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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노무현의 솔직·열정 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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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돈키호테' 노무현의 솔직·열정 화법

[노무현 어록] "살인마"에서 "운명이다" 까지

"살인마!"라는 고함과 함께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명패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나간 출입문을 향해 날아갔다. 1989년 12월 31일 국회 5공 비리 청문회장에서였다. 전 전 대통령에게 명패가 아니라 더 한 것도 던지고 싶었던 국민들에게 초선 '노무현 의원'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명패를 던진 이유에 대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답변 내용도 울화가 치밀었지만 '우리 당은 조용히 있어라. 평민당(DJ)이 다 뒤집어쓴다'고 통제한 통일민주당(YS)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컸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은 "그 사건 이후 나는 상도동 사람들에게 돈키호테로 찍혔다"고 회고했었다. 돈키호테, 즉 비타협적인 원칙주의는 계보 없는 정치인 노무현의 이후 인생역정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있나"

▲ 민주당 국회의원 시절. ⓒ연합뉴스
'지역주의 타파'라는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상도동 사람들이 찍지 않았어도 영락없는 돈키호테였다.

'3당 합당'에 반대한 그는 '꼬마 민주당'으로 1992년 14대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 나섰으나 역시 낙선했으며, 1996년 15대 총선에서 '3김 청산'을 내걸고 서울 종로에 나섰으나 낙선했다. 1997년 대선 이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후 99년 7월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서 금배지를 다시 달았지만 그러나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며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다시 부산에서 출마했고 다시 낙선했다.

세 번째 부산 출마 도전마저 실패하자 그는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런 그가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가 돼 부산 유세에 나서서 "사자는 새끼를 벼랑에 떨어뜨려 살아 돌아온 놈만 키운다는데 나도 부산에서 세 번 떨어졌지만 대선 후보가 돼 돌아왔으니 확실히 밀어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2005년 7월 청와대 홈페이지에 "(지역주의의 결과로서) 가치와 논리의 논쟁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대결하는 정치가 되니 대화와 타협의 문화가 설 땅이 없다"고 썼고, 얼마 뒤 '대연정'을 제시하면서 "지역주의 극복은 저의 정치생애를 건 목표이자 대통령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언론과 전쟁 불사하는 기개 있는 정치인"

지역주의 못지않게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보수언론'이었다. 언론사 세무조사가 한창이던 2001년 해수부 장관 시절 "정부와 언론이 한 판 붙을 수 있는 것 아니냐. 언론과 전쟁을 불사할 수 있는 기개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02년 대선 직전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는 거대 보수언론에 대해 "내가 한 의미 있는 메시지는 전혀 전달되지 않고, 실수와 말꼬리만 가지고 그것을 시커멓게 뽑아버리는 언론들 때문에 더욱 더 심각하게 타격 받고 그랬던 것은 시대의 문제이지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었다.

집권 초인 2003년 3월 청와대 비서실 워크숍에서는 "언론은 구조적으로 대단히 집중된 권력을 갖고 있지만 국민으로부터 검증이나 감사를 받은 적이 없다. 통제되지 않은 권력, 검증 받지 않은 권력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말했다.
▲ ⓒ사람 사는 세상

"대통령 못 해먹겠다"

그의 직설화법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아 소탈하다는 호평과 경박하다는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대통령 취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선 직전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제가 세속적 언어를 쓰는 것에 대해 불안감은 갖고 있지만, 모두들 능력이 있다고 진심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자회견이나 토론을 마치고 난 후에 사람들이 박수치는 것을 보고, 아 이 사람들이 이제 진정으로 나를 인정하기 시작하는 구나 생각했습니다"고 말했다. 자신의 직설적 화법에 대한 자신감이다.

당시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후 '공동정부' 논란이 일자 "실패한 대통령이 되느니 차라리 실패한 후보가 되겠다"며 저항했고, 대선 직전 유세에서는 '다음 대통령은 정몽준'이라는 피켓을 보고 즉석에서 "속도위반 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정동영도 있고 추미애도 있다"고 못을 박아버렸다.

화제가 된 취임 직후 검사와의 대화에서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요"라는 말 역시 그의 '세속적인' 직설 화법을 그대로 보여준 일화였다. 검찰과 관련해 그는 "우리가 쓴 불법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호기를 부렸는데, 이를 두고 '수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검찰 수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못 해먹겠다'는 말은 이와 같은 직설적 화법에 승부사적 기질이 합해진 결과다. 대선 경선 과정에서 장인의 좌익 활동 경력이 문제되자 "여러분이 그런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신다면 대통령 후보 그만두겠다"고 말했고, 2003년 5월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이 다 양보할 수도 없고, 이러다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고 말했다.

