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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종'과 '항의'도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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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종'과 '항의'도 민주주의

[박동천의 집중탐구]<33>절차적 민주주의

제3부 합리주의: 권력숭배 프레임
제7장 민주주의의 이상
제2절 절차적 민주주의


정치학 교과서에서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최소주의라고 부르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최대주의라고 불러서 대조한다. 하지만 이런 대조는 얼핏 민주주의의 최소치와 최대치가 정해져서 눈앞에 펼쳐지는데, 절차적 민주주의는 그 중에서 최소치를 선택하는 것처럼 잘못된 인상을 준다. 만약 50%의 민주주의와 70%의 민주주의를 놓고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70%의 민주주의를 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의 차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란 민주주의를 "자유, 평등, 박애"나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 따위 추상적인 구호나 이상으로 보지 말고 하나의 특정한 정치제도로 이해하자는 의도를 담은 문구다. 물론 정치제도라 함은 경쟁하는 후보들과 정책들 사이에서 선택해서 결정을 내리는 제도를 말한다. 흔히 민주주의라면 다수결을 뜻하는 것으로 연결하지만, 사실 이 주제는 앞에서 언급했던 "인민의 의사"가 무엇이냐는 문제와 관련해서 겉보기보다는 복잡한 문제이다.

앞에서(제5장 제3절) 나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와 관련해서 "인민의 의사"가 무엇인지를 물은 바 있다. 2007년 12월 선거에서 그가 얻은 표는 유효투표 대비 48.7%, 유권자 대비 30.5%였다. 취임 100일을 맞아 사회여론연구소가 실시한 전문가 여론조사에서는 "국정운영 잘못하고 있다"가 96%로 나왔다.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20%에 미치지 못했고,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반대는 80%를 넘었다. 그러나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촛불은 꺼졌고, 미국산 소고기는 수입되고 있으며, 이명박 정부는 용산의 농성자들을 죽이면서까지 진압했고, 그 책임조차 전혀 없다고 잡아떼고 있으며, <PD수첩> 제작진들을 구속하고, 촛불재판에 압력을 행사한 사람은 그 사실이 밝혀진 다음에도 대법관으로서 자리를 지킬 뿐만 아니라, 한미 FTA 비준, 재벌의 은행소유, 신문사의 방송소유 등의 논쟁적인 의제들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라고 한나라당을 압박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국정운영 지지도는 대체로 30%대로 회복되는 결과를 보였다. 대한민국 인민의 의사는 도대체 무엇인가?

노무현 정부에 겪었던 일들을 회고하면 이 질문을 더욱 극적으로 제기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유효투표 대비 48.9%, 유권자 대비 34.3%의 지지로 당선되었지만,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는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역풍이 불어 4월 15일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의 과반수 정당이 되었고, 헌법재판소는 5월 14일 탄핵소추를 기각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직에 복귀했지만, 헌법재판소는 다시 그가 야심 차게 추진하던 신행정수도건설을 "경국대전"을 들먹이면서 위헌으로 판시해버렸다. "수도"라는 두 글자를 "복합도시"라고 고쳐서 우회하는 길은 합헌이라고 인정을 받았지만, 이미 정치적인 의미에서 노무현에게 대통령으로서 권위는 사라진 다음이었다.

이러한 굴곡에서 인민은 무엇을 원했을까? 이런 반전과 곡절의 마디마디가 모두 인민의 의사에 따라서 결정되었을까? 대한민국의 인민에게 직접 물어보면 이와 같은 급박한 정치적 우여곡절에서 불안감 또는 불쾌감 또는 기타 모종의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염두에 두는 사람들은 인민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우왕좌왕이 발생했다고 말하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절차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일은 인민이 결정한 결과다. 앞에서(제4장) 내가 사사오입 개헌이 결국 인민의 묵인 아래 재가되었다고 보는 관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대한민국의 정치학교과서는 천편일률적으로 대의제를 간접민주주의와 동일시하면서, "직접민주주의는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라는 정체불명의 핑계를 곁들이지만, 직접민주주의라고 특별히 어려울 것도 없고, 직접민주주의라고 대의제가 아닌 것도 아니다. 가령 스위스의 일부 칸톤에서처럼 주요 의제를 주민투표로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인민의 의사가 무엇인지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주민투표를 붙일 것인지에 따라서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복잡한 예를 들 것도 없이 바로 위에 거론한 우리네 사정만 봐도 이 점은 명백하다.

