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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기적인 조작꾼?

[박동천의 집중탐구⑧] 자포자기와 보수성향

제6장 자포자기와 보수성향

현재진행형의 생생한 예로서 용산 참사와 관련된 공방의 일부를 한 번 살펴보자. 검찰의 수사결과가 나온 후에도 진상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검찰의 수사가 축소, 왜곡, 은폐, 조작의 의혹이 있으니 특검제를 발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요구를 한나라당은 "정치공방"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나라당의 어법이 담론의 정치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따져볼 가치가 있다.

우선 "정치공방"이라는 모호한 문구가 변죽을 울리는 의미를 명시적으로 바꿔 말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특검 발동 요구는 용산참사를 기화로 정부와 여당에게 흠집을 내려는 시도다.
② 용산 참사 건은 법률적인 문제로서 검찰의 수사와 뒤이은 재판으로 끝나야 한다.
③ 법률적인 문제는 국회의 소관사항이 아니다. 국회는 정책적 대안마련에 집중해야 한다.
④ 야당의 정략적인 목표 때문에 이런 문제로 정쟁이 벌어지면 국력을 소모할 뿐이다.

그런데 국회가 하는 일은 제일 먼저 법률을 만드는 일이다. 법률을 만드는 국회가 법률의 적용에 관해서는 할 일이 없다고 보는 것은 가당치 않은 소리다. 유사시 특별검사나 국정조사가 법조문에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사법이라는 영역이 국회의 소관사항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만 하는 것은 아님이 나타난다. 모든 정책이 법률로 표현되고, 사법부의 모든 판단이 곧 정치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에 관한 정책의 표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사회에 팽배한 기계적 삼권분립론에는 대단히 잘못된 단견과 오해가 섞여있다. 서양에서 의회제도가 시작할 때, 최고재판소라는 기능은 항상 핵심임무로 포함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제4부에서 다시 자세히 논의하기로 한다.

그 대신 여기서는 정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현대에는 어떤 나라의 언어든 대개 정치적이라고 하면 권력에 줄을 대서 출세를 노리는 해바라기성 행태라든지, 주어진 상황을 착취해서 이기적인 목적을 얻기 위해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는 행태를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정치인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politician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첫 번째 뜻풀이에 "모사꾼 또는 기획가, 영리하고 한 수 앞을 보며 수완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기적인 조작꾼"이라고 덧붙여 놨다. 국가나 공동체의 사업에 관한 전문가라는 의미는 두 번째로 나오는 뜻풀이다.

그런데 정치는 실제로 언제나 이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가질 수밖에 없다. 국가나 공동체의 사업을 위해 헌신하는 행위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상황을 조작하는 행위가 항상 겹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공사업을 주도적으로 수행하는 책무 자체가 한 개인에게 많은 권력과 지위와 명예를 갖다 주는 일이다. 더구나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더욱 큰 명망과 위신과 영광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헌신해서 영광을 얻었는지 영광을 위해서 헌신했는지는 결코 두부 자르듯이 양단간에 하나로 결판이 날 수 없는 질문이 된다.

