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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성이란 오로지 논리적 필연성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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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필연성이란 오로지 논리적 필연성뿐"

[박동천의 집중탐구]<38>선험주의 사고방식의 특징과 결함

제4부 선험주의: 선견지명 프레임
제2장 선험주의 사고방식의 특징과 결함
제2절 "필연성이란 오로지 논리적 필연성뿐이다"


지금 오후 네 시, 해가 질 시간은 아닌데 하늘에는 구름이 짙어서 해는 안 보인다. 먹구름 위에는 태양이 있을까? 이런 질문에 "태양이 있다"로 답해야 하는가, 아니면 "태양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답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태양은 먹구름 위에 있는데 가려서 안 보일 뿐"이라는 대답은 일어나고 있는 사실에 대한 목격자의 진술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전제들로부터 추론되는 논리적 결론인가?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벽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지만 저 방 안에는 아이가 있다"는 명제는 사실에 관한 진술이다. 얼핏 보면 "먹구름 위에 태양이 있다"는 명제도 똑같이 사실에 관한 진술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벽 뒤에 아이가 있다"는 명제는 시간 안에 있는 반면에 "먹구름 위에 태양이 있다"는 명제는 시간 밖에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방에 가보니 아이가 없다면 화장실에 갔거나 어느새 밖에 나갔거니 여기고, 급하게 찾을 일이 있다면 친구 집에 전화를 해본다든지, 집밖에 갔을 만한 데를 찾는다든지 등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먹구름 위에 가봤더니 태양이 없는 경우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태양은 어디 놀러가거나 누가 집어가서 있어야 할 자리에 없을 수도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 ⓒ프레시안

칸트나 뉴턴은 물론이고 호메로스나 공자의 시대에도 구름 위에 태양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물론이고 칸트도 구름 위에 태양을 확인한 다음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니다. 그 명제는 특정 시점에서 구름 위에 태양이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과 구름 사이에 초시간적인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물론 일차적으로 물리적 세계에 관한 진술이지 논리에 관한 진술은 아니다. 하지만 물리적 세계에 관한 진술이면서도, 특정 시점에서 태양과 구름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태양과 구름 사이에 있어야 할 관계, 있을 수밖에 없는 관계를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 "하나의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다른 일이 일어나야 할 필연성은 없다. 필연성이란 오로지 논리적 필연성뿐이다"(『논리-철학 논고』, 6.37). "먹구름 위에 태양이 있다"는 필연성도 따라서 논리적 필연성이라는 말이 된다. 여기서 논리란 해는 날마다 변함없이 떴다가 진다, 구름은 해보다 낮은 곳에 생긴다 따위, 물리적 세계의 기본 생김새에 관한 이치를 가리킨다. "논리는 거울에 비친 세계의 모습이다"(『논리-철학 논고』, 6.13). 지금 저 구름 위에 실제로 태양이 있는지, 그 태양의 모습이 어떠하며, 얼마나 높게 올라가야 구름을 뚫고 태양을 볼 수 있을지 등은 모두 실제로 해봐야 알 수 있는 일이 된다. 반면에 저 먹구름 위에 태양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모습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태양이라는 대상과 구름이라는 대상이 세계의 일부로서 각자 위치를 가지고 움직이는 관계를 전제하면, 먹구름에 가려서 안 보일 뿐 그 위에 태양이 있다는 결론은 그 전제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필연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경우에 작용하는 논리를 논리적 문법 또는 그냥 문법이라고도 불렀고, 또는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도 불렀다. (필자 주: 영어에서 paradigm이란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에서, 동사나 명사의 어미가 변화하는 패턴을 정리한 표를 가리키는 문법용어로서, 15세기부터 사용된 용례가 확인된다. 한국에서는 흔히 패러다임이라는 용어 자체로부터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연상하는 경향이 있는데, 쿤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 발상은 과학혁명을 패러다임 전환(paradime shift)으로 볼 수 있다는 관점이지 패러다임이라는 용어 자체는 아니다. 내가 논의하는 내용에서 누구의 도움을 받았다면 쿤보다는 비트겐슈타인이다.)