우선 시간에 따라 민의가 달라진다는 점은 노무현이나 이명박에 대한 지지율을 보면 그냥 알 수 있는 일이다. 만일 다른 모든 사정이 똑같고 단지 대통령 임기가 1년이어서 2008년 12월에 선거가 다시 있었다면 이명박은 당선은커녕 한나라당 후보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촛불 시위 국면에서 80%를 상회한 반대 의사는 대개 "재협상이 필요하다고 보느냐"는 식으로 대단히 포괄적인 대안에 대한 찬성의사를 곧 "정부에 대한 반대" 의사로 해석한 결과였다. 하지만 만약 질문을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고 보느냐" 또는 "민중봉기로 정부를 몰아내야 한다고 보느냐" 따위로 물었다면, 찬성비율은 현저하게 낮아졌을 것이다.

인민이란 한국의 경우 수천만 명으로 구성되는 집합적인 실체다. 한 개인의 경우에도 의사라는 것이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운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수천만 명의 집단의사가 하나로 확정되어 있기는 대단히 어렵다. 굳이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고집을 피울 필요는 전혀 없겠지만, 현실에서 만약 수천만 명이 하나의 의사를 구체적으로 형성해서 가지고 있으면서 상당한 기간 동안 유지한다면 굉장히 놀라운 사례가 될 것이다. 더구나 설령 그런 경우라고 할지라도, 인민 중 누구에게 어떤 질문을 어떤 방식으로 언제 물어서, 나온 대답들을 어떻게 해석하여 인민의 의사로 표상할 것이냐는 문제는 항상 남게 된다. 바로 이 표상(representation)의 과정이 곧 대의(representation)의 문제와 같다. 그러므로 피상적인 관찰과는 달리, 직접민주주의를 시행하는 경우에도 대의라고 하는 과제는 해당 정치사회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나름대로 해답을 강구해서 반드시 처리해야 할 문제가 된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바로 그러한 대의의 과제, 다시 말해 무엇을 인민의 의사로 간주할 것인가에 관한 절차에 주목해서 민주주의를 이해하자는 발상이다. 절차적 민주주의에서 인민의 의사는 선거와 같이 때로는 인민의 직접 투표에 의해서 확인되기도 하고, 헌법재판소라든지 기타 각종 정부기관의 조치처럼 때로는 제도적 위임을 통해서 표현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는 2002년 노무현 당선은 투표로 표출된 민의고, 2004년 국회의 탄핵은 위임된 민의가 되는 것이며, 2004년 총선에서 표현된 민의는 국회가 위임된 권력을 잘못 행사했다는 질책이 되는 것이고, 헌법재판소의 탄핵기각은 총선으로 표출된 민의를 확인한 셈이 된다. 행정수도 위헌 결정이나 행정복합도시 합헌 결정은 헌법재판소가 위임된 민의를 대의한 것이고, 그러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인민이 대체로 조용하게 묵인했다는 것은 헌법재판소의 민의 해석이 인민의 재가를 받았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민의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는 것이고, 한 시점에서 확인된 민의와 다른 시점에서 확인된 민의가 서로 충돌하므로 정리가 필요하다면 그 역시 위임된 제도에 의해서 판결을 내리든지 아니면 투표라고 하는 절차를 통해서 정리를 하면 되는 것이다.
▲ ⓒ프레시안

