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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昌은 보수이고, 盧는 진보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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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昌은 보수이고, 盧는 진보였나?

[박동천의 집중탐구④] 진보와 보수

제3장 진보와 보수

진보는 무엇이고 보수는 무엇인지, 진정한 진보와 보수는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경계선은 무엇인지, 등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논의하려면 따로 책을 한두 권 써야 한다. 여기서 나는 진보와 보수를 어떤 고유한 내용이나 원칙을 가진 이념으로 보기보다는 정치적 공방에서 상대적인 입지 선정의 문제로 이해하는 시각을 취할 것이다.

물론 실질적인 원칙에서 진보와 보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득권과 사유재산권을 얼마나 인정하고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등의 차원에서는 상당히 실질적인 내용상의 차이가 있다. 또한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회현상의 원인을 주로 개인의 특성과 행동에서 찾느냐 아니면 구조나 제도에서 찾느냐는 차이 역시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중요한 갈림길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어떤 원칙이나 이념의 차이란 절대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정치적 성향을 구분하는 용어는 예외 없이 현실정치의 진행 안에서 아주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된다. 그리하여 모든 정치적 용어들은 - 정치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의 모든 단어들은 -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무슨 뜻을 붙였든지, 시간이 지나면 잡다하고 복잡한 용례들을 가지게 된다.

제1절 진보나 보수의 "진정한" 의미는 괘념치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 고집 중에는 용어나 개념의 정확한 사용을 위해서는 그 용어나 개념의 정의를 알아야 한다는 발상이 있다. 얼핏 생각할 때 매우 당연한 고집으로 보인다. 단어의 뜻을 모르고서야 단어를 정확하게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컨대 대통령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한국어사전 또는 백과사전 또는 정치학용어사전 등, 각종 사전류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한국인으로서 대통령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알기 위해 사전을 한번이라도 찾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혹시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그럴 일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설령 그런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때 본 사전의 뜻풀이 덕택으로 대통령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랑색이 무슨 뜻인지, 산이 무슨 뜻인지, 사랑이 무슨 뜻인지를 알기 위해 사전을 찾지는 않는다. 외국인으로서 한국어 "노랑", "산", "사랑"이 자기네 나라 말로 무엇에 해당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한영사전이나 한국어사전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생소한 영어단어를 만났을 때 영한사전이나 영영사전을 참고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영어가 모국인 사회에서 "yellow", "mountain", "love" 등의 단어가 무슨 뜻인지를 사전보고 익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여전히 정의(定義)에 관해 막연한 두려움과 동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일상의 사소한 예만 들면서 정의의 중요성을 의도적으로 훼손하고 있지나 않은지 의심이 들 것이다. 그렇다면 전문적이고 중차대한 예를 들어보자.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의 불씨가 되었던 발언 "대통령이 뭘 잘 해서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2004년 2월 24일 방송기자클럽과의 회견)를 보자.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해서 공무원의 중립의무를 어겨 국법질서를 문란케했다는 것이 국회의원 159명이 서명하고 발의해서 193명이 찬성한 탄핵소추안의 첫 번째 이유였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자기들이 뽑은 대통령을 일년 만에 탄핵한 국회에 분노하여, 그해 4월 15일에 치러진 국회의원선거에서 한나라당에게서 24석과 민주당에게서 53석을 빼앗은 반면 열린우리당에게는 105석을 보태줬다. 대통령 발언의 한계에 관해서 선거로 나타난 민의가 헌법재판소의 의견과 같다고 봐야 하나 다르다고 봐야 하나?

