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안(1417~1465) 선생은 우리에게 문인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선생은 화가로서만이 아니라 글씨와 글에서도 당대 최고의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선생은 온화한 성품에 말수가 적고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청렴하고 소박하여 출세에 연연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아가 자신의 글이나 그림을 남기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양화소록(養花小錄)>(이병훈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도 그의 동생인 강희맹의 문집에 수록되어 전해질 뿐이다.
선생은 세종 23년(1441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돈령부 주부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돈령부는 황실 친척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설치된 관아였다. 관아의 성격상 아마도 한편으로는 치장을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선생의 말대로 비교적 한직(閒職)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꽃과 나무를 가꾸게 된다. 이 경험이 <양화소록>이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강희안은 1443년에 정인지(鄭麟趾) 등과 세종이 지은 정운(正韻) 28자에 대해 주석하였고 1444년에는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등과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였으며, 1445년에는 최항 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주석하였다. 1447년에는 최항,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등 집현전 학자들과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를 보면 강희안은 언어학에 정통한 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작업은 문사철(文史哲)에 두루 정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이기도 하다.
선생은 글씨에도 뛰어나 명(明)나라가 보낸 '체천목민영창후사(體天牧民永昌後嗣)'라는 글자를 직접 옥새에 새기기도 하였다. 또한 세조 때 새로이 활자를 주조할 때 자본(字本)을 썼는데 이를 을해자(乙亥字)라고 한다. 1454년(단종 2년)에는 집현전 직제학이 되어 수양대군, 양성지(梁誠之), 정척(鄭陟) 등과 조선 팔도 및 서울 지도를 만드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1455년(세조 1년)에는 세조가 등극하자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으나,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신문을 받는다. 이후 1460년 호조참의 겸 황해도관찰사, 1462년 인순부윤이 되었으며,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온다. 의정부에서 일찍부터 검상(檢詳)에 추천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상은 의정부의 실무를 관장하는 요직이었다.
<양화소록>은 왜 썼나
▲ <양화소록>. ⓒ프레시안 |
<양화소록>에서는 그의 그림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처럼,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고 한가하면서도 게으르지 않으며 떨어져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초월적이지 않은 태도가 느껴진다. 다시 말해서 삶에 여유 있는 선비가 한가하게 꽃이나 기르면서 쓴 글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굳이 자신의 글을 남기려 하지 않았던 강희안이 이런 글을 써서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글의 서문을 쓴 동생 강희맹의 첫 문장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하늘과 땅의 기가 서로 어우러져 만물을 만들어내지만 만물의 생명은 길러진 다음에야 이루어진다. 제대로 길러지지 못하면 병이 든다."
모든 사물이 저마다 타고난 자질이 있지만 그것은 길러져야 한다. 사람에 빗대어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자연적으로 타고난 본성(nature)만으로 사람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양육(nurture)하여 길러진 다음에야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위의 인용한 문장에서 '병(病)'은 질병이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흠이나 결점, 손해 등의 뜻으로 쓰였다. 제대로 길러지지 못하면 병들어 죽기도 하겠지만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본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도 해를 입게 되고 나아가 다른 사물에도 해를 끼치게 된다는 뜻이다.
강희안 선생이 <양화소록>을 지은 이유는 단순한 원예에 관한 지식을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점은 각 식물에 대한 선생의 평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를 들면 국화를 말하면서 "일찍 심었어도 늦게 피어나는 것은 군자의 덕과 같으며 서리를 무릅쓰고 꽃을 피우는 것은 강직함을 상징한다"는 시를 인용하고 있다. 결국 꽃과 나무를 빗대어 현실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강희맹은 선생의 동생으로서 형이 겪었던 고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형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형이 죽고 나서 형이 남긴 거의 유일한 저작을 자신의 문집에 수록하면서 느끼는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며 서문을 지어 거기에 강희안 선생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했을 것이다.