앞 절에서 예시한 사례들을 가지고 좀더 따져보자. "360자릿수의 수 360개를 곱하면 정답이 하나"라는 명제는 수와 곱셈의 본질적인 속성으로부터 분석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외부세계의 성격에 관한 정보가 담겨있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태양과 구름의 속성은 물리적 세계의 성격이지만 곱셈의 속성은 그렇지 않다고 치더라도, 그 차이 때문에 명제 A는 종합적이 되고 명제 B는 분석적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자라면서 어떤 시점에서 태양과 구름의 관계나 곱셈에 관해 듣고 배운 결과라고 보면 둘 다 후천적인 지식이다. 그리고 그 지식이 일단 내면에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확립된 다음에, 그것을 아직 잘 모르는 어린아이가 가령 "오늘은 왜 해가 없어요?"랄지, "얼마나 큰 수까지 곱셈이 가능해요?" 따위를 물어온다면, 그 패러다임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정답을 말해줄 수 있게 된다. 선천적 종합명제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한 의문은 기본적으로 이 두 맥락의 차이를 같은 지평에 섞어버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명제 A와 명제 B는 뭔가 선천적 필연성 같은 것을 공유한다. "오늘은 왜 해가 없어요?" 또는 "얼마나 큰 수까지 곱할 수 있어요?"라고 묻는 아이에게 세계와 곱셈의 본질에 관해 대답하는 지평이란 우리가 이미 습득한 패러다임에 곁들여, 그 패러다임을 우리가 당연한 진리로 여기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심리적 자세를 함께 전수해주는 지평이다. 즉, 그런 명제에서 우리가 느끼는 선천적 필연성은 곧 우리가 거기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반영이며, 또 의심을 하고 말고 할 여지 자체가 없다는 논리적 필연성의 반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필연성의 요소가 여기에 있다고 해서 경험을 통한 확인의 필요가 원천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다. 세살짜리 아이에게 "저 먹구름 위에는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단다" 라고 말해줄 때, 아이가 "올라가서 한 번 보고 싶어요" 라고 대답할 수 있다. 대개는 "나중에 볼 수 있다"고 일축하겠지만, 실제로 아이에게 해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항공편을 예약하고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승무원의 지시를 따라야 하며 해가 보이는 쪽 창문으로 내다 봐야 하는 등등, 수많은 우연적인 요소들이 우호적인 방향으로 작용해야 한다. 중간에 사고가 나면 경험적인 확인이 안 되는 것이다. 곱셈 계산의 경우 역시 360자릿수의 수 360개는 고사하고 36자릿수의 수 10개만 곱하더라도, 사람마다 답이 다르게 나올 확률이 대단히 높다. 물론 그런 차이는 "계산 실수 때문"이라고 패러다임에 입각한 설명이 가능하지만, 여전히 그중에 어느 것이 "하나만 있어야 할 정답"인지가 패러다임에 의해 미리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정답이 하나 있어야 한다"는 논리적 필연성과 별도로, 실제 정답이 무엇인지는 실제 정답을 구해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정책이나 체제의 결과에 관한 선견지명이 얼마나 가능한지를 논의하려다 보니 과학철학이나 인식론의 쟁점을 약간이나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 논의를 토대로 일상생활에서 지식의 패러다임 덕분에 미래의 결과를 어느 정도로 예측할 수 있을지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는 자연계에 관한 지식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영역과 사회생활에 관한 지식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영역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사과나무는 사과씨에서 자란다"는 명제는 식물, 즉 자연계에 관한 패러다임적인 지식이다. 그러나 내가 구해서 심은 씨에서 사과나무가 자랄지 말지는 실제로 해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사과나무가 자라나 사과가 열리기 시작한다면, 내가 심은 씨는 사과씨였던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만약 나무가 애당초 자라지 못하고 중간에 죽었다면 어떤가? 씨가 원래 썩었을 수도 있고, 토양이 원래 맞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중간에 내가 충분한 섭생을 제공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과씨라고 믿고 심었는데 사과나무가 자라지 않았다고 해도 여전히 "사과나무는 사과씨에서 자란다"는 명제는 항상 옳은 패러다임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사과씨라고 믿고 심었는데 배나무가 자라서 배가 열린다면 어떨까? 이 경우라도 우리는 결코 "사과씨에서 배나무가 열릴 수도 있다"고는 말하지 않고 "사과씨인 줄 알았는데 배나무씨였던 모양"이라고 말한다. 종묘상에서 포장을 잘못했거나, 도중에 내가 섞었거나, 아니면 씨를 심은 그 자리에 우연히 배나무씨가 있다가 그 놈이 자라나고 내가 심은 사과씨는 중간에 죽어버렸거나, 기타 등등, 우연적인 변수를 통한 설명은 무한히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는 빈도가 대단히 크게 작용한다. 한두 번 있고 마는 일이라면 중간에 무슨 변수가 끼어들었겠거니 치부하고 그냥 넘어간다. 그러나 자꾸만 반복된다면 뭔가 본격적인 설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런 모든 일들의 귀결은 "사과씨에서 사과나무가 자란다"는 패러다임과 상관이 없는 경험세계의 지평에서 발생하며, 그런 일들의 귀결은 패러다임이 아무리 명확하게 확정되어 있더라도 예측이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지적들은 근대과학의 업적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고, 과학의 업적이 선험적인 통찰력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실험과 실습 등, 경험을 통해 발전한 결과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많은 시행과 착오를 거쳐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아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인 것이다. "사과씨에서 사과나무가 자란다"는 패러다임은 논리적 필연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저 씨를 심으면 사과가 열리게 될지에 관해서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실천의 목적에 필요한 지식은 어떤 씨앗을 어떻게 심어 어떻게 기르면 어떤 열매가 맺히느냐는 차원의 지식이다. 그리고 이 차원의 지식들은 모두 오로지 실제로 시도해보고 결과를 살피는 방식으로만, 아울러 많은 예외적 변수와 불확실성을 감내해야 하는 조건이 수반되는 위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

사회현상에 대해서는 과학적 예측이라는 것이 적용되기가 더욱 본질적으로 어렵다. "사과씨를 심으면 사과나무가 자란다"는 패러다임을 실제 실천에 응용하려면, 사과씨를 "제대로" 골라서 "제대로" 심어 가꿔야 사과나무가 자란다는 실제적인 조건이 첨가되어야 한다. 즉, 우연적 변수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패러다임에 의해서 기대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자연계의 영역에서는 그러한 우연적 변수들을 상당한 정도까지 통제할 수가 있다. 종자의 분류와 검사, 토양관리, 비료나 채광 따위 재배방법 등이 다 자연계에 속하는 일들이기 때문에, 시행해보고 착오를 교정한다고 하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경험과학의 절차를 통해 노하우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현상이란 대개 사람들의 가치, 의식, 소원, 원한, 등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들로부터 어떤 규칙성을 찾아내는 순간 바로 그 사람들이 이렇게 발견된 규칙성에 대해 반응함으로써, 결국 처음 찾아낸 규칙성이 더 이상 규칙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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