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부터 11월까지 '박연차 세무조사'를 벌인 국세청이 모두 5개 항목의 결과보고서를 작성하고도 검찰에는 3개 항목만 전달했다. 누락된 2개 항목에는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을 비롯한 여권 인사와 사정기관 관계자 관련 내용이 들어 있으며, 특히 대선 직전인 2007년 11월 박연차 회장이 천신일 회장에게 보낸 것으로 기록된 송금전표도 포함돼 있다. 검찰은 서울지방국세청에 대한 압수수색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으며 이른바 '박연차 리스트' 원본을 확보했다.
확연하다. 두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국세청은 '은폐'를 기도했다. 현 여권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내용만 골라 뒤로 숨겼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이미 제기된 의혹에 기초하면 국세청이 '살아있는 권력'에 부담을 느껴 관련 부분을 고의로 은폐했거나, 국세청 인사들이 현 여권 인사들과 함께 '박연차 로비'에 엮여 살기 위해 은폐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 박연차 회장과 이명박 정부를 잇는 연결고리로 지목되고 있는 천신일 회장 ⓒ뉴시스 |
근데 문제가 있다. 두 가지 추측을 공히 떠받치는 전제가 문제다.
두 추측 모두 국세청의 '자율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국세청의 '박연차 세무조사' 결과에 대해 아무도 몰랐고, 이 때문에 국세청이 세무조사 결과를 제 맘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미 나왔다. 대검 중수부가 '박연차 수사'에 착수하자마자 이명박 대통령의 인지설이 보도를 탔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지난해 11월, 즉 국세청이 박연차 회장을 검찰에 고발하기 전에 이명박 대통령에게 세무조사결과를 직보했다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 또 나왔다. '조선일보'가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보한 시점은 지난해 11월 12일이라고 날짜를 특정해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국세청이 '자율적으로' 은폐했다는 추측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직보를 받을 정도로 큰 관심을 보인 사안을 국세청이 떡 주무르듯 했다는 게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와 맥락을 최소치로 줄이더라도 이명박 대통령의 묵인이 없었다면 '은폐'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축하는 게 상식적이다.
이런 상식적 추측을 뒷받침하는 정황도 있다.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의 출국이다.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게 그림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는데도 청와대는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박연차 회장의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이 불거졌는데도 검찰은 그의 출국을 막지 않았다. '은폐'의 주역이자, '박연차 리스트'를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 도피성 출국을 하는데도 두 손 놓고 쳐다보기만 한 것이다.
이런 점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청와대가 선을 긋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묵인하고 말 여지가 없었다고 못을 박는다.
'중앙일보' 기자에게 그랬단다. 청와대 핵심관계자가 "천신일 회장이 박연차 회장에게 '세무조사는 무마할 수 없는 문제'라고 꾸짖은 걸로 안다"고 말했단다. 누군가가 귀띔했단다. 여권 핵심부가 천신일 회장과 박연차 회장 사이에 오간 돈에 대해 내부적으로 확인 작업을 마쳤으며 "이 대통령이 '천신일은 조사 결과 별 문제가 없다. 걱정 말라'고 했다"는 등의 말이 퍼져 있다고 '조선일보' 기자에게 전했단다.
쉬 단정하지는 말자. 정황과 항변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골라잡는 식의 단순한 선택은 경계하자. 여기서 할 일이 아니다. 해서도 안 된다. 그건 검찰의 몫이다. 검찰이 수사를 통해 밝혀낼 일이다.
지켜보자. 드러난 정황에 대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강하게 항변했는데도 통념과 상식에 기초해 수사 강도를 늦추지 않았던 검찰의 기개(?)가 다시 한 번 발휘되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자. 이건 수사 형평성을 재는 또 하나의 척도다.
* 이 글은 뉴스블로그 '미디어토씨(www.mediatossi.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