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금호아시아나그룹과 함께 재계 구조조정 1순위로 지목되던 두산그룹은 유동성 논란의 늪에서 벗어날 계기를 마련했다. 대우건설 재매각을 놓고 산업은행과 줄다리기 중인 금호아시아나와 달리 두산그룹은 "구조조정마저 선도한다"는 긍정적 평가까지 덤으로 얻었다.
그러나 불안감을 완전히 떨친 것은 아니다. 매각대상 기업의 미래 실적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계열사 매각대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룹 유동성 저하의 근본 원인인 밥켓의 실적개선이 없이는 부정적 시각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
약아빠진 곰의 군살빼기…다른 기업들도 벤치마킹할 듯
두산그룹의 구조조정안은 계획대로만 이행된다면 곰이 재주도 부리고 돈도 벌게 된다. 3일 두산타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두산그룹은 당초 시장이 예상한 대로 ㈜두산 계열사인 병뚜껑 제조업체 삼화왕관 사업부문과 버거킹, KFC 등 프랜차이즈를 보유한 SRS코리아 등 두 개 회사와 함께 방산업체인 두산DST와 한국우주항공산업(KAI) 지분 전량(20.54%)을 총 7808억 원에 매각하겠다고 밝혔다.
세부 매각 가격은 두산DST 4400억 원, KAI 지분 1900억 원으로 두산인프라코어는 이번 구조조정으로 총 6300억 원을 확보하게 됐다. SRS코리아와 삼화왕관 사업부문은 각각 1100억 원, 408억 원에 매각된다.
두산DST는 두산인프라코어의 자회사다. 두산인프라코어는 그룹의 골칫덩어리 밥켓을 보유하고 있고, KAI 지분을 같은 비율로 삼성테크윈, 현대자동차와 나눠가지고 있다.
이번 구조조정의 특징은 두산그룹이 주도권을 그대로 쥐게 된다는 점이다. 금호아시아나 등 최근 유동성 곤란을 겪는 재벌그룹 대부분이 채권단에 주도권을 내주고 질질 끌려 다니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금호아시아나는 불과 3년 전 인수한 대우건설을 재매각해야 한다는 산업은행의 요구에 타협안을 찾느라 부산한 모습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이번 두산의 구조조정 안을 보고 "확실히 약았다"고 표현했다. 시장에서는 두산의 이번 매각 방법을 다른 그룹에서도 벤치마킹할 것으로 내다본다.
금융기관은 FI로 참여, 경영권은 여전히 두산이
차별화 핵심은 사모투자펀드(PEF)의 유입이다. 4개 계열사 매각은 크게 두 가지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단계로 매각대상 기업을 관리하기 위해 특수목적회사(SPC)가 설립된다. 이 특수목적회사는 ㈜두산이 세운 DIP홀딩스와 이번 매각에 참여한 미래에셋PEF(미래에셋 5호 사모펀드)와 IMM 프라이빗 에쿼티(IMM 로즈골드 사모펀드)가 2700억 원을 끌어들여 설립한 오딘 홀딩스 등 두 곳이다.
㈜두산은 총 2800억 원을 출자해 DIP홀딩스를 만든다.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상하 두산인프라코어 기획조정실 기업금융프로젝트(CFP)팀 전무는 "삼화왕관 사업부문과 SRS코리아 매각대금으로 1500여억 원을 받기 때문에 순 출자액은 1300억 원이다. 회사의 현금 보유량을 감안하면 무리한 수준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업계는 두산그룹이 보유한 현금 및 현금등가물 가치를 2조5000억 원 수준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 두 SPC는 매각기업 4곳의 지분을 각각 51(두산 측) 대 49(PEF 측) 비율로 나눠 갖는다. 일종의 조인트 벤처로, 자연히 경영권은 두산그룹이 갖게 된다. 기존 경영진과 종업원의 지위도 그대로 유지된다.