제대로 길러야 한다
강희안은 서문에서 제대로 기른다는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화초들을 보니 그 성(性)이 습기에 마땅한 것과 건조함에 마땅한 것이 있고, 또 차가움에 마땅한 것과 따뜻함에 마땅한 것이 있었다. 그래서 심고 물을 주고 햇볕을 쪼일 때마다 한결같이 옛날 방법대로 하였고, 옛 법에 없는 것은 혹 전해들은 것을 참고하였다. 날씨가 추워져 얼음이 얼거나 눈이 내릴 때에는 추위에 약한 화초를 골라서 온실에 넣어 동상을 입지 않게 하였다. 그런 뒤에야 화초들은 제각각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서 본래의 자태를 드러내었다. 이것은 다만 화초 각각이 타고난 천리(天)를 온전하게 하고 각각의 성을 따랐을 뿐이지만 처음에는 그것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아, 화초는 식물이다. 지식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르는 이치와 갈무리하는 방법을 모른 채, 습한 데에 맞는 것은 마르게 하고 추위에 맞는 것은 따뜻하게 하여 그 천성天性을 거스른다면 반드시 시들어 말라죽게 될 것이니, 어찌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그 본래의 자태를 드러내겠는가. 식물조차 그러한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마음과 몸을 피곤하게 하여 성을 해쳐서야 되겠는가."
사물 중에는 습기가 마땅한 것도 있고 건조한 것이 마땅한 것도 있다. 무엇이 마땅한지(宜) 아닌지는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며 타고난 본성은 이런 관계의 실천을 통해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실천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법(法)이 길잡이가 된다.
교육을 예로 들어 보자. 오늘날 많은 교육은 학생 개개인의 본성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지식의 주입으로 치닫고 있다. 물론 그런 지식의 양은 경제적 부의 크기에 따라 정해진다. 그렇게 암기된 지식의 양에 의해 서열이 매겨지고 그에 따라 사회적 지위도 결정된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본성을 펴보지도 못하고 탈락하는 학생도 있고 경쟁에서 밀려 시드는 학생도 있고 심지어는 현실을 포기하고 자살하는 학생도 생긴다.
잘못된 양육은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자신도 해친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본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주입된 양육에 의해 자라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가게 된 사람은 결국 병이 들고 만다. 맡은 일이 자신의 본성에 맞지 않으면 자신의 본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런 곳에 있는 것 자체가 힘에 부치는 일이 된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될 것은 정한 이치다.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자신도 해를 입게 되고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게 된다. 실제 우리 주위에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자리에 있으면서 남에게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점점 병들어가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강희안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런 뒤에야 양생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이 방법을 확충한다면 무슨 일을 하든지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선생은 화초를 기르면서 화초만이 아니라 생명을 기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람을 기르는 일이나 화초를 기르는 일이나 본질에서는 똑같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각각의 본성에 따라 기르는 것이다. 사람의 경우, 머리와 가슴은 서늘한 것을 좋아하고 배와 등, 팔다리는 따뜻한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머리와 가슴은 서늘하게 해야 하고 배와 등, 팔다리는 따뜻하게 해야 한다. 이를 반대로 하면 병이 든다. 이런 이치를 넓혀 사회에 적용한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희안은 험한 세상에 나서면서 지도자가 될 그릇이 아닌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반대로 지도자가 될 그릇이 잘못된 양육으로 죽어가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선생이 살았던 현실은 마땅하게만 흘러가지는 않았을 것이며 선생은 바로 그런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꽃을 기르는 일, 곧 본성을 제대로 기르는 양육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지도자가 될 그릇이 아닌 사람이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도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덧붙이는 말
<양화소록>의 번역본은 이 책 이외에도 서윤희·이경록이 공역한 것을 눌와출판사에서 발행한 것이 있다. 그 책에는 김태정 선생의 해당 식물 사진이 곁들여져 있고 각 식물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담고 있다. 표지에는 오죽(烏竹)이 자리 잡고 있는데, 늘 푸르른 댓잎과 올곧게 뻗은 검은 줄기가 강희안 선생의 마음을 닮은 것 같다. 출전을 꼼꼼히 찾아 적은 역자들의 노력이 돋보이는 참으로 누구나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이지만, 아쉽게도 절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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