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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 말라, 삶과 죽음은 하나다"…파란만장 64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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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 말라, 삶과 죽음은 하나다"…파란만장 64년의 삶

[인간 노무현] 농부의 아들에서 인권변호사, 대통령, 돌연한 서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오전 9시 30분 돌연 서거했다. 자신과 가족들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불법로비 의혹과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던 중 투신자살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경남 진영의 가난한 농부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순탄치 않았던 정치역정을 거쳐 16대 대통령을 지내고 퇴임 후 1년 3개월만에 서거하기까지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삶의 마지막까지 그의 '선택'은 항상 보통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이 변호사가 되기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46년 9월 1일 경남 김해군 진영읍에서 과수원을 하는 아버지 노판석(1976년 별세)씨와 어머니 이순례(1998년 별세)씨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그는 6살 때 천자문을 깨쳐 주변에서 '노 천재'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진영 대창초등학교, 진영중학교를 거쳐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부산상고 졸업 후 삼해공업이란 어망회사에 취업했으나 한달 반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고시공부에 매달렸다. 고시공부를 하던 중인 68년 군에 입대, 71년 상병으로 제대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73년 1월 권양숙 여사와 결혼을 했다.

그는 75년 고시에 합격해 77년 대전지법 판사로 임용됐으나 7개월 만인 78년 5월 변호사로 개업했다. "별로 모범적이지도 우수하지도 못했다"는 생각에서다.

▲변호사 시절의 노무현 전 대통령. ⓒ연합

조세전문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로

상고 출신으로 회계에 밝다는 장점을 발휘, 부산지역에서 조세전문변호사로 '잘 나갔던' 노 전 대통령은 81년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로 변신하게 된다. '부림사건' 당시 재야변호사 김광일과 이흥록은 변론을 맡을 변호사를 구하다 노 전 대통령에게 송병곤(부산대 77학번)씨 등 두어명을 맡겼다. 그는 57일간 경찰에 구금돼 온갖 고문을 당한 이들을 접견한 뒤 받은 충격을 이렇게 적었다.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도 믿으려 하질 않았다. 분노로 인해 머리 속이 헝클어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다."

이후 그는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변론에 참여했다. 그의 변호사 사무실에는 대학생 시절 시위 경력 때문에 판·검사 발령을 받지 못한 문재인 변호사(대통령 비서실장)가 합류, 당시 노·문 두 변호사는 부산 지역의 시국사건을 거의 도맡았다고 한다.

87년 6월 항쟁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거리에 나섰다. 그해 9월에는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가 최루탄이 맞아 숨진 사건에 뛰어들었다가 '제3자 개입'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된다. 구속 21일 만에 적부심에서 풀려나지만 11월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는다.

정계입문, 청문회 스타, 잇단 낙선

이런 활동을 기반으로 노 전 대통령은 88년 13대 총선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부산동구에서 민정당 실세인 허삼수 씨와 맞붙어 이겼다. '가자. 사람사는 세상을 위하여'. 그가 내세운 선거 구호였다.

▲ 민주당 국회의원 시절 대정부 질문을 하고 있는 노 전 대통령. ⓒ연합
88년 5공 청문회는 그를 대중들에게 인식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88년 11월, 50%의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온 국민의 귀와 눈이 집중됐던 청문회에서 그는 장세동 전 안기부장,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등을 상대로 특유의 공격적이면서 논리적인 질문으로 '청문회 스타'가 됐다.

그러나 90년 1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씨의 3당 합당으로 그는 정치인생에서 첫번째 난관에 부딪히게 됐다. 민자당 합류를 거부했던 그는 92년 3월 14대 총선에 '꼬마 민주당' 후보로 부산에 출마, 허삼수 씨와 재대결을 벌였지만 참담히 패했다. 95년 6월에는 부산시장 선거에 나섰으나 역시 지역주의 벽을 넘지 못했다.

95년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야당이 분열하자 민주당에 잔류한 그는 이듬해 4월 총선에서 '3김 청산과 세대교체'의 기치를 내걸고 서울 종로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같은 해 11월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발족했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했다.

97년 대선을 맞아 통추는 '3김 청산과 세대교체'를 내건 이인제 후보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는 "3당 합당에 따라간 이인제 씨는 3김 청산과 세대교체의 주역이 될 수 없다"고 반대했고, 김원기, 김정길씨 등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부총재가 됐다.

그는 이어 99년 7월 치러진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출마, 6년만에 다시 국회의원이 됐지만 2000년 4월 부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모두들 만류했지만 "지역주의에 정면 도전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결과는 참담했지만 이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태동의 계기가 됐다.

