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4일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서른네 살이던 2006년 해고돼 법정 싸움에 3년을 보냈다. 지난해 8월 고등법원에서 '부당 해고' 판정을 얻어낸 백승현(37) 씨는 그런데도 아직 더 "버텨야 한다.". 비록 복직은 했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상대는 그 '유명한' 이랜드그룹.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사소한 문제"로 해고돼 법원의 판정으로 돌아왔지만, 이랜드는 여전했다. "법원의 결정을 받아들이겠다"면서 백 씨를 '피자몰 설거지맨'으로 복직시켰다. 애초 백 씨는 본사의 베이커리 브랜드 개발팀장이었다.
그가 회사를 떠나 있었던 1000일 가까운 시간 동안 변한 것은 없었다. 그 사이, 법을 피해가기 위한 꼼수를 부리며 비정규직을 대량 해고해, 한국 사회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던 '경험'도 이랜드를 바꾸진 못했다.
▲ 지난 9일 만난 백승현 씨는 934일 만에 이랜드에 복직했다. 그는 지금 '설거지'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 |
'빵 전문가' 부당 해고…복직후 간 곳은 '주방'
지난 9일 만난 백승현 씨는 말하자면 '빵 전문가'다. 지난 2000년 처음 '파리바게트'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해, 이랜드그룹에서도 베이커리 브랜드 개발팀장으로 일했다. 해고된 후 먹고 살기 위해 그가 차린 것도 빵 가게였다.
그런데 지난 1월 간신히 복직된 후 그에게 일자리는 주방이었다. 이름은 번듯한 '제품 개발실'이었지만….
"첫 출근 날부터 3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었어요. 명목상으론 대기발령이었는데, 컴퓨터도 주지 않고 그냥 조그마한 책상에 앉아 있기만 했었죠."
함께 일하는 직원도 없었다. 늘 혼자였다. 백 씨는 "회사는 '그렇게 두면 내가 알아서 나가겠지'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사의 추측은 빗나갔다. 그는 3개월을 꼬박 그곳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3월 초, 그는 경기도 광명시의 한 '피자몰' 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비록 이름은 거창한 '점장'이었지만, 해고 전보다 2단계 직급이 낮은 자리였다. 원래 일하던 자리로 복직시키는 것이 법원의 명령이라는 항의도 소용 없었다. 회사는 "그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있어 곤란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루 종일 우두커니 홀로 앉아 있어야 하는 주방보다야 낫지 않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회사가 절 대우해서 점장 발령을 낸 게 아닙니다. 전술을 바꾼 거죠. 무시에서 조롱으로."
그는 점장 발령 후 온갖 모욕을 겪었다. 어렵게 되찾은 일터였지만, 출근하면 본사에서 파견된 매장 관리 책임자가 "그냥 퇴근해라"고 말하기 일쑤였다. 지난 한 달 반 새 그는 1시간 30분 동안 출근했다, 곧바로 온 길을 되돌아 퇴근한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거죠. 베이커리 브랜드를 담당했던 사람을 점포로 보내 설거지를 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아니겠어요?"
그러나 그는 꿋꿋이 버티고 있다. 934일간 복직을 위해 싸워온 그다.
명함에 '나쁜 기업 이랜드 불매' 써놓고 다니는 이랜드 직원?
그 대목에서 문득 백승현 씨에게 받은 명함을 다시 보았다. 절반 넘게 빚을 내 차렸다는 'ㄷ' 제과점 명함에는 뚜렷이 "나쁜 기업 이랜드 불매"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물건을 사지 말라는 명함?
"오죽 화가 나면 이렇게까지 하겠습니까? 내가 악이 받쳐 그렇습니다."
그의 설명은 간단했다. 이랜드가 자신에게 가하는 부조리와 치졸한 행동에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 백승현 씨는 노동조합에 가입하자마자 '탈퇴' 회유를 받다가, 곧바로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프레시안 |
"사람이 소중하다" 늘 얘기하는 이랜드의 이중성
'해고'라는 평범하지 않은 상황으로 백승현 씨를 몰고 간 것도 따지고 보면 이랜드 그룹의 평범하지 않은 경영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해고된 계기를 "노조 가입"이라고 설명했다.
문제의 발단은 사소했다.
"직장 상사와 문제가 생겼어요. 회사가 나를 부당하게 전직시키려 했지요. 그 상사와의 문제는 서로 오해에서 빚어진 것이라 '사실은 그게 아니다'라고 해명을 했어요. 그런데 상사는 이를 일종의 '항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전직될 때 되더라도 매듭은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일이 더 틀어졌지요. 회사가 나를 놓고 징계위원회를 열겠다고 통보했습니다."