더구나 이런 종류의 영광은 언제나 시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고려에 포함되어야 한다. 김대중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좋은 예다. 한반도 평화에 헌신해서 상을 받았다는 서술은 그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는 입장과 맞물리고, 노벨상을 받기 위해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했다는 서술은 반대파의 입장과 맞물린다. 전형적으로 서술과 평가가 중첩되는 담론정치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와 관련되는 문제는 결코 정치 바깥에서 해결될 방법이 없고 언제나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게 된다. 이기적인 행위와 헌신적인 행위를 나눔으로써 정치를 탈정치화하려고 할수록, 다시 누구의 어떤 행위에서는 야심의 측면을 주목하고 누구의 어떤 행위에서는 헌신의 측면을 강조해야 하느냐는 정치적 논쟁의 장이 넓게 열리고 만다. 그러므로 한나라당이 "정치공방'을 배척함으로써 용산참사의 진상문제를 탈정치화하려고 한다면, 바로 그러한 탈정치화의 노력이야말로 한나라당의 파당적 이득을 노린 행위라는 비판을 모면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 한나라당이 "정치공방'을 배척함으로써 용산참사의 진상문제를 탈정치화하려고 한다면, 바로 그러한 탈정치화의 노력이야말로 한나라당의 파당적 이득을 노린 행위라는 비판을 모면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연합뉴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한나라당의 탈정치화 전략은 상당수의 시민들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위 제1장의 <표2>에서 시민들을 간략하게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라고 나눠서 불러봤다. 논의를 위해 다시 그 명칭을 사용해서 말하자면, 보수주의자들은 한나라당의 탈정치화에 동조할 것이고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는 반대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지지 정당이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전략 때문에 큰 차이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동층은 어떨까? 가령 용산 참사에 경찰의 잘못이 상당히 있다고 보느냐 무시해도 될 정도라고 보느냐는 질문과 특검이나 국정조사가 필요하다고 보느냐 필요없다고 보느냐는 질문을 생각해보자. 그러면 답은 다음과 같은 네 부류로 갈릴 것이다.

국회가 나서야 한다그럴 필요없다경찰도 상당히 잘못이 있다A. 진보확신층B. 부동층경찰의 잘못은 무시해도 된다C. 무의식층D. 보수확신층

A와 B는 각각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정부의 처사를 비판하든지 옹호하는 사람들이다. C는 논리적으로 부정합적인 노선으로서, 정치의식 자체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B는 경찰의 잘못도 상당하지만 특검까지는 필요없다는 입장으로서, 일종의 양비론 또는 절충론이다. 이러한 구도를 가지고 각 부류에 시민들이 몇 퍼센트씩이나 분포하는지는 경험적으로 흥미로운 연구주제가 될 만하다. 그러나 내가 논의하려는 초점은 실제 분포 여하에 있지 않다. 위 표에서 B란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있는데, 그들의 숫자가 얼마인지보다 어떤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그런 입장이 나오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연히도 이런 입장은 일전에 <한겨레>에 기고한 강준만 교수의 우회적인 글에서 잘 나타난다 (「기우뚱한 균형」, <한겨레>, 2009. 2. 15.). 그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개혁·진보세력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는데도 여론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문에서 시작해서, "누가 옳건 그르건 일방적인 완승은 가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양자택일형 옳고 그름을 따지고 밀어붙이는 데에 국민적 역량을 탕진하고 있다"는 대답을 내놓는다.

강 교수가 인용하고 있는 김진석의 "기우뚱한 균형"이라는 발상에 나는 일반적으로 동조하는 부분이 있다. 이 연재의 목적 가운데에는 진보진영의 정치의식에서 종종 나타나는 폐쇄성과 교조주의를 고발하려는 뜻이 분명히 있다.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나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한 자칭 "진보" 지식인들의 선동은 무책임했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의 국면, 특히 용산 참사와 그 후에 벌어지고 있는 진실공방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

경위야 어떻든 화염병을 가지고 농성하는 사람들을 무작정 기다려줄 수만은 없다 - 맞는 말이다. 진압을 하다보면 다치고 죽는 일도 있을 수 있다 -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일반적인 이야기일 뿐이고, 당시 1월 20일 현장에서 인명피해가 나지 않도록 진압할 길이 없었느냐는 질문에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당연히 현장의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 그런데 검찰이 발표한 내용은 유족이나 시민단체에서 증거를 가지고 제기하는 의혹들을 상호 고립된 지엽으로 취급했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했을 뿐이다.