이런 경우,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발언의 한계를 결정하는 데에 대통령에 관한 정의가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대통령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사전에 나오는 정의보다도 훨씬 상세하고 치밀하게 규정된 수많은 법조문들과 판례들이 있지만 여전히 이런 사안은 본질적으로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즉, 대통령의 직무나 권한의 한계에 관해서 모종의 "진정한" 답을 책이나 선례와 같은 전거를 연구해서 찾을 수 있다는 발상은 시작부터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대통령이 무엇이냐"는 것과 같은 질문은 실제 정치현실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응답되는 종류의 질문이다. 주어진 시점에서 대통령직을 맡은 인물의 언행, 그가 추진하는 정책, 그리고 그의 언행과 품성과 정책과 성과 등에 관한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평가와 의견들이 모두 대통령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한 무수한 요소들 가운데 일치의 정도가 높은 것들만이 사전이나 교과서에는 실린다. 반면에 실제 현실에서 대통령이 내려야 하는 결정이란 중요성이 높을수록 사회적으로 논쟁이 불붙기 쉬운 것들이다. 그만큼 사전이나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란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일수록 적실성을 가지기 어렵게 된다.

진보가 무엇이며 보수가 무엇인지의 경우도 이러한 사정은 비슷하다. 질문을 진정한 진보 또는 보수라는 방향으로 묻게 되면, 답하는 사람들은 진보가 무엇이어햐 하는지, 보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관해 결국 자신의 희망을 피력하는 데 그칠 것이다. 당연히 희망이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진보나 보수나 모두 한국어에 옛날부터 있던 용어가 아니라 서양 정치의 근대사에서 태어나 사용되다가 동양으로 건너와 번역된 말들이다. 따라서 이미 서양의 역사 내부에서부터 진보, 개혁, 좌익, 보수, 왕당, 극우, 등의 용어들은 당시의 쟁점에 따라서 그리고 말하는 사람의 목적에 따라서 잡다하고 헝클어진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착종된 의미들이 주로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뒤에도 다시 어떤 논리학적 원칙으로도 해명할 수 없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의미와 용례들이 전화되고 번졌다. 나중에 다시 논의하겠지만, 일례로 민족적 동질성의 강조만 해도 서양의 경우 전형적인 우익의 가치에 해당하지만 한국에서는 보수보다는 진보 쪽에서 자주 부각하는 안건이다.

▲ 뜨거움 자체 또는 차가움 자체가 있을 수 없듯이, 진보 그 자체라든지 보수 그 자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연합뉴스

제2절 명목 척도와 순서 척도

이 책에서 나는 "진정한" 보수나 진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진보나 보수라는 단어를 현실정치 속의 상대적인 위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할 것이다. 따라서 개념의 정합성이 매우 느슨하고, 보기에 따라서는 모순이 개재한다고 비판할 사람도 있겠고,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경계도 불명확하고 엉성해서 서로 겹쳐지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것이 현실정치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진보나 보수라는 단어를 내가 사용하는 방식은 이미 앞에서 실마리가 제시되었다. 예컨대 2002년 대통령 선거로 친다면 이회창을 지지한 세력을 보수로 분류하고 노무현과 권영길을 지지한 세력을 진보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자유주의가 진보냐"는 의문을 가질 독자들이 꽤 있을 것이다. 그 문제는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논할 테니까 잠시만 미루고, 먼저 개념적 구분에 관한 일반적인 논점 하나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회과학 방법론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빌려 쓰자면, 명목 척도와 순서 척도에 관한 이야기다.

순서 척도란 차다/뜨겁다, 또는 희다/검다 등과 같은 개념들이 해당한다. 진보/보수의 구분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진보 그 자체 또는 보수 그 자체는 있을 수 없음이 쉽게 드러난다. 어떤 두 개의 노선이나 성향이 주어진다면 그 중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진보적이거나 더 보수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노선 차이 가운데에는 진보/보수의 구분과 상관없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뜨거움 자체 또는 차가움 자체가 있을 수 없듯이, 진보 그 자체라든지 보수 그 자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반면에 명목 척도란 남자와 여자의 구분과 같은 경우를 가리킨다. 한 남자는 곧 여자가 아닐 뿐, 다른 남자보다 더 남자일 수는 없다. 남자라면 남자라는 점에서는 모두 똑같지 남자인 정도에 무슨 차이가 있을 수는 없다. 물론 남성다움/ 여성다움과 같은 사회적으로 첨가되는 의미를 말하게 된다면 순서 척도의 의미가 크게 가미된다. 일부 남자보다 더욱 남성다운 여자도 있을 수가 있고, 일부 여자보다 더욱 여성다운 남자도 있을 수가 있다.

