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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될거야'라던 믿음, 우직한 직구 승부사와 보낸 이십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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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될거야'라던 믿음, 우직한 직구 승부사와 보낸 이십여년

[김작가의 음담악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며

1979년 10월 어느 날. 집에는 컬러 텔레비전이 없었다. 오후 다섯시였나 탈칵, TV를 키고 드르륵, 채널을 11번으로 돌렸다. 마징가 제트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기운 센 천하 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 주제가 대신 레퀴엠이 흐르고 있었다. 수영장에서 솟아나는 마징가 제트의 모습 대신 향이 피어오르는 영상만 나오고 있었다. 엄마 왜 마징가 제트 안해. 눈물이 많았던 나에게는 충분히 울먹일 수 있는 일이었다. 대통령이 돌아가셨어. 어깨동무를 보고 대통령이 뭐하는 사람인 줄은 알았으나, 그 뿐이었다. 대통령 보다는 마징가 제트가 더 중요했던 다섯살의 꼬마였다. 마징가 제트의 결방을 원망하며, 티비에서 흐르는 레퀴엠의 그 부담스러운 비감을 배경 삼아 때를 쓰듯 울었다. 울면 마징가 제트를 해줄 거라 믿었던 것 같다. 화창한 주말의 늦은 오후였다.

올림픽이 끝나고 1년이 안 지나서였다. 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으며 TV를 봤다. 장세동, 허문도, 허화평, 정호용 같은 인물들이 국회의원들에게 호된 질책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게 없었다. 화통했다. 말과 말의 혈전이었다. 기와 기의 투쟁이었다. 어떤 드라마보다 더 박진감이 넘쳤다. 액션도 없이 그저 대사와 표정만 있는 드라마였음에도. 주인공은 노무현이었다. 장세동과 허문도 허화평, 그리고 정주영과 전두환 등 당대의 거인들 앞에서 한치의 주눅드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가장 기개로운 모습과 가장 치밀한 언변으로 그는 안방극장의 영웅이 됐다. 정치 스타가 됐다. 학교에서도 어제 청문회 봤냐, 재밌지 않냐, 노무현 진짜 멋있더라. 그런 얘기들을 나눴다. 전두환한테 명패를 던진 바로 다음 날, 세상의 이치와 옳고 그름을 냉철히 분석할 능력이 없는 중3 천둥벌거숭이 꼬마들에게 그는 아이돌에 다름 아니었다.

2002년, 그녀는 권영길을 지지했다. 나는 노무현을 지지했다. 우리는 정치 문제를 가지고 종종 다퉜다. 다퉜다기 보다는 논쟁이었지만, 감정을 안 다칠 수는 없었을테니 다퉜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녀에겐 일관된 정치적 철학이 있었고, 나는 국민경선부터 후보 단일화에 이르는 역전에 역전극을 보며 손에 땀을 쥐는 감정적 지지자에 다름 아니었다. 언젠가부터의 미묘한 균열이 그 시기에 결국 회복될 수 없을 만큼 갈라져 버렸다. 우리는 결국 헤어졌다. 제대로 된 첫 연애나 다름없는 관계였다. 상처도 심했다. 말하자면 노무현 때문에 헤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그를 원망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당연한 거지만.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다. 핸드폰도 끊기고 인터넷도 끊겼다.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사무실에서 인터넷을 통해 그의 당선을 지켜봤다. 그가 당선되지 않았다면 인생은 좀 더 암울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5년은 한 명의 사회인이 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그의 취임 첫 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을 했고 그가 탄핵을 당하던 해, 사직을 했다. 지지도 하고 실망도 했지만 정치는 좀 더 먼 일이었다. 점점 늘어가는 원고 청탁과 통장 잔고가 더 기뻤다. 평범한 날들이었다. 어른이 되어 가는 날들이었다. 지지할 때도 있었고 실망할 때도 있었다. 한나라당 지지자인 부모님과 종종 언성을 높여 싸우는 일이 생기는, 노무현 대통령은 딱 그 정도의 존재였다. 잘 될거야라는 믿음, 설마 다시 옛날로 돌아가겠어라는 막연한 기대의 5년이었다. 노무현은 더 이상 중딩의 아이돌도 아니었고 연애의 걸림돌도 아니었다. 정치여 안녕.

그리고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다. 숭례문이 불탔고 노무현은 봉하로 내려갔다. 촛불이 번졌고 정치는 다시 일상으로 기어 들어왔다. 연행과 약식기소, 정식재판청구와 공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날도 공판이 있었다. 주말에 일어난 대사건은 언제나 일탈의 밤 이후에 일어난다. 카우치 사건 때도 그랬다. 그날도 특별한 밤이었다. 아침에 잠들었다. 정오 조금 지나 일어났더니 문자가 와있었다. 노무현이 죽었대. 뭔 말이야, 인터넷을 켰다. 사실이었다. 밀려 있는 일도 뒤로 하고 하루 종일 뉴스만 봤다. 30년 전에는 결방된 마징가 제트 때문에 슬퍼했지만 어제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버린 한 남자 때문에 슬퍼했다.

그는 '적'에게 신념을 집어던졌고 명패를 집어 던졌고 권력을 집어 던졌으며 체면을 집어 던졌다. 더 이상 집어 던질 것이 없어진 그는 결국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 오직 직구만을 던지는 투수처럼 평생을 승부해왔던 남자가 그렇게 갔다. 드라마처럼 나에게 왔던 남자가 드라마처럼 나에게로부터 갔다. 퇴임 직전 불타버린 숭례문만큼이나 허무하게. 무슨 일이 있어도 어쨌든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남자의 육체가 이토록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져 버렸다. 레퀴엠 대신 스즈키 히데미의 바흐 무반주 첼로 연주를 들었다. 벨 앤 세바스찬의 'I Fought In The War'를 들었다. 제프 버클리의 라이브를 계속 듣던 중 'Halleluja'의 가사 몇 구절이 문득 다가왔다.

'대리석 아치에 날리는 당신의 깃발을 본적도 있지만, 사랑은 개선 행진이 아니에요. 그것은 차갑고 깨진 할렐루야.' '당신이 내게 진정 아래로 흐르는 것들을 보여주던 세월이 있었지만 이제 당신은 더 이상 보여주려 하지 않는군요.' 대선 홍보 광고에서 기타를 들고 '상록수'를 부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아마,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어색하고 부끄럽게 민중가요를 부르는 정치인을 만나기 힘들 것이다. 부디 좋은 곳에서, 여유롭게 담배 한 대 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려 보시기를.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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