2005년 8월 '국민과의 대화'에서는 "대통령이 이렇게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는 이 상황은 국정이 안정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대통령이 재신임을 받고 결과 여하에 따라서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 있다"고 언급했고, 연정 논란에 대해서는 "권력을 통째로 내놓으라면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2006년에는 "노무현이 하는 것 반대하면 다 정의라는 것 아니겠느냐, 흔들어라 이거지요, 흔들어라.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비난에는 "대통령을 동네북처럼 이렇게 두드리면 나도 매우 섭섭하고 때로는 분하다"고 말했다.

"정치범 수용소" 발언에서 "미국 바짓가랑이 매달려" 발언까지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발언도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선후보 시절 "미국에 안 갔다고 반미주의자냐. 또 반미주의자면 어떠냐"고 말했고, 취임 직후 방미 동포 간담회에서는 "만약 53년 전 미국이 우리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정치범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전지작전통제권' 환수에 대한 신념은 확고해보였다. 2006년 12월 민주평통자문회의에서는 그는 "미국한테 매달려 가지고 바짓가랑이 매달려 가지고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형님, 형님 백만 믿겠다', 이게 자주국가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 있겠나. 자기들 나라, 자기 군대 작전 통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마들어 놔놓고 그렇게 별들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얘깁니다"라고 보수세력을 향해 목청을 높였었다. 그런데 최근 이명박 정부는 이를 백지화할 계획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도 유명하다. 2004년 9월 MBC와의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에 대해 "그 낡은 유물은 폐기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칼집에 넣어서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해 국보법 폐지 논쟁에 불을 당겼지만 결국 박물관으로 보내지 못했다.

2003년 일본 방문 때는 일본 공산당 위원장을 만나 "나는 한국에서도 공산당이 허용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한 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2004년 5월 한 강연에서는 "합리적 보수니, 따뜻한 보수니, 별 놈의 보수를 다 갖다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대운하를 밀고 나올 땐 "제 정신 가진 사람이 대운하에 민자투자 하겠느냐"고 직공했다.

고통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간 봉하 생활

퇴임 후 봉하마을로 귀향한 노 전 대통령이 "정말 딱 말 놓고 하고 싶은 얘기 하겠다"며 말한 한 마디는 "야, 기분 좋다"였다. '기분 좋은' 노 전 대통령은 주변 환경 정비, 친환경 농업 등을 활발히 전개했고, 찾아드는 관광객을 직접 맞이하기도 했다.

그런데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올라온 그의 글에는 행복이 고뇌로 변화하는 과정이 그대로 녹아있다.
▲ 사람 사는 세상.

"하루 종일 저희 집 대문 앞에서 저를 나오라고 소리를 치십니다. 한번 씩 현관에 나가서 손을 흔들어 봅니다만, 그분들도 저도 감질나고 아쉽기만 합니다." (2008년 3월 3일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불러놓고 보니 호칭이 어중간하다 싶네요. 앞으로 어떻게 불러야 할지 좀 더 연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여러분, 여러분을 어떻게 부를까요? 노사모 여러분?, 친노 시민 여러분?, 민주시민 여러분?, 참여시민 여러분?, 국민여러분?, 아니면 그냥 친구 여러분?, 이것도 한번 의논해 봅시다."(2008년 3월 3일 '안녕하십니까')

"생각이 좀 정리가 되면, 근래 읽은 책 이야기, 직업 정치는 하지마라, 하더라도 대통령은 하지마라는 이야기, 인생에서 실패한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2009년 2월 22일 '자신에게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생활, 특히 가족들의 사생활을 보호할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는 스스로의 선택이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2009년 3월 4일 '정치하지 마라')

"강 회장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다. 미안한 마음 이루 말할 수가 없다."(2009년 4월 17일 '강금원이라는 사람')

"언론에 호소합니다. 저의 집 안뜰을 돌려주세요.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부탁합니다. 그것은 제게 남은 최소한의 인간의 권리입니다. 저의 집은 감옥입니다. 집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2009년 4월 21일 '저의 집 안뜰을 돌려주세요')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이제 '사람 세상'은 문을 닫는 것이 좋겠습니다."(2009년 4월 22일 '사람세상' 홈페이지를 닫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5월 23일 뒷산 바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지기 직전 남긴 14줄의 짧은 유서가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진 마지막 메시지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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