진보/보수의 구분은 순서 척도에 가깝지 명목 척도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부인할 길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실제 현실의 정치적 수사학에서 "진보"나 "보수"라는 단어들은 마치 명목 척도개념인 것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상대방의 진보적 성향을 악용해서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으려는 언사들이 전형적으로 그러한 사례들이다. 김대중이나 노무현을 "빨갱이"라고 부르는 행태가 인민 중 무지한 일부에게 겁을 줘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유치한 수사학임을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는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을 잘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때때로 "진보",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반정부" 등의 단어 자체를 위험하게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2003년 10월 30일 김진표 당시 경제부총리가 전날 발표한 부동산 대책을 이야기하면서, "정부 입장에서 더 강력한 것은 사회주의밖에 되지 않는다"고 발언한 경우가 그렇다. 일례로 <프레시안>의 박태견 기자는 이를 "투기꾼을 제외한 국민 대다수를 빨갱이로" 몬 "망언"이라고 비난했다. (☞관련 기사 : 김진표 '사회주의 망언' 일파만파) 김진표의 발상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겹치는 공간을 허용하지 않고 이분법적 명목 척도에 입각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박태견의 응수 역시 명목 척도의 문제를 적확하게 짚어내지 못한 채, 부지불식 간에 이분법 안에 속하는 어휘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말았다.

명목 척도에 입각한 김진표의 언표를 순서 척도에 입각해서 비판하고자 했다면, "이미 국가가 부동산에 개입하는 것이 사회주의적 발상인데, 더 이상의 사회주의는 왜 안 된다는 것인가?"와 같은 형태로 질문이 제기되었어야 했다. 물론 박태견은 김진표를 직공하는 데에 목표가 있었고, 나는 지금 보수/진보의 이분법을 문제삼는 데에 목표가 있기 때문에, 박태견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단, 만약 유치한 이분법이 풍미하는 한국의 정치의식을 나처럼 문제 삼는 사람이라면 박태견처럼 말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봐야 하리라는 말이다.

막스 베버가 플라톤을 원용해서 만든 용어 이념형(idealtyp, 또는 영어로는 ideal type)이라는 것이 바로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순서 척도에 관한 이야기다. 난삽하기 이를 데 없는 베버 특유의 문장은 각주로 돌리고 쉬운 한국말로 풀어 쓰면, 복잡다기하면서 서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현상들을 한두서너 가지 현저한 특성에 따라서 분류해서 바라보기에 유용한 것이 이념형이다.

베버가 이념형으로 분류한 대표적인 사례는 카리스마적 지배, 전통적 지배, 법적-합리적 지배 등, 정당성의 세 유형이다. 어떤 사회에서도 이 세 가지 성격들은 동시에 나타나지만, 상대적으로 어떤 성격이 두드러지느냐에 따라서 유형 분류가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예컨대 카리스마적 지배 유형이라고 봐야 할지 전통적 지배 유형이라고 봐야 할지 경계에 위치하는 사회의 경우들이 실제에서는 당연히 있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수와 진보의 경우에도 전형적인 보수와 전형적인 진보의 유형을 이념형으로 형상화해 볼 수는 있지만, 극단적으로 양분된 사회가 아닌 한 실제 행위자들은 두 유형의 중심과 중심 사이에 넓게 펴져서 분포하게 된다. (계속)

각주 : 이념형이란 "대단히 여러 가지의 분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분절되어 있고, 대개는 현존하지만 때로는 결여되기도 하는 구체적인 개별적 현상들을 하나 또는 일부 관점에 일방적인 강세를 부여하면서 종합함으로써 형성된다. 그러한 현상들이 이들 일방적으로 강조되는 관점에 따라서 하나의 통합된 분석·종합적 구성물로 질서가 잡힌다." (Max Weber, The Methodology of the Social Sciences. Edward Shils와 Henry Finch가 번역하고 편집한 영어본(New York: Free Press, 1997), p.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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