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급등은 지난해 내내 시장을 쥐락펴락했던 위기설을 다시 불러냈다. 국내 금융권 상환능력 이상의 단기외화채무가 오는 3월 만기 도래해 국가 디폴트(채무 불이행) 사태가 온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지난해 여름 나돌던 위기설 내용과 다를 바 없다.
여론의 관심이 몰린 '3월 위기설'에 대해 이종우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의 의견을 물었다. 이 센터장은 재작년 코스피지수가 2000선을 넘었을 당시 '코스피가 1400선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예측한 국내 대표적 '스타 애널리스트'이자 비관론자다. 지난 달 29일에는 중국 경제 전망 역시 매우 어렵다는 보고서를 내 다시금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지난 1989년 대우경제연구소 증권조사부에서 경력을 시작해 지난해 새로 출범한 HMC투자증권에 안착했다. 가장 오랜 업력을 가진 애널리스트 중 한 사람이다.
이 센터장은 이번 위기설이 과장된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와 관계없이 지난해부터 시작된 세계적 경기침체는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 '세계 경제체제 재구축기'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고난의 시기가 장기화할 것이라는 뜻이다. 다음은 이 센터장과의 전화인터뷰 전문.
▲이종우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프레시안(사진 : HMC투자증권) |
"환율 전고점 돌파 시간문제"
프레시안 : 외환시장이 다시 요동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7거래일 째 빠른 속도로 올라 일각에서는 1500원 선을 다시 찍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환율이 어디까지 오르리라고 보나?
이종우 : 안전자산인 달러화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지금 상승 추세가 이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전고점인 1513원을 조만간 넘어설 가능성도 있다.
이번 환율 상승은 장기간 지속될 것이다. 한 번 치고 올라갔다가 다이나믹하게 떨어지는 형태가 아니고 상당기간 높은 수준에서 머물 수 있다. 그러면 지난해 나타났던 실물 위축 현상이 더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수입업체는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놓일 것이고 환율 상승으로 물가도 강한 상승압박을 받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1400 후반대에서 1500 초반선 사이를 박스권으로 하는 형태가 상반기 동안 지속되리라고 본다. 다만 일각에서 거론하는 1600원, 1700원 수준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수준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었을 때 영역이다.
프레시안 : 이른바 '3월 위기설'이 나오는 이유도 결국 원화 가치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달러난이 심화해 국가부도 사태가 날 수도 있다는 게 요지다. 실제 3월에 큰 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이종우 :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겠지만 위기설에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지금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2000억 달러다. 한미 통화스왑 등을 고려하면 2500억 달러가 넘는다. 이 정도의 돈을 가진 국가가 전체적으로 결제를 잘못해 무너진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지난해 9월 위기설이 돌다가 10월에 위기가 실제 발생했으니 이번에도 비슷한 형태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도 나오겠지만 당시는 리먼 브러더스가 무너지는 특수한 상황이 겹쳤다. 한국의 문제도 아니었다.
환율 급등의 3가지 요인
프레시안 : 과장된 예측이라손 치더라도 외환시장 참가자들 사이에 불안감이 팽배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환율이 이렇게 오르는 원인이 무엇인가?
이종우 : 크게 세 가지다. 해외 요인과 국내 금융부문 요인, 그리고 정책적 요인이 있다.
먼저 거론할 것이 해외 요인이다. 동유럽 등 이머징마켓이 불안해지면서 투자자금 회수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이는 한국 외환시장에도 압박을 가한다. 동유럽처럼 선진국에 비해 금리매력이 높고 기대성장률도 높은 이머징마켓이었던 한국도 투자자금 회수대상국가가 됐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국내 금융권에서 불안한 신호가 나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은행의 후순위채 콜옵션(조기상환청구권) 행사 포기다. 우리은행이 지난 11일 이 같은 결정을 내리자 시장에서 곧바로 우리은행의 CDS프리미엄이 100bp(1%포인트) 급등했다. 해외투자자들이 '아니,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은행이 4억 달러도 못 갚을 정도가 됐나'하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해외투자자는 한국 금융시장을 굉장히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게 됐다. 이들이 한국에 투자했던 자금을 회수해 안전자산 시장으로 옮겨갈 이유를 만들어줬다.
세 번째로 강만수 전 장관 시절 정부가 환율을 억지로 끌어내린 데 따른 기저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정부가 막대한 달러를 퍼부어서 환율 움직임을 인위적으로 바꿔버린 데 대한 후유증이 이번에 생긴 셈이니 새 경제팀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게 됐다.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기에는 환경이 굉장히 어려워진 것이다. 이런 이유들이 지금 한꺼번에 맞물리고 있다.
"위기 '2라운드' 본격 진입…정부 대응 쉽지 않아"
프레시안 : 그런데 정부 입장에서는 환율 상승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 없다. 환율이 일정 수준 이상 오르면 당연히 개입을 해야 하지 않나? 실제 기획재정부도 조심스럽게 그런 입장을 이미 밝혔다.
