감을 나타내는 지표인 통화승수(M2/본원통화) 역시 하락추세다. 통화승수는 지난해 3분기 26.68을 기록한 후 2분기 연속 하락하면서 지난 1분기에는 22.68까지 떨어졌다. 통화승수가 떨어진다는 것은 은행의 신용창출로 생겨난 통화를 기업 등 경제주체가 투자 등의 자금 선순환에 이용하지 않음을 뜻한다. 역시 돈맥경화 현상을 보여주는 지표다.
시중에 유동성이 넘쳐나 주가 등 일부 경제지표가 활황을 보이는데도 돈이 제대로 돌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신용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경제 주체들이 거래 상대방을 믿지 못해 현금거래가 일어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국가 경제 전체가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해법은 기업 등 경제주체의 조속한 구조조정 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구조조정을 통해 시장에서 퇴출될 대상을 명확하게 알려야 옥석이 가려져 돈이 갈 곳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무역학)는 지난 4일 열린 '위기국면의 판단과 향후 구조조정 방향' 세미나에서 "대기업과 시중은행의 재무정보 투명성이 매우 낮다"며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국민 사이에 컨센서스로 이뤄지기 위해 기업의 진짜 미시적 데이터를 일반 국민도 접할 수 있도록 투명성을 제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업계는 채권단 신용공여액 500억 원 이상인 434개 대기업 중 30여 곳이 워크아웃 또는 퇴출 대상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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