그런데 이런 절차들이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항의와 이견의 권리가 폭넓게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형적으로 선거에서 유효투표의 48% 또는 유권자 대비 30%라는 수치는 오로지 일등당선제라고 하는 게임의 규칙을 통해 매개된 의미에서만 인민의 의사라는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이런 매개는 사회적으로, 즉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매개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이 언제나 남게 되며, 따라서 인민의 이름으로 매개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있는 권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과정이라든지 선거제도 자체에 대한 반대하거나 항의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어야 하며, 그러한 선거로부터 위임된 것으로 간주되어 이루어지는 정부의 모든 조치가 또한 항의대상이 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재판이라는 것이 단번에 끝나지 않고, 항소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 바로, 인민의 위임을 받은 권력이 행사될 때 주권적 민의를 잘못 해석한 결과가 아닌지, 또는 민의 해석은 제대로 했더라도 위임의 고리를 잘못 끼운 결과가 아닌지를 가지고 다툴 권리를 인정하는 셈이다.

항의에는 우선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지금처럼 정부가 4대강정비사업을 서두를 때, 가령 사업중지 가처분 신청 등으로 사법부로 하여금 권력을 발동해서 중지시키기를 구한다거나, 또는 공사현장에 가서 직접 저지를 시도한다든지 하면 직접적인 항의가 된다. 이처럼 직접적인 항의는 준법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실정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실정법에 어긋나는 항의라면 이른바 시민의 불복종도 가능하고, 또는 민중봉기나 혁명 시도도 가능하다. 반면에 간접적인 항의라면 글이나 강연 등을 통해 4대강 정비사업의 숨은 치부라든지, 사업 자체의 부당성 등을 홍보함으로써, 서서히 반대여론을 조성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이념은 평화적인 항의, 즉 간접적인 항의 또는 준법적인 항의와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시민의 불복종이나 혁명의 시도 등이 반드시 절차적 민주주의와 어긋나는 것만은 아니다. 시민의 불복종이란 예컨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했던 것처럼, 자기가 반대하는 전쟁을 수행하는 정부에게 세금을 내지 않는 방식으로 항의하지만, 그 행동에 따르는 실정법적 처벌은 감수하는 형태의 반대를 말한다. 정부의 특정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지, 정부의 일반적 권위, 다시 말해 정치사회가 법을 근간으로 유지된다는 일반원리에는 반대하지 않은 셈이다. 그러므로 법치의 일반 원리를 인정하는 만큼 시민의 불복종도 절차적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와 달리 민중봉기나 혁명의 시도는 기존의 법질서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극단적인 항의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경우마저도 절차적 민주주의와 완전히 양립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절차적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사회계약론적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절차에 관해 종전에 어떤 합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회구성원 일부 또는 전부가 기존의 사회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열려있다고 말해야 논리적으로 일관되기 때문이다. 물론 계약파기란 공짜가 아니고, 일정한 대가와 책임이 뒤따르게 된다. 하지만 민중봉기나 혁명시도의 경우 어떤 대가와 책임이 뒤따를지는 기존의 절차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기존의 절차체계 전체를 그 절차보다 우월한 주권의 표현으로 단번에 변경해야 한다는 시도를 기존의 절차를 옹호하는 세력이 실력으로써 누를 수 있을 때만 기존의 절차에 따라 도전세력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있다. 만약 도전세력이 실력으로써 자기편에게 주권이 있음을 증명한다면, 그들은 새로운 절차체계의 창조자가 되고, 차후 장기적으로 그 체계의 성패에 따라서만 책임을 지게 된다.

