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금융지표들의 급박한 변화를 두고 '경기가 바닥을 친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금융지표와 실물경제의 괴리가 커지고 있다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현 시장심리는 국내 변수가 아닌 해외 변수, 특히 미국 변수를 따라 움직여 실질 경제주체들의 체감경기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 최근 금융지표 호전은 긴 시간을 두고 경제가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는 '새로운 터널'에 진입하기 시작했음을 입증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외국인자금, 2주간 1.2조 유입…다시 '바이 코리아'?
3월 한달 증시 분위기는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월초만 해도 '세자릿수 재진입'을 두고 위기설이 확인되느냐가 화제였으나 월말 분위기는 정반대다. 지난 3일 1018.81로 출발한 코스피지수는 27일 1237.51을 기록, 근 한 달 만에 21.5% 급등했다.
기술적으로는 단기 이동평균선이 장기 이동평균선을 밑에서 위로 뚫고 오라가는 골든크로스가 나타났다. 골든크로스는 통상 증시가 약세장을 마감하고 강세장을 연출할 가능성이 높은 지표로 받아들여진다.
외국인이 장을 이끌었다. 지난 17일 이후 외국인은 9거래일 연속 한국 주식을 사들였다. 이 기간 순매수 규모는 1조2155억 원에 달한다. 지난 1월 28일부터 2월 9일 이후 외국인이 이처럼 집중적으로 주식 쓸어담기에 나선 것은 처음이다.
채권시장에도 화색이 돈다. 지난해 말만 하더라도 9%대에 육박하던 신용등급 AA-급 회사채 3년물 수익률은 27일 6%선까지 내려갔다. 그 동안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BBB급 회사채 수익률도 최근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이 위험도가 높은 회사채에도 자금을 밀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원화 가치는 오르고 있다. 지난 2일 1570.3원까지 솟아올랐던 원-달러 환율은 불과 한 달여 만에 1349.0원까지 급락했다. 지난 1월 9일(1343.0원)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정용택 유진투자증권 매크로팀장은 "정확히 표현하면 원화가 강세를 보인 게 아니라 달러 약세가 드디어 원화에도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환투기세력의 공격이 끝나고 환율이 정상화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미국 경제의 악화된 체력이 드디어 원-달러 환율에도 반영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시중자금, '브레이브 하트' 되찾나
금융지표가 일제히 호전되자 그동안 갈 곳을 찾지 못하던 시중 자금도 서서히 기지개를 펴는 모양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6일 129조6458억 원까지 늘어났던 머니마켓펀드(MMF) 설정액은 25일 현재 127조 원으로 줄어들었다. MMF는 대표적인 초단기 자금이다.
▲MMF와 주식형펀드 순자산총액 변화추이. MMF 규모는 최근 소폭 줄어들었으나 주식형펀드는 지난 2월말을 기점으로 규모가 급속히 커지고 있다. ⓒ프레시안 |
경기악화에 따라 갈 곳을 찾지못한 시중자금이 다시 증시를 새 투자처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회사채 시장에 개인투자자금이 몰리는 것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닌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개인투자자의 회사채 순매수는 올들어 2월까지 월평균 3522억 원을 기록,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0% 급증했다.
이와 같은 추세를 두고 일각에서는 금융지표가 바닥을 쳤다는 주장이 나온다. 오재열 IBK투자증권 투자전략팀장은 "그 동안 증시 1200선이 단단한 저항선으로 작용하는 모습이었는데 최근 단숨에 1200선을 돌파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지지 기대가 살아있어 회복세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외환시장 역시 그간의 '롤러코스터형' 움직임을 끝내고 완만한 움직임을 이어나갈 것이라는 평가다. 원화가치 급락이 재현될 가능성은 낮다는 뜻이다.
정 팀장은 "다음 달 외국인 배당이 몰려있어 추가 상승 가능성이 있으나 기업 실적이 좋지 않았던만큼 그 규모는 크지 않을 것"이라며 "기본적으로는 원화가 종전보다는 강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미국이 달라지고 있다"
금융지표가 3월 하순들어 갑자기 방향을 튼 주된 요인은 미국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 정부가 발표한 총 1조 달러 규모의 민관합동투자프로그램(PPIP)이 시장 심리를 개선시켰기 때문이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등 일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번 조치가 어느 정도 효과를 볼 것이라는 기대가 높은 게 사실이다.
또 일부 실물지표가 미국 경기 방향전환 기대를 높였다는 점도 주요했다.
지난 25일 발표된 미국의 2월 내구재 주문과 신규주택 판매는 모두 시장의 예상을 깨고 증가세로 돌아섰다. 기업 생산활동이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으며 부동산 시장도 바닥을 다지는 움직임이 확인됐다.
제조업 지수도 비슷한 분위기다. 미국 12개 연방은행 중 한 곳인 리치몬드 연방이 발표한 3월 제조업지수는 -20을 기록, 전달보다 31포인트 상승했다. 여전히 마이너스 수준이라 상승세로 돌아섰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더 이상 나빠지지는 않는 상태라는 의견이 나온다.
