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그렇게 말한다. 어제 오전 한나라당 농성장에 나타나 한나라당이 많이 양보했으니 미디어법 처리 시기는 야당이 양보해야 한다고 한 마디 한 뒤에 여야 합의가 도출됐다며 그렇게 평한다. 말 한 마디로 꼬인 협상을 푸는 위력을 발휘했다고 상찬한다.
정말 그럴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천금 같은 한 마디가 야당마저 움직인 걸까?
▲ 2일 오전 한나라당이 농성을 벌이는 국회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을 찾은 박근혜 전 대표 ⓒ뉴시스 |
그렇게 보려면 입증해야 한다. 박근혜의 한 마디가 야당의 양보를 끌어낸 정황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없다. 선후관계는 성립될지언정 인과관계는 확정되지 않는다.
과정을 살피면 알 수 있다. 민주당의 양보를 끌어낸 건 박근혜의 입이 아니라 김형오 의장의 최후통첩이었다. 오후 1시 40분, 그러니까 박근혜 전 대표가 한 마디 한 지 2시간 30분이 지나 허용범 국회 대변인이 "김형오 의장이 방송법 등 15개 쟁점범안의 심사기간을 오후 3시로 지정했다"며 직권상정 입장을 밝힌 게 결정적 계기였다. 직권상정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그리고 민주당 당직자와 보좌진 200여명의 국회 본청 진입을 막음으로써 민주당에게 직권상정 저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케 했고, 이것이 결국 민주당의 양보를 끌어냈다. 민주당에게 '단계 처리'라는 반쪽짜리 전리품이라도 챙길지, 아니면 '도루묵'을 시식할지를 선택하도록 압박한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한 일은 없다. 김형오 의장의 중재로 잡힌 가닥에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찍고자 했던 마침표, 즉 처리시한 명기를 되읊었을 뿐이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를 얹은 것뿐이다.
물론 배제할 수는 없다. 박근혜 전 대표가 이런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민주당이 직권상정을 하더라도 박근혜계의 표결 불참 또는 반대표 행사를 기대하게 했다면 민주당이 양보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는 가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 전 대표의 한 마디는 민주당에 쐐기를 박는 따끔한 한 마디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아니다. 이럴 가능성은 애당초 없었다. 박근혜계의 최경환 수석정조위원장이 중재를 시도한 김형오 의장의 탄핵을 거론하는 등 한나라당이 모처럼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조선일보'의 보도가 알려준다. 박근혜 전 대표는, 그리고 박근혜계는 쟁점 법안 자체에 대해 '반란'을 꾀할 의사가 없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지적했던 건 법안 그 자체가 아니라 절차와 과정이었다. 국민적 공감대 위에서 처리되지 못하는 입법이 국민에게 고통과 실망을 안겨준다고 말했을 뿐이다.
이런 박근혜 전 대표에게 직권상정은 가혹한 시련이었을 것이다. 절차와 과정을 중시한 자신이 절차와 과정의 파탄을 의미하는 직권상정에 순순히 몸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고 표결에 불참하면 이명박계와의 전면전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박근혜의 한 마디를 '면피용'으로 이해해야 한다. 직권상정과 같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표결 참여의 명분을 획득하기 위한 '보험들기'로 이해해야 한다. 자신의 마지막 호소마저 야당이 거부하는 바람에 직권상정을 불렀으니 이제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고 웅변하기 위한 '퍼포먼스'로 이해해야 한다.
현명한 중재가 아니라 절박한 부탁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박근혜의 한 마디는 여야 합의를 이끌어낸 위력적인 말이 아니라 정치적 곤경을 피하기 위한 다급한 간청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냥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박근혜의 절박하고 다급한 외침이 김형오의 직권상정 압박 기류 덕에 용케 메아리를 불러왔을 뿐이다.
그래서 거둬야 한다. 박근혜에 대한 상찬을 거둬야 한다.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았다고 소에게 사냥꾼이란 찬사를 보내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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