지금 나는 "절차"라는 말을 최대한 포괄적으로 사용하면서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게 되면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모두 절차적 민주주의의 현현이라고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이 가능하다. 미네르바를 구속해서 기소한 검찰도 나름의 절차를 따랐고, 그에게 무죄를 선고한 법원도 나름의 절차를 따랐다. <피디수첩>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한 정운천 전 장관도 절차에 따랐고, 제작진과 작가까지 체포한 검찰도 나름의 절차에 따랐다. 용산의 농성자들을 죽이면서까지 진압한 경찰, 화인은 특정하지 못하면서도 농성자들에게 과실치사죄를 적용한 검찰, 그런 사태에 분노해서 촛불을 들고 나선 시민들, 그들의 시민을 원천봉쇄하는 경찰, 무대나 화폭 위에서 용산에 관한 분개를 표현하는 가수나 화가들, 등등,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나름대로 절차에 따라 행동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나름대로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나 공무원이든 법관이든 사회운동가든 평범한 시민이든, 개인들의 행동을 "나름의 절차에 따른다"는 문구로써 서술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이 논의의 목적은 아니다. 절차적 민주주의에 내가 주의를 환기한 목적은 여전히 폭력의 여지를 줄이면서 사회갈등을 조정하는 절차 쪽으로 관심을 모으기 위함이다. 즉, "인민의 의사"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각 개인이 해석한 대로 즉각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면 발가벗은 무력대결의 여지가 줄어들기는커녕, 모든 문제에 관해 발가벗은 무력대결을 거치기 전에는 잠정적인 결정이라도 내려질 수가 없게 된다.

몇 년전 방폐장 건립을 둘러싸고 전라북도 부안에서 벌어졌던 사회적 소요, 쌀협상 국회비준 반대를 위한 농민대회에서 발생한 인명피해, 등등, 자칫 불행한 사고로 이어지기 쉬운 무력충돌의 사례들은 한국정치에서 무한정 열거할 수 있다. 국회에서도 "쟁점" 법안이라면 한결같이 몸싸움에 회의장 점거, 그리고 "날치기" 논란이라는 살풀이 굿판을 거치지 않고는 통과되는 경우가 없다. 교수직에서 부당하게 해임되었다고 소송을 제기한 한 전직 대학교수는 재판정에서 판사에게 석궁을 쐈는데, 그런 행위에 대해서조차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 동정여론이 일 정도로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높지 않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 강권통치를 "법치"로 호도하는 검찰의 무모하기 짝이 없는 야만이 계속 된다면, 그리고 법원마저 검찰의 압박에 굴복한다면, 사법부가 사회갈등의 조정자라기보다 사회갈등의 원인제공자로 전락할 확률마저 없지 않다.

이 모든 일들이 나름대로 "절차"에 따라 벌어지는 것은 맞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말과 관련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정치세력들이 모두 중무장을 하고 조자룡이나 징기스칸이나 람보 수준의 내전을 거쳐서 결판 낼 수도 있는 일을 가령 몇 명의 대표 선수를 뽑아 팔씨름을 규칙에 따라 벌이는 정도로 결판낼 수 있다면 야만의 정도는 낮아지고 문명의 정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팔씨름으로 결판낼 수도 있는 일을 제비뽑기로 결정한다면 또한 문명의 정도가 높아진다. 문명이란 폭력을 쓰지 않고 일을 처리한다는 데에 모든 요체가 있다. 주먹질, 칼질, 총질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은 원한과 복수심을 전가할 대상을 구한다는 심보다. 반면에 개인감정을 잠시 접고 목전의 정치사회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면, 토론을 할 만큼 한 다음에는 표결을 통해 다수의 의사를 따르는 것이 문명사회의 일처리방식이다.

물론 다수의견이라고 곧 반드시 필연적으로 옳은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다수의견이 시행되도록 기다리는 절제를 함양하지 않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다수가 설령 틀렸더라도, 내가 그런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틀림이 증명될 수는 없다. 일이 시행되어 실제로 잘못되기 전이라면, 결과가 어찌 될지는 근본적으로 논쟁거리이지, 어느 한 편이 틀렸다는 확증은 있을 수가 없다. 확증이 없기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주관적인 확신을 관철하려고 고집하는 것은 독선밖에 아니다. 소수가 진정한 확신을 가졌을수록, 다수의 잘못을 말로써 설득해보다가 통하지 않는다면, 실제 시행을 통해 잘못을 깨닫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문명의 방식이다. 혹시 만에 하나 자신의 확신이 잘못된 바탕에 근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한 개인의 확신이 아무리 강해도 어쩔 수 없이 틈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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