▲리치몬드 연방 제조업지수와 ISM 제조업지수. 올해 초 들면서 '아직 마이너스 수준이지만' 방향은 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과 '여전히 미국 경제가 추락하고 있다'는 의견이 동시에 나온다(토러스 투자증권 제공). ⓒ프레시안 |
뒤이어 발표될 전국적 경제지표가 향후 향방을 가를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이미 미 공급자관리협회(ISM) 제조업지수는 지난해 말을 끝으로 2개월 연속 상승세를 보였다. 고용분석기관인 오토매틱 데이터 프로세싱(ADP)이 다음달 발표할 보고서에서 고용지표도 긍정적인 신호를 보낸다면 시장심리는 더욱 개선될 수 있다.
김승현 토러스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일단 현재 경제는 여전히 '불황'이다. 바닥을 지났느냐가 문제인데 미국의 각종 경기선행지표가 연속해서 개선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 긍정적 신호다. 국내 경기에도 시차를 두고 반영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가 오른다고 살림살이 나아지나
하지만 이와 같은 경기지표 개선은 두 가지 함정을 갖고 있다. '과연 미국 경제의 바닥 탈출이 확인됐느냐'는 것과 '금융지표 개선이 한국 실물경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가 그것이다. 부정적 의견이 여전히 우세하다.
일단 미국 경기 바닥론은 통일되지 않은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내구재 주문이 회복됐다고는 하나 지난해 7월에 비하면 여전히 600억 달러 가까이 낮은 수준이다. 부동산시장 추가 하락, 상가시장 붕괴 등 암초도 곳곳에 널려 있다. "아직 부실을 제대로 다 확인하지도 못했다"는 게 중론이다.
▲소비자심리지수 변화추이. 3월 소비자심리지수는 오히려 전달보다 내려갔다. 실물경제 주체들의 체감경기는 증시 상승과 아무 연관이 없었다(한국은행 제공). ⓒ프레시안 |
무엇보다 정부가 풀어놓은 엄청난 규모의 유동성이 아직 실물로 제대로 유입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1월 협의통화(M1) 증가율은 8.3%를 기록할 정도로 증가 속도가 빠르다.
하지만 은행 자금이 실물경제로 번져나갔느냐를 확인할 수 있는 광의통화(M2) 증가율은 전달대비 1.1%포인트 떨어진 12.0%를 기록하면서 오히려 힘을 잃어가는 추세다. 한은이 돈을 대규모로 풀었음에도 '돈맥경화' 현상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가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될 정도다.
결국 경제지표만 개선될 가능성 높아
한은의 대규모 양적완화가 기대했던 효과를 못 내고 향후 인플레이션만 자극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한은이 시중 유동성을 흡수한다면 경기는 다시 곤두박질칠 수 있다. 다시 말해 최근 증시 급등은 말 그대로 유동성 확대 정책에 따른 '유동성 장세'일 뿐, 실물의 체력을 반영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정 팀장은 "이번 경기 모멘텀의 기저에는 유동성 공급이 자리했다. 당국이 유동성을 흡수한다면 경기가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며 "앞으로 긴 시간을 두고 문제가 하나씩 터지면서 경기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나갈 가능성이 높다. 장기간 이 과정을 거쳐야 경기 회복을 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협의통화(M1, 파란선)와 광의통화(M2, 붉은선) 증가율 추이. 한은이 양적완화 정책을 실시함에 따라 M1 증가유은 가파르게 올랐지만 정작 M2 증가유은 떨어지는 추세다. 한은이 풀어놓은 돈이 은행에만 흡수될 뿐, 실물에는 풀리지 않아 유동성 함정에 빠지고 있음을 뜻한다. ⓒ프레시안 |
실제 외환위기 이후가 그랬다. '구조조정이 마무리됐다'는 정부 발표와 상관없이 1998년에는 은행, 1999년에는 대우그룹, 2000년에는 카드사태가 계속해서 터져나왔다. 경제성장률은 정부주도 정책으로 반짝 성장하더라도 실물에서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문제가 터져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 팀장은 "개인적으로는 내년 1, 2분기를 단기 고점으로 본다. 분기성장률 6% 달성도 가능할 것"이라면서도 "큰 의미를 둘 수치는 아니다. 외환위기 당시도 98년 -7% 가까이 성장한 후 다음해 10% 성장했다. 기저효과가 사라진 후에는 다시 성장률이 푹 꺼지는 추세가 상당기간 지속됐다"고 평가했다.
내년 상반기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다면 경제주체들의 살림살이는 얼마나 나아질 수 있을까. 최소 6개월은 지나야 소폭 반영될 수 있다는 평가다.
김 센터장은 "소위 말하는 체감경기는 경기 후행지표다. 실질적으로 국내 고용여건이 안정돼야 실물 경제 호전을 얘기할 수 있는데 지금은 아니다"라며 "경기가 정상적인 상태일 때 고용지표는 보통 6개월가량 후행한다. 지금과 같이 어려운 시기라면 더 길어질 것"이라고 언급했다.
금융시장 상승이 실물기업의 실적 호전으로 이어지고 이에 따라 기업이 실제 생산량을 추가로 늘리고 고용 증가를 이끌게 된다손 치더라도 그 기간이 어림잡아 1년은 걸릴 것이라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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