이종우 : 속도가 중요하다. 환율 상승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면 당연 정부로서도 '스무딩 오퍼레이션'을 위한 개입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돌아가서 오버슈팅하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부의 운신 폭은 제한됐다. 개입이 이뤄지더라도 전 경제팀처럼 인하 목표를 딱 정하고 움직이기는 어렵다. 상승 속도를 조절하는 데 그칠 것이다. 정부가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쓸 수 있는 카드가 딱히 없다.
프레시안 : 진정되는가 싶던 위기가 세계적으로 다시 확산되는 원인이 무엇인가?
이종우 : 크게 볼 필요가 있다. 이번 금융위기 전개를 보면 처음 문제가 생긴 곳은 미국 등 경제 선진국이었다. 뒤이어 이머징마켓에도 위기가 왔다. 이머징마켓의 실물 위기가 또 금융위기로 번지는 게 현재 상태다. 위기 사이클이 한 바퀴를 돌고 이제 '제2라운드'가 시작된 셈이다.
문제는 금융과 실물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마치 에스컬레이터를 타듯 점차 위기 수준이 높아진다는 데 있다. 당장 동유럽에서 국가부도 사태가 현실화하고 있지 않나. 동유럽 다음은 위기가 남미로 번질 텐데 그렇게 되면 아시아도 마냥 안심할 수 없다.
프레시안 : 그러한 위기의 전이를 막기 위해 각국 정부가 다양한 대응책을 내고 있다. 미국은 결국 추가 구제금융책을 내놨고 한국 정부도 구조조정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종우 : 정부 정책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위기 1라운드 때 쇼크로 경제주체들의 심리도 굉장히 악화된 상태다. 결국 각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대응은 기껏해야 '피해는 최소한으로 하자'는 수준이다.
지금 각국의 대응 강도는 전례없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의 통화증가율이 단 1년 만에 100%에 달한다. 말이 안 된다. 또 경기부양을 위해 온 세계가 동시에 0%대로 기준금리를 내리고 있다.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상황이 반전되지 않는다.
▲ 금융시장 불안이 2월 내내 이어지고 있다. 18일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14.00포인트 하락한 1113.19로 장을 마감했고 원-달러 환율은 7거래일 연속 상승한 끝에 전일보다 12.50원 오른 1468.00원을 기록했다. ⓒ뉴시스 |
"온 세계 경제체제를 다시 짜야하는 과정"
프레시안 : 그렇다면 이번 위기는 어떤 식으로 벗어날 수 있나?
이종우 : 이번 금융위기 원인을 단순히 부동산 추락에 따른 서브프라임 정도로 보면 안된다. 더 근본적인 이유를 살펴봐야 한다.
지난 20년 간 세계 경제가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미국도, 세계도 지나치게 많이 소비했다. 적정 수준을 넘어선 소비가 레버리지까지 일으켰다. 20년 간 줄기차게 소비가 '오버런'했다. 결국 레버리지 효과가 사라지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그렇다면 생산은 어떤가? 소비가 정상적으로 이어질 때는 문제가 없었다. 소비에 따라 생산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특히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의 생산량만으로도 전 세계 생필품 소비를 다 커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성공을 보고 다른 나라도 중국식 모델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인도와 베트남 등이 역시 싼 노동력과 높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생산시장에 덤벼들었다. 이때부터 생산도 과잉상태가 됐다. 그런데 과잉소비가 딱 죽어버렸다. 과잉생산 체제로 버티던 나라들이 쓰러지게 됐다. 근본적으로 20년간 지속돼 온 '과잉 경제체제'가 이번에 무너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수준의 세계적 경제구조 대변혁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것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5년부터 1968년까지 이어진 케인스식 경제구조다. 당시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자 기축통화를 찍어내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이 체제가 70년대 들어서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과 독일이 제조업 경쟁력을 갖추면서 미국의 제조업 기반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결국 금태환제가 무너지고 브레튼우즈 체제가 끝났다. 당시 변화 과정에서 나타난 후유증으로 미국이 얼마나 어려웠나. 침체기를 10여년 겪었다.
미국이 10여년 간 체제를 정비하면서 새 시스템을 구축한 게 80년대다. 그때 대안으로 나온 신자유주의가 여태까지 온 세계 경제를 이끌어왔다. 그리고 이제 그 체제가 무너지고 또 새 질서를 찾아야 할 때가 왔다.
프레시안 : 신자유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체제 변화의 시기에 우리가 돌입했다는 소리인가?
이종우 : 결과를 봐야 알 수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다시 복구되거나 세계 경제질서를 재편할 새 체제가 등장할 것이다. 지금이 거대한 변화의 시기라는 점은 맞다. 변화가 끝나는 시점이 지금의 과잉체제 문제점이 바로잡힐 때다.
새로운 질서가 완전히 안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최대한 빨리 새 질서를 찾아내고 이를 정착시켜야만 지금의 고통이 끝날 것이다. 새 체제가 어떤 방식이 될 지는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 몇몇 미래학자들이 이런저런 형태로 말하고 있지만 기껏해야 미국 단일화 체제가 끝나고 다극화가 시작될 것이라는 정도다. 아직은 미래를 논할 때가 아니다.
전체댓글 0