수많은 의혹들이 있지만, 일례로 발화원인이 특정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농성자 가운데 몇 명을 골라서 치사혐의를 씌울 수 있는지, 왜 유족조차 참관할 수 없도록 급히 부검을 해야 했는지, 지문과 금니에 신분증까지 남아있는 사체를 "신원확인" 때문에 부검했다는 해명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등의 의문은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다. 위 표에서 B에 속하는 정치의식에서는 이렇게 말하면 아마 "그런 것을 언제 어떻게 일일이 다 밝히느냐"고 반문하기 쉬울 것이다. 인권위 조사에도 협조하지 않는 검찰과 경찰을 상대로 어떤 개인이 진상을 다 밝히려면 아마 인생을 다 걸어도 성공할 확률이 낮을 것이다. 바로 그래서 국정조사나 특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요구를 모르긴 몰라도 강 교수는 "일방적인 완승"을 노리느라 "국민적 역량을 탕진"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현재 한국의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극우를 10으로 극좌를 0으로 놓고 보면, 강준만 교수는 4.5 정도에 해당하리라고 나는 본다. 이런 평가에 이견이야 당연히 많겠지만, 어쨌든 그를 우파로 치더라도 7보다 오른쪽의 극우로 볼 수는 없을 것이고, 반대로 그를 좌파로 치부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3보다 왼쪽의 극좌로 보기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요컨대 그는 이 나라에서 중도 근처에 위치하고, 스스로도 중립적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바로 그 중립적 관찰자의 시선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라는 것이 지금 내가 주장하는 핵심이다. 중립 자체가 보수라는 뜻이 아니고, 강준만 교수를 비롯해서 우리 사회의 평균적 지식인들이 공유하는 중립의 관념이라는 것이 얼버무리기, 즉 은폐를 용인하는 태도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용산 참사의 문제를 이 정도에서 덮고 넘어가자는 태도를 강 교수는 아마도 현시점에서 하나의 균형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는 곧 용산참사의 진상규명 요구를 정파적인 문제라고 파악하고, 나아가 정치공방으로부터 비교적 독립된 진상규명이라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을 함축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진상규명의 문제는 정치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파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 상태에서 덮고 넘어가는 태도야말로 한 쪽 정파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것이며, 시민단체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진상규명이야말로 정파균열을 초월한 공동체 차원의 의미에서 정치를 복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에는 정파적인 차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연대라는 차원도 있다. 용산에 관한 진상은 어떻게 판명이 나더라도 결과적으로 정권에게 도움이 되든지 아니면 야당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만 보면 진실공방이야말로 전형적으로 정파적인 주제가 되며, 서로가 "일방적인 완승"만을 노리면 "국민적 역량을 탕진"하는 결과밖에 없으리라 비칠 것이다. 강 교수가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오히려 진실만이 정파의 균열을 초월해서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유일한 접착제라고 보는 시각도 가능하다.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나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이 바로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두 사건 모두 정파적 균열구도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었다. 따라서 얼핏 겉으로만 보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한 쪽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몰아붙이는 모질기 짝이 없는 완승추구처럼 비칠 수 있다. 실제로 당대 프랑스와 미국에서 그런 반론들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군부의 거짓말이 폭로되었다고 프랑스가 혼란에 빠진 것도 아니고, 닉슨이 사임했다고 미국사회가 두 쪽으로 갈라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프랑스 제3공화국은 기틀이 다져졌고, 미국은 그나마 의회와 대법원이 진실을 밝힐 용기와 역량을 발휘하여 행정부의 권력남용으로 손상된 정치신뢰를 절반 정도는 복구할 수 있었다.

정파적 균열을 초월하는 차원의 진실이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정치사회의 공공적 역량으로써 그 진실을 찾아낼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은 일종의 자포자기에 해당한다. 현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 이런 절망감을 가진다면, 최근세사의 지독한 정치폭력들을 감안할 때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주어진 사건에 관해 실체적 진실 그 자체가 있고, 그것을 밝혀야 잘못한 만큼만 벌을 주는 비례와 균형과 정의의 원칙이 모두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의 터전은 그 어떤 역사적 현실에 토대를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노예제가 만연한 현실에서 노예해방의 희망이 싹트고, 신분사회의 질곡으로 꽉 막힌 현실에서 자유사회의 희망이 싹트는 것처럼, 희망이란 무슨 증거 따위가 애당초 필요 없는 것이다.