이에 대해 유정헌 미래에셋PEF 대표는 "저희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매각 기업을) 샀다고 판단한다. 회사를 인수할 때는 경영 리스크가 있기 마련인데, 회사 경영진이 업종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들인 만큼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해나가리라 믿었다"고 말했다. 대신 PEF에 출자한 재무적 투자자(FI)들은 이사회에 참여해 회사경영 전반에 대한 정보나 방향 등을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FI의 국적은 한국계로 알려져 외국계 투기자본의 국내기업 쇼핑 논란은 일어나지 않을 전망이다. PEF 측은 "자본시장통합법 상 투자자를 공개할 수는 없지만 연기금과 은행 등 대한민국 기관투자자가 FI"라며 "외국계 투자자는 환율 문제 때문에 한 펀드에 담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SPC 운영 기간은 최대 5년이다. 만일 3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한 쪽이 지분매각을 원할 경우에는 다른 쪽이 무조건 동참해야(드래그 얼롱, Drag Along) 한다. 일방적인 계약파기로 인해 한쪽이 손해를 입을 경우를 대비해 매각 시에는 상호 우선매수권을 부여했다. 3년 이내라도 높은 가격에 기업인수를 제안하는 곳이 있다면 상호 협의 하에 매각이 가능하다.
▲두산의 SPC를 통한 구조조정 모델(두산그룹 제공). ⓒ프레시안 |
두산이 이번 구조조정 발표로 얻은 것은 또 있다. 우선 금호아시아나 그룹의 발목을 잡은 계약조건인 풋백옵션 조항이 표면상으로는 전혀 명기되지 않았다. 유 미래에셋PEF 대표는 "FI들은 아무런 부대조건 없이 순수한 투자목적으로 출자했다"라고 했다.
만에 하나 매각 계열사의 기업가치가 매각가격보다 높아지지 않더라도 두산 측이 FI들에게 보상해줘야 할 부담을 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4조 원에 달하는 풋백옵션 이행 부담으로 알짜배기 계열사를 팔아야 할 처지에 놓인 금호아시아나그룹과 크게 대비된다. 이를 두고 한 인수합병 전문가는 "이면계약이 있지 않았겠느냐. 이익 보전 없이 FI가 참여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라고도 했다.
차후 그룹의 실적부담도 완화됐다. 밥캣 인수 당시 국내외 12개 은행으로부터 29억 달러(약 3조5000억 원)의 차입금을 조달하면서 체결했던 에비타(EBITDA, 영업이익현금흐름) 배수(차입금/밥캣의 영업이익흐름) 조항이 기존 5~6배에서 오는 2012년까지 7배 유지로 완화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에비타 배수가 7배 이상일 경우에만 영업이익 부족분을 두산인프라코어 인터내셔널(DII, 밥캣 경영을 위해 미국에 설립한 지주회사)이 채우면 된다.
당초 차입금의 20% 이상 영업이익현금흐름을 유지해야만 하던 조항이 14% 수준으로 낮아져 최악의 실적 악화를 보이던 밥캣이 그룹 전체에 미치던 악영향도 그만큼 줄어든 셈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효과로 "구조조정을 선도한다"는 이미지를 시장에 확실히 각인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구조조정을 위한 계열사 매각이지만 방점이 '구조조정'이 아니라 '매각'에 찍혀 시장에 "잘만 팔면 두산이 SPC 출자자금으로 투자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됐다"는 신호를 보냈다는 얘기다. 이 역시 채권단이 구조조정을 주도하면서 초점이 '구조조정'에 찍혀버린 다른 재벌그룹과 대비된다.
전상경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대체로 국내 재벌의 구조조정은 급한 불이 떨어진 다음에야 '파이어 세일'로 이뤄졌는데 두산그룹은 FI 두 곳을 유치했다"며 "FI는 투자대상의 미래가치를 고려하기 마련이다. 매물의 미래가치를 높게 봤다는 뜻이다. 정상적인 경제적 거래가 이뤄졌다는 점과 구조조정으로 인한 일자리 상실도 막았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장근호 하나대투증권 수석연구위원도 "일단 정부나 채권단에 주도권을 내주지 않고 그룹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며 "상황에 쫓겨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시장이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했다"고 평가했다.
문제점은 없나
일단 시장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계열사 지분 정리 소식이 나고도 두산그룹주가 일제히 하락했지만 이는 이미 주가에 선반영된 재료가 확인됐기 때문이라는 게 시장의 대체적인 평가다.
장 수석연구위원은 "밥켓 관련 이슈가 이번 구조조정 계획으로 상당부분 해소됐다"고 설명했다. 이번 매각으로 두산인프라코어 가 챙긴 금액은 전량 밥캣의 유동성 충원에 사용될 전망이다.