'노무현 바람' 일으키며 승리한 2002년 대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1년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본격적으로 대선 후보 경선 준비에 나섰다. 돈도 조직도 변변찮은 그를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 정치사상 최초로 도입된 국민참여경선제에서 '노무현 바람'으로 '이인제 대세론'을 무너뜨렸다. 노란 풍선, 노란 목도리, 희망 돼지(저금통)를 앞세운 노사모 회원들의 열광적 지지는 당시 열세였던 민주당에 활기를 불어 넣었었다.

2002년 4월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후 대선을 치르기까지 그는 또다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했다.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의 연이은 참패 이후 이인제 의원을 비롯한 '反 노무현' 진영 의원들의 '후보사퇴' 요구에 시달렸다. 김원길 안동선 의원 등 21명의 의원이 당시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와의 '후보단일화' 등을 요구하며 탈당하기도 했다.

▲ 2002년 대선 승리 후 지지자들에게 화답하고 있는 노 전 대통령. ⓒ연합
벼랑 끝까지 몰렸던 그는 2002년 11월초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요구를 수용했다. 모두들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그는 모든 것을 던졌고, '단일후보'라는 월척을 낚았다. 그러나 정몽준 후보는 선거운동 마감시간이 2시간도 남지 않은 12월 18일 밤 10시 30분, 노 전 대통령의 명동 유세 발언 등을 문제 삼으며 돌연 '공조 파기'를 선언, 그의 당선 가능성엔 먹구름이 끼기도 했다. 하지만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을 등에 업고 노 전 대통령은 극적으로 대선에서 승리했다.

검찰-조중동과 갈등, 탄핵, 연정

김대중 정권에 이은 두번째 민주정권을 이끌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보수세력과 잦은 충돌을 빚었다. '검사와 대화', 조선.중앙.동아 등 보수언론과 갈등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사건들이었다. 2004년 3월 12일 야당인 한나라당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시킨 것은 이런 갈등의 결과였다.

하지만 탄핵사태는 역으로 지지층을 결집시키면서 노 전 대통령에게는 국정을 장악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탄핵으로 노 전 대통령의 업무정지 기간에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과반 의석을 점하게 됐다. 탄핵사태에 대한 민심이 표출된 결과였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그해 5월 헌법재판소의 탄핵안 기각 결정으로 업무에 복귀하게 됐다.

거대 여당을 지원군으로 얻으면서 자신이 내걸었던 '개혁'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됐지만, 그는 2004년 6월 갑작스럽게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제안했다.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선거제도 개편에 합의할 경우 내각제 수준으로 대통령 권한을 이양하겠다는 것이었다. 한나라당이 거부해 연정의 제안한 그의 진짜 속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일은 많은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도 '개혁'을 기대했던 지지자들에게는 실망스런 일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항변하며 미국과 FTA의 필요성을 항변했지만, 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행된 FTA 추진은 '행정 비밀주의'로 절차적 민주주의까지 훼손하면서 진보진영의 강한 비판과 반발을 샀다.

대선 패배, 귀향, 박연차 사건, 돌연한 서거

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등에 업고 집권했으나 보수세력의 저항과 노선 변경 등으로 노 전 대통령은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임기 말년을 맞았다. 그는 2007년 대선을 통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구호에서 보여지듯 자신의 임기 자체를 부정하는 상대당 후보에게 정권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 지난달 30일 검찰 수사를 마치고 나오는 노 전 대통령. ⓒ뉴시스
퇴임 후 그는 약속대로 경남 봉하마을로 귀향했다. 퇴임 후 서울에 남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가 평범하게 사는 모습을 통해 그는 재임 당시 잃었던 신뢰와 지지를 상당 부분 회복했다. 봉하마을에는 관광객들이 방문해 밀집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타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봉하마을을 찾은 인원은 지난 4월 100만 명을 넘어섰다. 한편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 뿐 아니라 토론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하는 등 새로운 정치적 실험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의 평온한 퇴임 생활은 길게 가지 않았다. 2008년 12월 형 건평 씨가 세종증권 매각 비리에 연루, 구속되면서 그의 정치적 무기이자 자산이었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게 됐다. 이 사건으로 그는 사실상 칩거에 들어갔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월 22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앞으로 시간이 나면 글을 올리겠다"고 밝혔으나, 박연차 전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절정에 치달으면서 6편의 글만 올릴 수 있었다. 그는 지난 4월 22일 자신의 홈페이지를 폐쇄했다.

권양숙 여사, 아들 건호 씨에 이어 노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30일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3번째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최근에는 딸 정연 씨 부부까지 연루된 것으로 밝혀졌다. 노 전 대통령은 서울 중앙지검이 권 여사를 불러 조사를 진행하기로 예정된 날을 앞두고 23일 새벽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원망 말라. 삶과 죽음은 하나다." 굴곡 많은 64년의 삶을 마감하면서 그가 짧은 유서에 남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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