덜컥 겁이 나 노조에 가입했다. 그러나 일은 오히려 점점 더 커졌다. 이랜드그룹의 한 임원은 백 씨를 불러 "이랜드에서 노조는 안 된다. 탈퇴하면 징계 문제 등 다 해결된다. 승진 문제도 너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회유했다.
하지만 백 씨는 노조를 탈퇴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경영 질서 문란, 근무 태만, 명령 불이행" 등이 그 통지서에 적힌 해고 사유였다. 겁이 나 가입했던 노조인데 왜 탈퇴하지 못했던 것일까?
"솔직히 그 당시엔 화가 너무 났어요. 회사에서 하는 말을 다 믿을 수도 없었고,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죠. 회사가 치사하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때니까. 2~3개월 뒤에 나보고 '노조 탈퇴하면 다 해결해주겠다'고 회유했다면 들었을지도 모르죠."
그는 "이랜드는 늘 사람 하나하나가 소중하다고 말하는데, 자기와 이해관계가 엇나가면 가차 없이 잘라버린다"고 덧붙였다. 당시 그가 느꼈던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긴, 아줌마들이 대거 파업에 들어간 이랜드 사태 때도 이랜드 비정규직은 한 목소리로 "회사가 말로는 '가족' 운운하면서 비정규직은 사람 대우도 않았다"고 토로하지 않았던가.
▲ 백승현 씨는 복직이 된 뒤 명예만 회복된다면 현재 운영하는 회사를 사퇴한 뒤 빵집을 운영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회사의 행동에 악이 받쳐 빵집을 접고 회사에 올인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프레시안 |
해고 후 그는 줄기차게 법정에서 회사와 싸웠다.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는 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그는 "회사가 조작된 문건을 책 한 권이나 제출했다"고 주장했다.
처음엔 한 장이었던 해고 사유가 상급심으로 갈수록 두꺼워졌다. 백 씨는 "거짓말이 거짓말을 부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회사가 계속 거짓말을 하니 결국은 들통 날 수밖에 없었죠. 나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직장 상사는 내가 결근한 날 본사에서 나에게 욕을 먹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니까요. 출근도 안 한 사람이 상사에게 모욕을 줄 수 있나요?"
결국 그는 행정법원에서 이겼다. 회사는 굴하지 않고 항소했지만 고등법원도 백 씨의 손을 들어줬다.
그는 "복직이 돼 내 명예가 회복되면 회사를 접고 가게에 전념하려 했다"고 털어놨다. "회사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듣고 싶어서" 오랜 법정 투쟁을 버텼다. 그러나 이랜드는 법원 판결을 수용하고도 그의 명예에는 관심이 없었다.
"복직 직전에 회사 인사 담당자로부터 이메일이 왔어요. 내용인 즉, '복직하고 나서 앞으로는 과거와 같은 과오를 다시는 범하지 말아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체 왜 이런 메일을 보냈을까? 회사의 의도가 생각할수록 괘씸했습니다. 회사가 잘못했다는 법원 판결을 인정하는 태도가 아니었지요."
"복직만 되면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런' 회사를 내 발로 떠나겠다"던 그는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는 "가게를 접고 회사에 집중할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이랜드 노동자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박성수 회장을 비롯한 이랜드 경영진의 왜곡된 시각이 얼마나 많은 직원들에게 피해를 입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손해를 좀 보더라도 그들의 잘못된 시각을 깨우쳐 주고 싶어요."
그가 처음에는 그저 보호막이 될까 싶어 가입했던 노조에서 아직도 활동을 하는 이유이다. 그는 지난 2007년 비정규직 대량 해고를 막기 위한 파업 과정에서 해고된 이남신 이랜드일반노조 위원장 직무대행, 홍윤경 사무국장 등을 위한 집회와 1인시위에도 꼬박꼬박 참석한다.
"아내는 나한테 자꾸 그렇게 직접 싸우려 들지 말고 박성수 회장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 이겨 보라고 합니다. (웃음) 하지만 나는 사과를 받고 싶어요. 박성수 회장이라는 한 사람 때문에 받은 피해가 엄청나기 때문이죠."
거대한 바위를 굴려서 산꼭대기까지 올리면 다시 밑으로 떨어지고, 그 바위를 다시 끊임없이 올리는 '시시포스.' 그와, 그가 속해 있는 이랜드일반노조를 보며 그리스 신화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몇 번을 힘주어 말하던 백승현 씨와 이랜드일반노조가 '시시포스'의 운명을 벗을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