다만 무조건적인 찬사는 금물이다. 우선 이번 구조조정 방안이 '성공했다'라는 주장의 전제는 4개 계열사의 미래가치가 지금보다 더 높아진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했다. 실현되지 않은 수익이다. 이들 계열사 실적이 곤두박질쳐 헐값에 매각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두산그룹과 PEF 측의 투자수익은 급격히 낮아지게 된다.
이와 같은 우려에 대해 이 전무는 "사업구조를 보면 두산DST와 KAI는 방위산업체라 수주산업군에 속한다. 실적이 나빠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 SRS코리아와 삼화왕관 역시 소비재이지만 실적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구조조정 와중에도 두산이 경영권을 쥐고 있다는 점 역시 뒤집어 보면 약점이 될 수 있다. 계열사들의 경영권을 그대로 갖고 있다는 말은 곧 계열사 경영권이 완전히 제3자에게 넘어가야(완전 매각이 성사돼야) 구조조정 효과를 100% 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룹을 옥죈 밥캣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다. 1분기 두산인프라코어는 영업이익 440억 원을 기록하고도 당기순손익은 1238억 원 적자를 기록했다. 지분 51%를 가진 밥캣의 부진 때문이다. 지분법 손실액만 2200억 원에 달한다.
다른 계열사 사정 역시 마찬가지다. 151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한 두산엔진은 아예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게시판에 따르면 3월말 현재 두산엔진은 자본금 300억 원에 자본총계가 -585억 원으로 완전자본잠식상태다. 지난 1999년 출범 이후 처음이다. 역시 밥캣에 대한 지분법 평가손실과 파생상품 손실 때문이다.
두 회사가 부진의 늪에 빠지면서 모회사 두산중공업 역시 지난해보다 130% 늘어난 946억 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하고도 1785억 원의 당기손실을 기록했다. 두 계열사의 지분법 손실 때문이다.
장 수석연구위원은 "일단 이번 구조조정 안으로 어느 정도 시간을 확보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밥캣의 영업력 회복"이라며 "시장이 살아나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세계 경제가 활기를 띄어야 그룹의 불안요소가 완전히 해소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밥캣은 어떤 회사?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발목을 잡는 '희망' 요소는 대우건설이다. 밥캣은 두산그룹에 똑같은 의미를 지닌다. 중공업 부문을 핵심역량으로 키우겠다는 그룹의 의지가 응축된 기업이고, 세계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뜻을 알린 상징이기도 하다. 밥캣은 소형건설중장비 부문에서는 독보적인 영향력을 가진 회사다. 두산그룹은 지난 2007년 7월 총 49억 달러(최근 환율로 약 6조 원)을 들여 두산인프라코어와 두산엔진을 통해 미국 잉거솔랜드사의 밥캣, 어태치먼트, 유틸리티 등 3개 사업부문을 사들였다. 국내업체의 해외기업 인수 규모로는 역대 최대다. 이들 사업부문은 미국과 유럽 등 세계 각지에 2700여개의 딜러망을 보유했고 6개국에 걸쳐 16개 생산공장을 세우고 있어 인수 당시 세계시장 공략을 위한 교두보로는 최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두산그룹은 밥캣 인수로 단숨에 세계 중장비업체 순위 7위권으로 도약했다. 당시 두산그룹은 밥캣 인수를 위해 약 29억 달러에 달하는 빚을 끌어 썼다. 두산인프라코어와 두산엔진이 투자한 금액은 각각 7억 달러, 3억 달러에 불과했을 정도다. 하지만 지나친 차입이 그룹의 발목을 잡았다. 경제위기가 곧바로 이어지면서 건설경기가 급랭해 밥캣의 실적이 눈에 띄게 둔화된 것이다. 게다가 차입당시 조건으로 걸었던 에비타 배수가 5배에 달해 실적 악화로 인한 부족분은 DII가 모두 채권단에 채워줘야만 했다. 그룹전체가 밥캣 하나로 휘둘리게 된 셈이다. 두산그룹은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주류부문에 이어 포장용기 업체 테크팩까지 매각해 9027억 원의 현금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총 4개 계열사를 모조리 정리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두산그룹의 구조조정 규모는 총 1조7000억여 원으로 늘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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