위 표에서 B에 해당하는 태도, 즉 "경찰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보면서 "특검은 필요없다"고 보는 태도는 진상규명이 어차피 제대로 안 되리라는 자포자기의 표현이다. 이러한 절망감을 한 꺼풀 벗겨보면, 진상규명을 끝내 추구하면 굉장히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리라는 두려움이 있다. 그런데 왜 진상을 조사하는 것이 "국력을 탕진하는" 치열한 다툼이 되어야 할까? 권력 편에서 완강하게 감추려고 해서 그럴까 아니면 시민단체에서 말도 안 되는 의혹을 끊임없이 들고 나와서 그럴까?

다시 드레퓌스 사건이나 워터게이트 사건을 상기해보자. 권력기구를 상대로 권력을 가지지 못한 시민들이 의혹을 제기할 때, "말도 안 되는" 의혹이라면 치열한 다툼은 고사하고 애당초 의제 자체가 성립이 되겠는가? 따라서 B 유형의 태도란 결국, 이 문제가 권력 차원의 은폐임을 내심으로 인지하면서도 권력에게 도전하지 말고 넘어가는 게 안전하다고 보는 순응주의의 묵시적인 표현이 된다.

정부권력과는 부딪치지 않는 편이 분명히 안전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부딪혔을 때 어떤 위험이 따를까? 또는 정부에게 항의하고 반대했다는 이유로 위험이 애당초 따라야 하는 것일까? 정부와 반대파 사이에 다툼이 있으면 곧 혼란이고 "국력이 탕진"되는 것일까? 이런 종류의 정치의식을 20세기도 지나 21세기에서도 만나야 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이럴 때마다 나는 "당파 싸움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고정관념이 이 사회에 얼마나 뿌리 깊게 도사리고 있는지를 실감한다. 그런 생각을 고수하고자 하는 사람은 영국의 경우, 내전과 당파싸움으로 점철된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어떻게 세계를 주도하는 지위에 올랐는지를 잠시만 되새겨보기를 권한다.

이견과 문제제기 자체를 혼란으로 치부하고, 분열과 단결을 양자택일하라고 들이대면서 "뭉치지 않으면 죽는다"를 협박하는 태도는 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처>나 <타워링> 같은 재난상황에서만,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오직 승리를 목표로 삼는 농구팀이라도 20초 타임아웃에서는 단결만이 미덕이지만, 평소에 훈련하는 과정에서는 전략적 전술적 목표에 관해 다양한 의견과 논쟁이 있다고 해서 팀이 망가지지는 않는다.

어떤 정파적 이익을 위해 만들어낸 문제와 상황의 본질에 함축되어 있는 문제를 구분하고, 전자의 문제는 결국 힘 대결로 결판이 나겠지만 후자의 문제는 진실과 이치에 따라 판명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은 결코 순진한 이상론이 아니다.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진보의식이 단순히 한 계급의 주도권을 다른 계급의 주도권으로 바꾸는 데에 그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정치를 단순한 권력투쟁 이상의 것으로 만들려는 희망을 포기하면 안 된다.

사태의 진상에 입각해서 잘 한 만큼 공로를 인정하고 잘못한 만큼 책임을 묻는다는 비례와 균형의 원리가 그런 희망 위에서만 자랄 수 있다. 이런 비례와 균형의 원리 위에서만 법이 모두에게 공정하게 행사될 수 있는 여지가 열리고, 공동체의 이름으로 권력을 통제하고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기제로서 기능할 수 있다. 물론 비례와 균형의 원리는 탈정치적인 피안의 영역에서 정치적인 세속의 영역으로 하사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공동체 안에서 조성되어야 한다. 그 조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소한 발상을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자포자기가 극복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의 정치의식은 표면적인 진보/보수의 구분과 상관없이 정치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절망과 자포자기가 대단히 많이 섞여 있다. 진보는 본시 희망을 먹고 사는 것인데, 절망과 자포자기가 많이 섞인 정치의식일수록 진보정치가 성장하기에 좋은 토양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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